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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는 사랑을 할 수 없는가

보현화 2012. 9. 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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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03월17일 제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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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는 사랑을 할 수 없는가

대처를 왜색으로 몰던 시대에 수행자에게 결혼을 허하자고 주장한 만해
무욕의 화신 료칸과 데이신의 아름다운 만남은 하나의 ‘깨침’으로 다가와

“왜색 승려를 사찰에서 물러나게 해라!”

1954년 5월21일, 이승만의 불과 같은 호령이었다. 불교 교단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됐어야 할 일에 국가 권력이 간섭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이미 피투성이가 된 불교계로서는 불행이었다. 400여 명의 비구승이 7천여 명의 대처승을 내쫓느라 ‘세불리기’ 차원에서 승려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까지 승려로 받아주었고 끝이 안 보이는 ‘절 빼앗기’는 승가의 풍토를 황폐화시켰다.

대처는 일본불교 근대화의 소산이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이승만도, 공권력의 지지에 의기양양했던 비구 쪽도 한 가지 생각해봤어야 하는 게 있다. 과연 대처는 ‘왜색’일 뿐인가? 일본 불교의 본래적 특징이 대처라고 생각한 것부터 오해다.


△ 1954년 5월21일 “대처승은 절을 떠나라”는 이승만의 교시가 내려졌다. ‘불교정화운동’에 따라 비구승와 대처승의 싸움이 벌어졌다. 절 경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대처승.

12세기 이전까지 일본 불교는 수행자들의 결혼생활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는 정토종 승려만이 공개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일본에서는 여성과 동침한 승려를 형사처벌할 수 있었지만 1872년 3월부터 정권은 개신교의 대처 목사를 의식한 듯, 승려에게도 대처를 허락했다. 즉, 대처란 ‘왜색’ 자체라기보다는 일본 불교 근대화 과정에 생긴 일이었다. 그렇게 대처가 ‘근대적인 것’으로 인식됐기에 만해 한용운(1879~1944)과 같은 항일 불교 근대주의자들도 대처를 주장했다.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다. 억제할수록 더욱 심해질 뿐이고 오직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지만 않으면 군자다. 그 욕망을 억지로 억누른다면 은근한 음행을 범하게 돼 풍속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다. 불교를 아내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 영웅이 있다면 그를 존경하지만, 평범한 이의 수준에 맞추자면 관세음보살이 미인으로 몸을 나타내 음탕한 사나이를 제도했다는 고사대로 하나의 방편으로 수행자에게 결혼을 허해야 한다.”(<조선불교유신론>, 1913)

한용운은 개신교 목사의 사례도 참고했겠지만 무엇보다 불교의 원리에 호소했다.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 욕망을 칼로 자르듯이 억제할 수 없으므로 있는 대로 긍정하면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뜻일 것이다. 불교가 중생 구제의 종교라면 중생의 태생적인 욕망도 형식주의보다는 부드러운 개체주의와 상황주의로 대해야 하지 않는가? 근대 일본 불교에서도 결혼은 의무가 아닌 ‘자유’였으며 한용운도 결혼에 대해 승려들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점검해 자유롭게 결정할 것을 주장했다.

계급사회의 종교는 애당초 여성을 ‘더러운 존재’로 규정해 타자화한 패권적 남성에게 독점돼서 그런지 대개 ‘궁극의 진리’는 음욕을 초월한 것으로 인식돼왔다. 예수를 ‘무염시태’(無染始胎·원죄 없는 잉태)되어 평생 성생활을 하지 않은 존재로 그린 기독교도, 음욕 등의 욕망을 고통의 원인으로 본 불교도 성욕을 죄악시하거나 경계했다. 그런데 동료(남성) 수행자들에게 “여성에 대한 탐욕이 생기면 그 여성을 걸어다니는 시체로 상상해보라”고 권고하고, 수행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일을 “마왕이 보낸 미인이 유혹한 것”으로 묘사했던 붓다와 제자들의 상당수는 이미 성생활을 상당 기간 경험해본 기혼자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음욕을 초월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음욕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정반합(正反合)의 법칙대로라면 음욕의 초월은 ‘정’으로서의 음욕의 수용을 전제로 할 것이다. 욕망이란 텅 비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욕망의 극복보다 세상의 실체인 공(空)에 대한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자비를 더 강조한 대승불교에서는 남녀 간의 정(情)에 대한 이해는 한층 복합화됐다.


△ 승려의 금욕주의는 절대적인 것일까? 한용운(왼쪽)은 불교의 원리에 호소하며 욕망을 긍정했고, 일본의 거지 성자 다이구 료칸은 말년에 일반 욕망과는 다른 사랑을 나누었다. 료칸의 마을미술관 앞의 료칸 좌상(오른쪽).

일본 정토종 이외의 동아시아의 어떤 대승 교단도 19세기 중반까지 대처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성욕을 초월해 서로의 보살핌, 존경과 이해에 기반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수행의 장애’로만 보지 않았던 것이다. 비구 쪽이 대처 쪽을 무조건 비난했던 1963년에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시인 조지훈(1920~68)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대처승에 대한 지나친 배척을 반대하면서 <삼국유사>의 광덕 이야기를 논거로 들었다.

노힐부득이 더 먼저 성불한 이유

잘 알려진 대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발 만들기를 업으로 삼았던 하급 승려(또는 사찰 수공업자)인 광덕이 역시 승려인 아내와 함께 경주의 분황사(또는 그 근처의 마을)에서 살았는데 밤마다 섹스 대신 함께 염불에 매진했단다. 결혼생활을 서로에 대한 보살핌과 챙김, 정신생활 공유로 삼은 7세기의 이 두 천민 승려를 신라인들이 얼마나 존경했던지 광덕의 부인을 관세음보살의 환신으로까지 불렀다. 미인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계율에 대한 왜곡된 집착이 아닌 중생에 대한 자비만이 성불로의 길임을 남성 수행자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여러 전설의 공통된 테마다.

또 한 설화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밤에 어여쁜 낭자로 나타나 묵고 목욕까지 시켜주기를 청했는데 이를 무심으로 도와준 노힐부득이란 수행자가, 이 여성이 자신을 유혹한다며 쫓아낸 달달박박이라는 동료보다 더 먼저 미륵보살로 성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보살핌에 기반하는 이성과의 관계가 수행자에게 허용되고 그 이성에게 성적 욕구가 있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욕구을 충족하는 것이 오히려 ‘자비’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부설거사의 설화를 보면 그러한 경우가 나온다.

전북 부안군 월명암 소장의 <부설전>에 의하면, 부설이라는 신라 승려가 그와 결혼을 안 하면 죽겠다는 한 여인의 간청을 받아들여 환속해 거사가 되어 남녀를 낳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수행을 해온 그의 도력은 비구 생활을 해온 다른 동료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는 것이다. 만약 상황상 성생활이 더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면 이를 받아들여 ‘마음 안의 수련’과 ‘몸의 생활’을 어우르는 것도 수행의 방법일 수 있다. 만해가 했던 말은 결국 그 이야기가 아닌가?

‘승려와 사랑’ 이야기나 나올 때 어김없이 필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일본의 거지 성자 다이구 료칸(1758~1831) 스님이다. 무욕 생활의 화신이었던 그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떠돌이 걸식 생활로 일관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견지했다. “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식량 다섯 줌 정도이다”라는 말로 알려진 그는 평생 명성을 기피하면서 살았으며 가장 즐겨했던 일은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연을 날리거나 숨바꼭질하는 것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시절에 그는 그의 제자이자 역시 시인으로서 자질이 뛰어났던 데이신(1798~1872) 비구니와 ‘정신적 사랑’에 빠져 시를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순박하면서도 거짓 한 점 없는 이들의 시를 읽어보면 사랑이란 욕망이면서도 일반 욕망과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속인이건 승려건 도만 깨친다면…

“내가 본 것이 정말 그대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은 꿈일 뿐인가?”(데이신)

“나를 잊었던가 아니면 길을 잃었던가? 하루 종일 그대를 기다려도 그대는 오지 않는구려.”(료칸)

료칸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 데이신은 그에게 마지막 시구를 써주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별의 슬픔을 어찌 참겠는가?”

“내가 남긴 유물은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 가을이면 단풍잎일세.”

료칸이 남긴 데이신과 우주에 대한 마지막 사랑 고백이었다.

필자는 속인의 몸이고 물론 승려 사회의 계율을 당연히 존중해 마지않는다. 수행자들의 사회가 일정한 규율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논리다. 그러나 한 사람이 속인이건 승려이건 그가 죽을 때에 꽃과 두견과 단풍잎만을 남기고 죽을 수 있다면 그에게 음욕이 있고 없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깨침은 원칙주의나 형식적인 억제를 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다. 어쩌면 꿈속에서 꿈을 좇느라 아등바등 살다 끝날지 모를 우리 삶에 료칸과 데이신의 정신적 사랑은 하나의 깨침일 수 있지 않은가?

 

참고 문헌:

일연 지음, 이민수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1983

김광식, 조지훈, 이청담의 불교계 ‘분규’ 논쟁, <근현대 불교의 재조명>, 민족사, 2000

김광식, <우리가 살아온 한국 불교 백년>, 민족사, 2000

김영태, ‘부설전의 원본과 그 작자에 대하여’, <한국 불교학>, 제1집, 1975

최성현, <다섯 줌의 쌀>, 나무심는사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