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불교&자료&관심사●/법륜스님·법문 外

강아지가 죽어서 너무 슬퍼요/금요 즉문즉설:2021.5.21

보현화 2021. 6. 14. 00:40

강아지가 죽어서 너무 슬퍼요

 

“저는 혼자 사는 독신 여성입니다. 15년간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냈던 강아지를 얼마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노환인 강아지를 조급한 마음에 입원시켰는데, 케이지 안에서 돌연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런 보살핌도 주지 못했는데 케이지 안에서 혼자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보낸 강아지가 밤낮으로 떠올라 너무 괴롭습니다. 그 강아지가 있어서 저는 행복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죄책감으로 너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질문자는 최선을 다해서 효도했습니까?”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육십이라는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때 서른 살이었고요. 아버지는 고향에 계셨고 저는 대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서 효도를 못 했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한테 효도 못 한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안 들고, 강아지를 돌봐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든다는 거잖아요. 왜 그럴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시간이 좀 지났고, 아버지는 저보다 윗사람이니까 아버지가 저를 보살펴줘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와 달리 강아지는 저보다 약한 존재이니까 아무래도 제가 더 많이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게 두 가지네요.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가슴이 아팠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해결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강아지가 죽은 것도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된다는 겁니다. 둘째,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고, 강아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죄책감이 든다는 겁니다. 또 아버지에게 나는 보살핌을 받았을 뿐이지 내가 아버지를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고, 강아지는 내가 보살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든다는 겁니다. 질문자는 결혼을 안 해서 부모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는데, 만약 질문자가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이 아플까요? 안 아플까요?”

“아프실 것 같아요.”

“부모의 가슴이 엄청나게 아픕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이런 말이 있어요. 옛날부터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부모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경우에는 자식이 부모보다 오래 살 확률이 높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확률은 낮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수명이 100년 가까이 되고, 강아지는 수명이 길어야 2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사람이 강아지를 키우면, 강아지가 먼저 죽을까요? 사람이 먼저 죽을까요?”

“강아지가 먼저 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식이 나보다 당연히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이 돌연사로 죽으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사람보다 수명이 짧아요. 그래서 강아지를 키울 때는 언제가 되든 강아지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이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해요.

첫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은 나의 잘잘못 여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아지든 고양이든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내가 보살핀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강아지가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괴로운 게 아니에요.

둘째, 이런 아픔은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망각 작용으로 인해 조금씩 집착이 얕아지면서 저절로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강아지는 케이지라는 좁은 방에서 수액 맞고 스트레스받다가 죽게 된 거예요. 차라리 내 옆에서 엎드려 있는 것이 훨씬 나았을 텐데, 잘해주려고 했던 판단이 결국 어리석은 판단이었다는 후회가 됩니다. 또한 좋은 병원이라고 해서 데리고 갔는데 수의사들은 검사하고 난 뒤 데이터만 보고, 강아지의 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라고요. ‘강아지가 굉장히 불편해 보인다’라고 제가 여러 번 말했는데도 수의사들은 강아지가 스트레스받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다른 검사도 해보자’ 이런 식으로만 대처를 했습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도 지금까지는 정신적인 병에 대해 별로 신경 안 쓰고 육체적인 병만 치료했잖아요. 사람의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는 길어야 백 년밖에 안 되고, 특히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는 아직 오십 년도 안 됩니다. 그러니 강아지의 심리를 연구하거나 강아지가 스트레스받는 것까지 연구한 수의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수의사는 학교 교육에서 조차 강아지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고, 연구한 적도 없는데, 그것을 수의사한테 요구하면 어떡해요?”

“결국에는 강아지를 입원시킨 제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아지를 입원시킨 것만 잘못했을까요? 강아지 입장에서 보면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좋을까요? 사람으로부터 성대 잘리고 생식기 잘리고 꼬리 잘리면서 사는 게 좋을까요?”

“자연 속에서 맘대로 사는 게 좋습니다.”

“질문자는 강아지를 데려올 때 나를 위해서 데려왔어요? 강아지를 위해서 데려왔어요?”

“저를 위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위해서 강아지를 고생시킨 겁니다. 병원에 데려간 것도 강아지가 원한 게 아니었잖아요. 단지 자기를 위해서 병원에 데려갔을 뿐이에요.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간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면, 강아지를 집에 데려다 키운 건 백 배 천 배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강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천 배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조금 잘못한 것을 갖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강아지를 위해서 병원에 데려간다고 생각하지만,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강아지가 요구한 적이 없어요. 강아지가 때때옷을 입혀달라는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비싼 개밥을 달라고 요구를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가 외로우니까 강아지를 키우는 거잖아요.

깊이 분석해 보면 사람들의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인해서 애완견이나 애완묘가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외로워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이기주의라는 걸 알아야 해요.

죽은 강아지를 위해서 지금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착각이에요. 내가 외로워서 강아지가 필요하다면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그 강아지는 잊어버리고, 또 한 마리 데려다 키워야겠다’ 하고 새로운 강아지를 데려와서 키우면 됩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워도 그 강아지 역시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예요. 그러면 지금과 같은 괴로움이 똑같이 반복되겠죠.

‘내가 내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강아지를 지금까지 키웠는데, 강아지 입장에서는 해가 되는 줄 모르고 내 생각만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앞으로는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외로우면 강아지를 키울 게 아니라 사람을 새로 만나서 같이 살면 됩니다.

부처님은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말라 하셨어요. 내가 보기에 개가 죽은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그 강아지는 수명이 다 되어서 죽은 겁니다. 가볍게 보내주고, 또 강아지가 필요하면 새로 데려와서 정성스럽게 키우면 됩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 강아지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죽어서 슬프다’, ‘아들이 죽어서 슬프다’ 이런 괴로움도 다 집착에서 생긴 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집착이 점점 옅어져서 결국에는 좋아져요. 시간이 흘렀는데도 계속 더 괴롭고 슬프다면 그건 정신질환에 속합니다. 집착했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좋아지는데, 그렇지 않고 슬픔이 계속 유지되거나 더욱더 심해진다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해요. 만약 1년이나 2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강아지에 대한 슬픔이 조금 나아질까요? 그대로일까요?”

“나아질 것 같아요.”

“1년 지나고 나니 슬픔이 나아졌다면 강아지가 살아 돌아와서 내가 나아졌을까요? 강아지는 죽은 상태로 있는데 내가 나아진 것일까요?”

“강아지는 죽은 상태로 있지만 제가 나아진 겁니다.”

“그러면 1년간 괴로워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죠.”

“1년간 괴로워하다가 나아져야지 지금 나아지면 강아지한테 미안하잖아요.”

“조금 미안하긴 하죠.”

“그런데 1년간 괴로워하다 나아진다고 해서 강아지한테 도움이 될까요? 내가 1년간 괴로워하면 강아지가 천국에 간다든지 강아지가 살아 돌아온다든지 그렇게 될까요?”

“그건 아니죠.”

“강아지한테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1년간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럼 괴로워하면 돼요. 괴로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괴로워하는 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집착이 너무 강해서 생긴 정신질환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집착이 있기 때문에 애완동물이 죽으면 슬픕니다. 그 동물이 고양이든 개든 쥐든 뱀이든 상관없이 슬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뱀을 키우다 죽었다고 질문자처럼 울면 질문자는 어떨 것 같아요?”

“이상할 것 같습니다.”

“쥐를 키우다 죽었다고 슬피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쥐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은 흰쥐를 실험용 쥐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반대해요. 애견인들도 개고기 먹는 것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것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것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이것은 집착에서 오는 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한참 괴로워하다 나아지고, 정신질환자는 계속 괴로워하고, 지혜로운 자는 지금 바로 좋아지는 거예요. 지금 내가 괴로워하는 것이 죽은 강아지한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힌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질문자의 잘못을 굳이 따진다면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간 게 잘못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아지를 집에 데려와서 키운 게 잘못이에요. 이제 조금 정신이 차려집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섭섭하면 좀 더 울다가 좋아지세요. 자기가 좋아서 울겠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웃음)

“아니요. 지금 바로 좋아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