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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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묵스님의 금강경 강론

보현화 2009. 5. 28. 21:52

현묵스님 초하루법회(10월29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모처럼 길상사에 와보니 많이 달라졌습니다.

개원직후 당시 주지스님께서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제가 한 달 동안 주지대리를 봐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길상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 10년 지나고 보니까 도량도 윤택해졌고, 또 공부하는 불자님들도 자리가 잡히고 안정된 것 같아 참 보기가 좋습니다. 한 스님이 원력을 세워 꾸준히 그 도량을 가꾸고 불사를 가꾸면 이렇게 좋아지는구나 하는 현장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합장하십시오! 부처님께서 저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게송 한 구절을 음미하고 법문에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것은 다 덧없이 변해간다. 영원한 것은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부지런히 정진하여라.”합장 내리십시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은 덧없이 변해간다. 영원한 것은 없느니라.’하시면서 오직 열심히 수행 정진하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옛날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구구절절이 새겨들어야할 법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다가 인연의 때를 만나가지고, 보이는 세계로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 다하면 다시 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형상을 갖춘 모든 것은 다 변해가고 사라져갑니다. 이 세상에 모든 보석이나 혹은 물질이나 심지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닦고 수행할 수 있는 이 법당도 언젠가 때가 되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말씀대로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정진해야 되느냐하면 부처님의 첫 법문이 놓아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많은 법문을 하셨는데 제일 첫 법문이 ‘놓아버려라. 방하착(放下著)하라, 모든 집착을 다 놓아버리라’그랬습니다. 소중한 법문을 하신 것이 놓아버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놓아버리면 대단한 것이지요. 그 이치를 알고있으나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놓아버리고 비우는 것이 참다운 보시고 최고가는 공덕이라고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상과 아집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집에 가려가지고 우리의 청정한 참된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놓아버리고 고구정령(苦口丁寧)히 일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금강경을 공부하는데, 금강경의 내용은 비우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모든 팔만대장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금강경으로부터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또 금강경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을 가리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수보리존자와 부처님께서 문답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를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보리심을 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의 답이 금강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하느냐 하는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간단명료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보리심을 낸 다음에는 수행하겠다는 그 초발심을 잘 지키고 그 마음을 잘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마음을 냈을 때 그 순수한 초발심, 그것은 참된 마음이고 또 밝은 신심이고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원력이 담겨있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이 순수한 초발심을 잘 지키고 그 마음을 잘 다스려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마음을 내고 뜻을 세웠다가도 좀 지나면 게으름이 쌓여가지고 흐지부지하는 수가 참 많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잘 지키고 그 마음을 잘 실천하라는 것을 강조하셨고 그 전체가 금강경내용에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방법 중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첫째는 원력을 세워야 됩니다. 목표를 세우고 높은 뜻만 세워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용이 없겠지요. 그래서 두 번째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력만 해서 되느냐?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복 짓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다 같이 따라 해보세요! “원력을 세우자” “노력을 하자” “복 짓는 마음으로 살아 가자”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을 때 참다운 수행자일 수 있고 또 재가불자 중에서도 가장 잘사는 방법을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즉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가 없겠지요.


금강경을 우리가 독송을 하는데 우리종단에서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정해가지고 그 경전에 귀의하고 근본가르침을 삼고 수행정진하고 있습니다. 이 금강경은 참으로 중요한데,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나 혹은 집에서 혹은 절에서도 틈틈이 읽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거의 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합니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나라에서는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경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원래 구마라집 스님은 본명이 ‘쿠마라지바’입니다. 인도북부와 중국근방에 ‘쿠차’라는 나라가 있는데, 쿠차국의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분이‘구마라지바’입니다. 아버지는 그 나라의 재상이었고 어머니는 공주였는데 아버지 이름이 ‘쿠마라’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지바’였습니다. 그래서 부모 이름을 따서‘쿠마라지바’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주 영특하고 총명해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로 인도 말을 배우고 외국어에 능통하여 3~4개 국어를 일찍이 마스터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20대쯤 되어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는데 워낙 머리가 영리해서 이 구마라지바 스님의 뜻을 통하고 번역을 통해서 경을 읽으면 너무도 쉽게 불자들이 접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서 이 구마라지바 스님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경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삼국시대가 끝나고 16제국이 서로 다투고 있을 때입니다. 그중에서도 중국본토에 전진이라는 나라의 왕 부견이 불법을 공부하고 싶고 경을 번역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하고 싶어서 이 구마라지바 스님을 모셔오라고 엄명을 내립니다. 그냥 모셔오라면 안 보내줄지도 모르니 군사를 대동하여 모셔오라고 하면서 군사 7만명을 동원하여 여광이라는 장군을 시켜서 구마라지바를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쿠차국에서도 그렇게 소중한 인재를 쉽게 내주지 않으므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구마라지바 존자님을 수례에 태워 모셔옵니다. 그런데 모셔오는 도중에 전진이라는 나라에서는 국왕 부견이 암살을 당해버립니다. 그래서 전진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후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때 여광장군이 구마라지바 존자를 모시고 오다가 나라가 없어지니 돌아올 수가 없고 하여 중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자기가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구마라지바는 전진에도 고국에도 갈수가 없게 되어서 중간에 눌러앉아 중국서민들의 말을 배우고 공부하면서 15년의 세월을 허송하게 됩니다. 그동안에 중국말을 제대로 익혀서 중국말에 달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후진이라는 나라의 왕의 아들이 다시 왕이 되었는데 그 왕이 불심이 아주 돈독하여 많은 군사를 보내어 구마라지바 존자를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구마라지바 존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구마라지바 존자를 모시는데 두 나라가 없어진 셈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신 것입니다.


후진에 초청되어온 스님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국사로 임금님의 스승으로 지내면서 그 나라에서 2천명이나 되는 인재를 뽑아서 스님의 가르침을 받게 합니다. 그러면서 역 경사업을 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님은 그곳에서 9년간을 머물면서 중국사람 보다 더 훌륭한 번역을 했는데 무려 374권이나 되는 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때 제일먼저 번역한 것이 금강경입니다. 그만큼 팔만대장경 중에서 금강경이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금강경번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 스님이 번역한 경 을 수지 독송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장 스님이나 다른 스님들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금강 경을 번역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봐도 구마라지바 스님보다도 못한 것이라서 다른 스님이 번역한 것은 박물관이나 대학도서관에 연구 자료로 보관되어 있고 독송하지 않는다고 합 니다. 그리고 구마라지바 스님은 이름도 ‘구마라집’이라고 다시 정하고 대작 번역불사 를 잘 마무리하고 중국 땅에서 마지막 임종을 하셨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는 구마라집 스님의 경을 읽는데 이 스님이 구구절절이 금강경을 독 송하기를 원하면서 당신 나름대로 좀 더 깊은 맛을 들여서 번역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 리가 젊을 때 연애편지를 쓸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쓰는데 구마라집 스 님은 그보다 더 강열하게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하고 이런 정도의 깊은 뜻 을 담고 금강경을 역경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읽어도 음률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리고 금강경 전체의 뜻을 확실히 이해했기 때문에 금강경 속에 아주 중요한 사구게 중 하나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그러는데 ‘응당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하는 이 구저를 첨가해서 집어넣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말을 집어넣어면서도 금강경의 뜻을 너무도 확실하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그렇게 소중하기 때문에 이 스님이 제일먼저 벌린 불사이고 또 우리들이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셔야 됩니다.     

모든 부처님이 금강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도 수지 독송하고 금강경정신으로 살아가면 최대한 이 세상에서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독송할 때는 꼭 발원을 해야 됩니다.‘이 금강경을 읽는 공덕으로 한 생각 틔우고 맑힘에 다겁생에 지어온 모든 죄업이 소멸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금강경을 읽는 공덕으로 모든 불자들이 다함께 깨달음을 성취하고 성불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걸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리고나서 ‘이 금강경을 읽은 공덕으로 선망부모 조고조상 모든 영가들이 다함께 극락왕생하기를 축원합니다.’이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금강경을 읽는 공덕이 그렇게 또 좋게 회향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셨고 또 수행자가 어떻게 잘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제시했기 때문에 옛날 선원에서도 금강경을 꼭 수지 독송했습니다.


금강경소에 보면 아상을 비우라고 했습니다. 나를 철저하게 비우고 버리라는 것이거든요. 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집착과 상에 빠져가지고 마음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금강경을 그렇게 수지 독송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상을 비우지 못합니다. 남편이라는 상, 어머니라는 상, 부부라는 상, 그런 상에 집착해가지고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하고 그렇게 하고서도 내가 당신의 남편이니까, 내가 어머니니까... 이런 상에 집착해서 잘못을 반성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상을 비우면 서로가 인격을 존중하고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데 이런 상에 집착하다보니까 함부로 말을 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런 것입니다. 내가 우월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자꾸 아쉬움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그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키웠으면 됐지 너희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너희들이 열심히 사회에 이바지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내가 너희들을 키워주었는데 내 말을 안 듣고 하다보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왜 그러냐하면 나라는 집착, 고집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비우면 행복한데 잘 안됩니다.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놓아버린다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무심제일” “무심합도”낙심이라는 것은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거든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제일이나 ‘무심합도’즉 ‘무심하면 도와 합쳐질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그랬습니다. 참 좋은 구절이지요. 여러분도 가끔 ‘무심합도’라는 얘기를 종종 새겨보시면서 마음을 비우는데 귀감을 삼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데는 공부도 이룰 수 있고 여러 가지 행복이 온다는데도 그것이 잘 안되지 않아요. 그런데 마음이 내킬 때 항상 복스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첫째 원력을 세우고 두 번째 노력을 했는데 복 짓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내가 항상 베풀고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좀 털어버리고 항상 상대를 배려한다는 마음이거든요.

절에서도 보면 천도재를 지내고 또 가정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요즘 보면 귀찮으니까 제사를 안 지내려고 그래요. 절에 와서도 천도재를 자주하는 것을 보고는 영가가 오는지 안 오는지 모르겠고 형식적으로 하는 건데 싶어서 마음을 잘 안냅니다.


저는 절에 71년도에 송광사에서 입산해가지고 스님이 되어 선방에서만 다니면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지리산 칠불사가 좋아서 거기서 10년을 눌러 살았습니다. 그 때 제하고나면 스님들은 걸망을 챙겨서 만행을 떠나는데 저는 그곳에 ‘10년을 눌러앉아 정진해 보면 좋을 것이다.’고 생각해서 나가지 않고 나가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님들이 떠난 뒤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서 선방에 눌러앉아 지내는데 하루는 법당보살이  올라와서 스님! 스님! 나와 보세요. 급한 일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원래 선방이나 선원은 재가불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법당보살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상당히 다급한 일이 생겼는가 싶어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나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아래로 100미터 쯤 내려가면 큰 절이 있는데 칠불사에 주지스님도 나가셔서 안계시고 다른 스님도 아무도 안계시는데 지금 이제 계 받은 스님 혼자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상담하려 왔는데 스님이 내려와서 좀 봐주시라고 합니다. 내려오면서 얘기를 하는데 보니까 그 법당보살님 친척되는 사람이 경남 진주에서 초등학교교장선생을 하고 계시는데 그 가족이 다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당에 내려가서 법당 한쪽자리에서 그분들을 만나서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교장선생 내외분이 오셨는데 궁금한 이유를 묻는 것이 뭔가 하면,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그 집에 경상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꿈에 할아버지를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 려니 했는데 아침밥을 먹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교장선생에게 야단 을 치면서 오늘은 학교로 가지 말고 산소에 가서 참배하고 절을 세군 데로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삼천포 ‘우릉사’하고, 하동 ‘쌍계사’하고 마지막으로 칠불사로 올라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스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럼 그 딸아이는 어데 있습니까? 하니까 마당 밖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들어와 보라고 하세요. 했더니 딸이 들어오는데 보니까 이쪽에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법당 문을 턱 들어오는 순간을 보는데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거예요. 마치 옛날 시골 대청의 컴컴한 마루 밑에서 보던 고양이의 눈에 불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쿠! 이거 보통문제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옆에 와 앉으라고 했더니 그 딸이 마침 대학동아리의 불교학생회에 다녀가지고 절의 법도를 잘 아는 거예요. 아주 공손히 깎듯이 삼배를 올리면서 ‘아이구! 스님 공부하시는데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고 그래요. 그래 앉아보라고 하고 ‘할아버지를 봤다면서?’하니, ‘예’그럼 지금도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가? 하니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돌아가신 분이 왜 오셨는지 한번 여쭈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가만히 정좌하고 앉더니 몸에 힘을 다 빼고는 고개를 돌리는 것입니다. 고개를 세 바퀴 돌리고 난 뒤에 “으흠”하는데 조금 전의 여대생 목소리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자기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네 이놈! 산소에 벌초도 안하고 제사도 안지내고 나쁜 놈!”그러더라고요. 그래 제가 교장선생님한테 성묘도 안하고 제사도 안 지냈습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스님, 참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저희집사람이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서 한 삼년은 모셨는데 저 형제가 두 사람이라서 어머님 제사는 삼천포에서 약국을 하는 동생이 지내고, 아버님은 자기가 지냈답니다. 그랬는데 집사람이 교회에 다니다보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귀찮아져서 ‘여보, 삼천포 동생한테 제사비를 좀 부쳐주고 제사를 안모시면 어떨까요, 제사비를 부쳐주고 제사지내는 김에 밥 한술 더 떠놓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꾸 해서 삼천포 동생에게 전화해서 형수사정이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니까, 동생은 절에 다니는 사람이라 ‘형님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죠.’그래서 제사 때면 돈을 10만원씩 부쳐주었답니다. 그러고 제사는 일체 다 놓아버렸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이야기를 듣고는 교장선생 사모님한테, 사모님 이렇게 벌어진 일이 사모님 때문에 그리된 것 같습니다. 지금 아버님이 원체 화가 났으니 일단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십시오. 다 큰 딸아이가 이렇게 정신이 없으면 앞으로 시집가는 문제도 큰일이고 공부도 큰일입니다.  그러자 사모님 되는 여자 분이 얼굴이 노래지더라고요. 노래지면서 일어나서는 ‘아이구,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성묘도 잘 하고 제사도 잘 지내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하면서 절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부릅뜨고 있던 딸아이가 눈을 감으면서 뒤로 쓰윽 나가떨어지는 겁니다. 한도 천천히 나가떨어지니까 이 사모님이 절하다가 말고는 아이가 바닥에 떨어지면 뇌진탕이라도 걸릴까싶어서 얼른 가서 머리를 받히더라고요. 그만큼 천천히 넘어갑디다. 머리를 바치고 난 뒤에 아이가 머리를 털면서 일어나는데 일어나서는 아주 화를 내는 거예요. ‘왜 건드리느냐고?’그래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신이 들린 사람은 맨발로 작두위에서 춤을 추어도 다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신이 들어왔다가 나갈 때에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거든요. 그래서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리면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나갈 때 장애를 일으키니까 다른 기운이 건드리면 안 됩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절대 뇌진 탕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고 했는데, 제가 또 궁금한 것이 사후의 세계도 궁금하고 앞으로 절대로 딸아이에게 오지 말라고 부탁도 해야 되겠고 그래 이야기를 더하려고 그러니까 그때 시간이 되어 칠불사에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지리산 칠불사에는 대웅전 옆에 조그만 문수전이 있습니다. 원래 지리산에 상주하는 문수보살이 계신다고 해서, 그 문수보살님한테 늘 천일기도를 모시고 있는 그런 법당이 있습니다. 그 법당에서 목탁소리가 톡톡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딸아이가 하는 말이 ‘스님 저 목탁소리 때문에 할아버지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하는 겁니다. 그때에 제가 이 천수경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계 받은 스님이 천수경을 치면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그 천수경과 목탁소리 때문에 할아버지가 법당에 못 들어온다는 겁니다. ‘목탁소리가 나지 않는 데로 갔으면 좋겠습니다.’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른 데로 옮겨서 다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몇가지 물어보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 앞으로 이 손녀한테 자꾸 와서 이러면 손녀의 앞날에 지장이 많으니 될 수 있으면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좋은 영계로 가서 극락왕생하시고 제사 때만 와서 제사 잡숫고 가십시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제사만 지내고 성묘만 잘 한다면 내가 왜 손녀를 괴롭히겠느냐’고 이렇게 야단을 치더라고요. 그랬더니 딸의 어머니가 사정을 하면서 ‘아이구,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틀림없이 제사 잘지내고 성묘 잘하겠습니다.’하고 용서를 빌고 그렇게 하고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다시 문제가 있으면 와서 상의를 하십시오.’ 하고 보냈는데 그 뒤로는 그 가족들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법당보살님이 화개장터까지 배웅을 해줬는데 내려가면서 딸아이가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낸다는 이것도 복 짓는 마음이에요.

내가 좀 수고롭기는 하지만 그 복 짓는 마음에서 또 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잘 지내고 제사를 잘 모시면 그 당사자인 영가가 30% 가져가고 나머지 70% 복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력을 세우고 노력을 하고 복 짓는 마음으로 제사를 잘 모셔주고 효도를 해야 됩니다. 집에 가면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를 하시고 돌아가신 영가 분에게도 참 복 짓는 마음으로 그렇게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시대가 어렵고 여러 가지 위기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럴 수록 우리 불자들은 정진을 하고 수행을 하면서도 항상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합장하십시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합장 내리십시오)


이 세상에는 칭찬하는 소리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영원한 칭찬도 없고 영원한 비난도 없습니다. 나를 비우고 맑히면 ‘어떤

비난도 그것을 선지식의 말씀이다’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지리산에서 10년 동안 살 때 법정 큰스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주위에 모두가 다 선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주위의 모든 도반들 혹은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꾸지람을 주는 사람들까지도 선지식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비난하고 책망을 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법정 큰스님한테 그런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아주 마음속에 그런 것이 귀감이 되고 해서 지금까지 수행을 잘해오고 있었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생각하십시오.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모두가 다 선지식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처럼 영원한 비난도 없고 영원한 칭찬도 없습니다.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요즘 보면 연예인들도 그 비난받는 것이 괴로워 자살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과 금강경을 좀 읽고 독송하고 이런 마음을 비우는 걸 연습했더라면 그런데 초연하지 않았겠나하는 생각이듭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사자는 자기 마음속에 중심이 잡혀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자와 같이 어젓하고 당당하라고 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우리가 마음고생 하는 데는 두 가지 그물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그물과 물질이라는 그물의 두 가지가 있어요.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마음고생 할 일이 없습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눈에 보이는 재물이 다 그렇습니다. 나하고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욕심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비우고 나하고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면 마음을 접으면 됩니다. 욕심을 내다가 마음고생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노력한 만큼 그렇게 인연지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사람도 물질도 나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연꽃은 선의 정신을 말하고 불교의 상징입니다. 오탁악세에 젖어 살더라도 자기마음 속에 맑고 향기로운 연꽃을 피우며 살아라. 이렇게 해서 맑고 향기로운 이런 운동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으로서 항상 연꽃의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연꽃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길상사에 왔다 가면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이 되어야합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은 향기를 머금고 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들은 법문이나 여기서 닦은 마음을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 혹은 이웃들에게 그 향기를 전하고 또 가꾸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부처님 가르침대로 맑고 향기로운 그 행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는 코뿔소를 말합니다. 이 코뿔소는 얼마나 힘이 당찬지 사자도 피하고 코끼리도 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것입니다. 혼자서 가라는 것은 일념으로 가라는 거예요.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고 일념으로 가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일념으로 수행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마지막구절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수행 정진하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늘 마음을 가꾸고 다듬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수행집중하기가 제일 좋은 자리가 세군데 있습니다.

첫째는 새벽베개머리입니다. 일찍이 일어나면 하루가 깁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난 사람은 할 일이 많다고 그래요. 옛날 손금을 잘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손금을 보는데 손금이 늘 변하더라는 거예요. 통계적으로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길게 쓰는 사람의 손금이 늘 좋은 방향으로 바뀌더라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시간이 없어 경을 독송할 시간이 없다. 정려할 시간이 없다’ 하지마시고 30분이나 한 시간 일찍 일하시면 그것이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안에서 길상사에 올 때나 어디를 갈 때, 달리는 법당 속에서 일념으로 생각을 모으고 챙기고 그렇게 공부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 말씀대로 초발심을 잘 유지하고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화장실입니다. 화장실은 나 홀로 공간입니다. 거기에서 초발심을 유지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거예요. 탐, 진, 치 삼독을 다스리고 비우고 맑히며 또 나라는 고집이나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옛날부터 ‘삼상사’라 해서 새벽벼개머리, 차안에서, 화장실에서, 이런 공간에서도 늘 수행 정진하는 원력을 세워야 됩니다. 원력을 세우고 노력하고 복 짓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행복의 문이 열리고 깨달음을 향하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수행 정진하는 가운데 집에 가시면 좋은 사랑의 언어를 다섯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세 번째는 작은 선물이라도 서로 주고받아야 됩니다. 내가 늘 베푸는 마음으로 주기만 하면 상대방도 감사해서 언젠가 형편이 되면 선물할 때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도와주어야 됩니다. 봉사해주어야 됩니다. 다섯 번째는 축하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수를 들려드리고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합장하십시오)


‘매화가지위에 밝은 달이 걸렸는데 매화를 보고나니 달은 이미 간곳이 없네.’



-불기2552년 10월 29일 현묵스님(송광사유나스님)의 10월 초하루 법문/知愚정리-


출처 : 금강경 보급 연구회
글쓴이 : 향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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