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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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주 우학스님과 함께 하는 네팔 자비 성지순례(4박5일)-2/2010.10.25~10.29

보현화 2010. 11. 4. 23:19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네팔학교 설립 기공식 및 룸비니 성지순례

                                           (부제:회주 우학스님과 함께 하는 네팔 자비 성지순례 4박5일)


           ♣ 여행기간 : 불기 2554년/2010.10.25~10.29

           ♣ 여행일정 : 카트만두. 포카라. 라쪽마을 학교 기공식장. 룸비니동산. 보드너트사원.스와얌부너트사원

 

■ 네쨋날(2010.10.28)


-아침 6시 마야가든 호텔 출발./7시 넘어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하여 1시간 정도 참배.

양준호 가이드 ...여기가 땅 넓고 벼농사 많이 하는데 왜 못 사냐고 한다. 인도와 네팔이 사업과 취직 등 서로 교류하며 지금 가는 이 길로 인도물품이 오고 간다. 쌀농사가 2~4모작 되는데 쌀이 인도에 많이 넘어 간다. 씨 뿌리는대로 나오니까 나오면 나오는 대로 먹고 안 나오면 안 먹고..집착이 없어 현재 요모양으로 사는지 모르지만... 2끼 식사를 한다. 인도로 동서로 이어지는데 열차가 없다. 굴뚝산업(제조업)은 제재가 많다. 산업화는 기온상승을 초래하니 곧 히말라야 눈이 녹음을 뜻한다. 국가적으로도 발전의지가 없지만 유엔차원에서도 제재를 하고 있으니 네팔발전은 요원하다고 보면 된다. 이 나라는 포교가 불가능하다. 자기 종교강요는 불가이다. 신의 숫자가 3억인데 모든 생명체를 신으로 보며 파괴의 신도 있을 정도이다. 파괴도 탄생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교인이 네팔에서 선교했는데 네팔인이 집으로 가다가 부처님께 절하고 도중에 힌두교 사원에 또 절해서 기독교인이 놀랬다. 네팔인은 부처님,예수님,시바신..다 믿는다. 네팔인 삶이 종교이다. 저도 고민 중인데, 우리가 수도정진한다고 이 분들 삶만큼 묻어날(묻어질) 것인가 의문이다. 네팔에서 외국인은 땅을 소유할 수 없다...한국에서 직장 다니는 제 친구가 자기는 정년 등 자기 인생이 보이는데 너는 예측이 되지 않으니 부럽다고 제게 말을 한다. 여기 사람들은 좋은 직장, 결혼, 교육에 대한 개념이 없다. 저도 고지식하지만 여기 와서 이런 곳에 다른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친구나 지인들이 보기에 저를 ‘저 녀석 무언가 있어 보인다’는 소릴 듣고 있는 중이다. 산악부 활동하다가 정착하게 되었다. 가장 걱정은 애들 학비인데 인도 기숙사에 시험 되어서 보낸 상태이다. 여기는 군대 가지 않고 야채가 싸다. 눈높이를 낮추면 살기 좋은 곳이다. 이마의 빨간 칠(점)은 두 눈 외에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근거한 것이다. 경제 이전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삼성그룹이 사원 채용할때 스님께서 면접을 보신다고 알고 있다. 도(道)나 기(氣)..제가 그런 길을 가지는 않지만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해로 대표되는 시대가 2000년이 지났다. 이제 달의 시대이다. 해는 강자, 침략, 정복의 이미지라면 달은 반대의 개념이다. 앞으로는 역사로 남겨질 다른 시대가 온다.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는 집권자의 기록이다. 네팔의 비문명권을 보면서 새마을운동-발전을 생각한 분도 있겠지만 우리만의 생각일 수 있다.

 

 

 

 

 

-경산도량 인허 주지스님 소감...며칠 있으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만 바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할일도 많고 여기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하지만 수행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수행자일 듯. 길에 염소가 있지만 주인도 안 치워, 나라에서도 안 치워..여유가 있는 건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지...우리는 햇빛을 피하는데 여긴 햇빛을 피하지도 않는다. 집도 작고..무소유..나름대로 잘 살고 있을 듯 싶다. 날씨 영향도 크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4계절이 분명하여 열심히 안 살면 겨울에 춥고...환생 100% 믿으니까 병도 두려움도 없을 듯. 수명은 50세가 평균이라 한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 하지만, 도로도 좋고 하지만 하루에 교통사고로 얼마나 죽는지를 보라. 여긴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없고 자전거,차,오토바이 얽혀도 사고 없고..나름대로 룰이 있다. 우리가 60년대 보릿고개를 겪었어도 순수했는데 지금은 풍요롭지만 자살률이 높다. 진정한 삶이, 행복이 어떤건지..자연과 함께 사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우리 잣대로 보지 말고 이렇게도 잘 살수 있구나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8시 카필라바스투를 출발하여 9시경 룸비니동산에 도착

 

 

 

10시경 룸비니를 출발하여 마야가든 호텔로 돌아와 수제비로 아침공양 후 11시 20분경 카트만두 야크앤예티 호텔로 이동(8시간 소요예정)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개인소개가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소개를 몇 개 적어 본다.

신행지(경산12기)...보현화님이 추천해 주셔서 경산 1대 마야부인으로 제등행렬 하였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에서 보현화님이 ‘산고의 고통이 생각나지 않더냐? 하나 더 낳아야지~’ 하던 유머로 즐거웠다.

한마니화(서울동대문1기)...회주스님의 ‘저거는 맨 날 고기 먹고’ 라는 책을 보고 너무나 가슴 설레어 2개월 동안 그 책을 바라보기만 했다. 남편이 IMF 충격으로 힘들 때 처음으로 꺼내 읽었다. 이슬 같고 가을바람 같은 아름다운 법문들이 주옥 같았다. 저희 도량은 불사를 청정하게 하고 많은 불사를 하기 위해 대가람이 필요하다는 회주스님의 법문을 듣고 통장에 있던 예금 83만원 전액을 송금하였다. 멀리 경기도 고양에서 대구까지 5년 동안은 1개월에 두세 번 내려 갔고 이후 11년은 어쩌다 내려 갔다. 마음이 가는 곳에 보시가 가는 것이라 딴 절에 가지지가 않았다.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울쪽 여러 도량 다니면서 많이 울었다. 외롭고 힘든 길을 가야 하나..수없이 갈등하면서..그러면서 우리 절의 서원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 힘든 세월을 오래 보내다가 작년 부처님께서 제게 계약서를 주시는 꿈을 꾸었다. 동생 금강지에게 아무래도 서울도량이 개원되려나 보다 하니 금강지가 2~3년 있다 개원 한다던데?라고 해서 긴가민가 하다가 또 꿈을 꾸었다. 법당에 혼자 좌정하고 있는 제 모습이 보여서 또 금강지에게 오랜만에 홈페이지 들어가 봐야겠다고 했는데 서울도량 개원기사가 떴다. 아~이제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개원 때 음료수랑 사들고 갔고 지금까지 매일같이 절에 가고 있다. 동생과 함께 포교입학전단지 8000장을 돌렸다. 오늘 이 순례길 동생 금강지와 함께 와서 감사하고 서울도량이 생겨서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계속 부처님께 아낌없이 남김없이 살겠다.(한마니화님, 한금강지님 자매의 감격의 눈물이 차안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두 분의 우리절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애보. 순수한 열정과 애정,친절,관심으로 무장된 한마니화님께 다시 한 번 존경의 합장을 올린다. 아름다운 도반으로 오신 선지식이다. 

권우돈(큰절 종무실장)...한마니화님이 대구에 사시는 줄 알았다. 자주 내려 오셔서~~(웃음)

김해 문경임(심진력) 님...김해에서 초하루마다 큰절에 가고 있다.

부산 송영주 님...불교 TV를 통해 우학스님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불교인드라망에 가입하였고, 요즘은 큰절 철야기도에 참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다니는 걸 좋아한다. 혼자 잘 다니기에 한불대 신도는 아니지만 동참하였다. 부산에도 분원도량 만들어 주실 건가요?(웃음)

권우돈(큰절 종무실장)...해외분원처럼 부산.김해도 가정법회 식으로 시작하면 좋은 출발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부산, 김해에도 분원이 생길 수 있다.

성호석(법행.66기 기장)...각 도량마다 골고루 포교하였고 총 270명 포교하였다. 절에 오는 이유는 스님마인드와 공부이다.


-양준호 가이드...화장실엔 왼손, 식사 땐 오른손을 쓴다. 한국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상하로 흔들지만 여기서는 좌우로 흔든다. 산에 갈 때 짐 나르는 포터에게 가격흥정 하다가 고개를 흔들기에 200루피에서 300루피, 다시500루피로 올려 준 에피소드가 있다. 좋다는 뜻인 줄도 모르고~(웃음) 또한 자주 쓰는 말로, ‘노 프라브럼(no problem/문제 없다)’이 있다. 문제가 있어도 노프라브럼이다. 내일 우리가 경비행기를 타게 될 텐데 혹시 안개 등으로 비행기가 안 뜨면 어떡하나 걱정하면 그들이 하는 말이, ‘문제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그래서 문제 없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네팔인들은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오늘 인허스님과 함께 현지식(現地食)을 현지식(現地式)으로 식사해 보았다(손으로 밥먹기). 한국어르신들이 네팔 여행 오면 옛 생각이 나서 회한의 눈물을 많이 흘리신다. 우리나라가 발전했지만 가족,이웃간에 정이 많이 사라졌다. 개발은 신중해야 한다. 네팔인들이 고원지대에 사는 이유는 1930년대 역병이 세 번 돌아서 600만 명이 몰사한 역사가 있어서 역병을 피해 높이 올라가게 되었다. 1$는 70루피이고 1루피는 한국 돈 15원이다. 한 달 평균수입이 300$ 안 된다. 네팔은 2005년 왕이 하야하여 총리중심내각제이다. 저도 경제활동하지만 소수 1% 사람들이 사람을 부리며 노동력착취를 하는 걸 보게 된다. 땅도 많고 심지어 비행기도 있을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다. 네팔은 인도에서 소금.설탕.석유..등을 수입하고 있다. 개량된 사회주의인 중국이 네팔에 3년간 철도 깔아주기로 했는데 네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다소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외국에서 한국인이 단합이 안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고전환이 필요하다. 네팔은 알량미와 녹두를 주로 먹으며 우리나라 ‘두레’같은 ‘계’도 있다. 원시시대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이다. 직업은 농업이 주류이며 관광에 관계되는 사업을 많이 한다. 남자들은 일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놀고...1년에 한번 양귀비 마약을 공식적으로 먹는 날도 있다.


-오후 5시 20분 무글링 리조트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계속 이동/밤 10시40분경 야크앤예티 호텔 도착하여 빵과 쥬스로 역시 늦은 저녁식사/마지막 날 밤을 기념하자시며 보명화 보살님께서 와인과 맥주를 한턱 내셨다. 몇날 몇일 불편한 도로에 정체되는 도로사정으로 계속 차 안에서 보낸 시간들이 참 아쉽다. 식사를 비롯 모든 행사, 볼거리들이 주마간산격으로 지나 가 버렸으니 그 시간들을 제대로 향유할 겨를이 없다. 딴 건 몰라도 중요도로 정도만 ‘개발’ 되었으면 좋으련만. 내년이 네팔정부가 추진하는 ‘네팔방문의 해’라니 더욱 숙제가 된다.


■ 다섯째날(2010.10.29)


-아침 5시 기상. 5시 40분까지 로비 집합, 공항으로 가기 위해 6시에 호텔 출발.

-현지 가이드 히라씨...오늘 경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가까이 보게 되는데...히말라야를 어떻게 보는가. 꽃을 보느냐, 가시를 보느냐 관점인데 꽃과 가시는 한 나무에 있다. 히말라야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겠다. 각자 느끼는 바에 따라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다.

 

 


 

-27일, 너와난다 전망대에서 히말라야 일출을 기다리던 중 산맥으로 날아가는 경비행기를 보신 회주스님께서 우리도 한번 타 보자 하신 게 계기가 되어 카트만두 공항내 예티항공 비행기(경비행기 2대.44명/나머지 6명은 미리 스와얌부너트로 이동)로 일정엔 없었던 ‘마운틴 플라이팅’을 위한 경비행기를 처음 타게 되었다. 아침 6시 45분 탑승하여 40여분 비행에 우리돈 175,000원. 영화에서 계곡과 산을 가로질러 비행할 때의 속도감과 생생한 현장감일 것이라 상상하고 들떴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반비행기보다 조금 더 가까이 보인다는 정도일 뿐 창도 작고 흐려 보여 적잖이 실망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아마 좌우상하 비행이 상당히 자유로운 헬리콥터였나 보다. 아쉽다. 그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그런 나에 반대되는 감정의 몰입으로 눈물을 흘리는 분이 있었으니..대각성 보살님이셨다. 창밖의 햇살에 진주처럼 반짝이는 노보살님의 눈물은 내 가슴을 흔들었다.

 

 

 

 

-두 손을 합장한 그 모습은 바로 ‘어머니의 기도’였다. 이 하늘 아래의 모든 자식들과 인연들을 보듬는 측은지심과 자비의 눈물이셨다. 히말라야 산 경치를 찍다가 얼른 내 좌석으로 돌아온 나는 누가 볼 새라 얼른 눈가를 훔쳤다. 지금 이 시간 한국에 계시는 나의 늙은 어머니와 형제자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내 시야를 적셔 놓고 지나 간다. "저 아래 산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억겁, 백천만겁난조우의 인연들이 떠올랐다. 아롱다롱 아웅다웅 할 거 없는데.. 이 높은 곳에 오르니 한낱 미물같은 우리 존재, 이 하늘 아래 내 업장 모두 내려 놓아도 다 받아 줄 것 같아..."는 대각성 보살님의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히말라야 산을 내려 본다. 그래...저기에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고독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 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건 사랑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 진다는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그래야 사랑했다 할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 일지라도 한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 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매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오래오래 인상깊은 노래 가사이다. 그 표범같은 차가운 자존심이 느껴지는 시도 함께 생각났다.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 象村 / 申欽 (조선시대 문장가/1566~1628)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그래. 멀리 보기 위해서 높이 올랐지 않은가. 이 짧은 고공비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으니 나의 불찰이다. 회주스님의 화두처럼 우린 지금 산위에서 헤엄치는 눈뜬 물고기임인 것을-.

 

 

 


-8시30분 비행종료./9시. 전용차량으로 스와얌부너트 사원으로 이동하며 호텔에서 준비한 계란.빵.바나나가 든 도시락을 먹으며 10시 도착 후 귀국비행기 시간에 맞춰 30분간의 짧은 돌아보기를 마치고 10시30분에 사원을 떠나 11시에 서울아리랑식당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식사/11시 식당 출발, 카트만두 공항에 12시 도착./공항에서 산악인 엄홍길씨를 발견하고 함께 사진촬영/14시15분(한국시간 17시35분) 카트만두 공항 이륙/기내에서 한국시간으로 시계 조정과 ‘여행자(승무원)세관신고서’ 작성/네팔 가는 비행기는 맞바람을 맞기에 6시간30분 걸렸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뒷바람이므로 5시간 40분 소요/23시 10분 인천공항으로 귀국/공항에 도착하니 서울도량 주지스님 일행이 마중 나오셨다/12시에 모두 해산./서울도반을 제외한 신도들 대형차량에 탑승하여 대구 큰절로 새벽 4시경 돌아오다.


-자인화, 신행지 두 보살님의 부군들께서 새벽시간을 달려 우리 모두를 경산목적지까지 무사히 귀환시켜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무사히 소화하신 경산의 두 노보살님들의 노익장에 다시 놀라고 그 노보살님들을 함께 이번 여행에 동행하도록 배려, 수고하고 챙긴 자인화님의 마음도 아름다웠다. 나는 첫 해외여행이라 흥분, 사진 찍기에 몰두해서 나 혼자 움직이기도 바빴는데 말이다. 나의 짝지였던 자인화님은 그 외에도  한 좌석에 앉아 가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멀리서 막연히만 생각하다가 여행이라는 채널을 통해 그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반가운 인연이다. 함께 한 경산도량의 주지스님과 신행지님, 수월지님의 지인이 있어 더 친근했고 초면이지만 다양한 소재로 대화를 나눴던 여러 신도들과도 정들었던 동반여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로 스크린으로 뵙기만 하던 막연한 이미지속의 주인공이셨던 회주 우학스님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체감했던 수행자의 기운, 그 에너지의 파장은 깊고 오랠 감동으로 남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좋을 사람도 있고, 멀리서 보면 좋을 사람도 있는데 회주스님은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같은 파동으로 전해져 오는 에너지였다.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는 내가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첫발을 디딘 첫 순정? 절이어서 영원히 함께 할 절이기도 하지만 깊고 다양한 가르침으로 청정불사를 하실 큰 스승이 계시기에 미쁘게 그 제자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임을 이번 순례길에서 다시 확인 하였다. 연고가 없음에도 신심으로, 불연의 인연으로 합류한 우리절 신도 외의 동행인들이 그 작은 증인들임에랴-.


시간과 공간을 바꿔 다른 장소, 다른 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은 소중한 삶을 버무리는 양념이다. 네팔인들의 갈색피부, 검은 눈동자에 담긴 태고의 순수가 영원히 보존되길 기도 드린다.

NGO활동으로 접목된 불교, 그 중에서도 한국불교대학의 구호사업과 법보시는 순수에 내리는 열정이요, 지혜로 남게 될 것이다. 하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교육으로 인해 더 풍부해질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며 ‘뭇 존재의 행복, 온 세계의 평화! 그것을 위해서 내 마음을 열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우리의 기도를 그들에게 선물로 안겨 드린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무사히 돌아온 인연들을 기꺼워 합니다. 큰 스승님을 모시고 함께 한 만행의 시간을 감읍 드립니다...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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