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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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무 큰스님/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 “용성이 나를 버려놨듯이 시대가 법륜이를 버려놨지요”

보현화 2013. 6. 25. 22:22

 

2011/12/2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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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무 큰스님/낮은 자리서 대중 이끄는 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

“용성이 나를 버려놨듯이 시대가 법륜이를 버려놨지요”


 

서울 조계사에서 법문을 마치고 나오는 도문 스님을 종무소 2층 강사 대기실에서 만났다. 익히 듣기는 했지만 절을 올리려고 하는데, 스님이 먼저 방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스님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 한 자락을 살포시 보여주었다.

스님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죽림정사에 주석 중이다. 백두대간 한복판인 장안산(1237m) 자락에 자리 잡은 죽림정사는 한국 근대불교의 고승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백용성(1864∼1940) 스님의 생가가 있던 곳.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의 법손(法孫)으로, 법맥을 잇기 위해 파밭으로 방치돼 있던 용성스님의 생가터를 복원하고 그곳에 죽림정사를 지은 것이다. 30여년 각고 끝에 후학들과 국가보훈처, 전북 장수군 등의 지원에 힘입어 오늘의 여법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도문 스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생가터 복원 후일담을 꺼냈다.


#죽림정사, 애국혼 담긴 민족교육기관


조선 말 전라감사이자 당대 풍수지리 대가인 이서구(1754∼1825)가 초두순시를 나와 전북 장수군 장안산 자락인 죽림촌 뒷산을 바라보며 “100년 이내에 이곳에 대도인이 출현해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에 나라를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번암면은 남원군에 속해 이 사연은 ‘장수군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번암면지’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잠시, 백용성의 면모를 살펴보자. 스님은 구한말인 1864년 전북 남원군 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심신연마에 힘썼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정화에 주력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를 촉진하기 위해 저술활동에 진력했다. 용성 스님은 생애에 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고, 선농일치의 조사선을 실천한 대선사였다.

도문 스님이 죽림정사를 세운 뜻은 이러한 용성 스님의 애국사상을 선양하고 꽃피우기 위해서다. 그래서 사찰 안에는 (사)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상두)도 들어서 있다. 죽림정사는 용성 스님의 애국혼이 담긴 민족교육기관이기도 해 벌써 도내 청소년들의 견학과 수학여행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은사 스님을 통해 알게 된 용성 스님의 유훈이 어찌나 장대하고 멋있는지 일평생 유훈만을 받들며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용성 스님이 생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사업, 경전 100만권 번역과 배포, 100만 명에게 불교의 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사찰을 건립할 것 등 10가지였다. 이러한 유훈사업은 동헌 스님에게서 상좌인 도문 스님에게까지 이어졌고, 도문 스님은 1961년부터 만사 제쳐두고 유훈사업에 뛰어들었다.

유훈 받들기 어언 48년. 그는 가야의 불교전래지 경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선당지 부지를 확보했다.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 등 보물 2점까지 건지는 개가를 올렸다. 또 백제 불교전래지인 서울 서초구 우면산에 대성사를 건립했고, 신라 불교전래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에 사찰 아도모례원 등을 지어 성역화했다. 붓다의 탄생지 네팔 룸비니에 대성석가사를 착공해 완공단계에 있고, 성도지인 인도 보드가야에 대각정사 부지를 확보 중에 있다. 총건평 1935평, 374개의 기둥, 42m 높이로 지어진 룸비니 대성석가사는 도문 스님의 상좌 법신 스님이 불사를 맡아 네팔 최대 불교 사찰로 그 웅자를 드러내고 있다.

알고 보니 도문 스님의 부친도 애국지사다. 부친이 일경에 체포돼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용성 스님이 유발상좌인 부친을 만나기 위해 12차례나 면회 왔다. 당시 6살이었던 소년 도문도 용성 스님을 한 번 뵌 적이 있건만, 기억은 전혀 못한다. 도문 스님은 부친 임철호 지사 때문에 받는 독립유공자 보상금을 매월 이웃돕기에 내놓고 있다.

“동헌 스님은 용성 스님 이야기만 꺼내면 눈물부터 흘리다가 나중에는 엉엉 우셨지요. 일제시대 독립운동 하다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럴까 싶어요.”

‘인류와 민족문제의 해결’이 용성의 결구였다면, 이를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것은 동헌의 추진력이었다. 학자였던 동헌 스님은 스승이 하는 독립운동을 물밑에서 전광석화같이 뒷받침하며 수완을 발휘했다. 동헌 스님은 90평생 운수납자의 삶을 실천하다가 갔다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스님될 운명


도문 스님은 스승이 못다 한 유훈사업을 위해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승의 유훈 사업이 너무 힘들어 자기 대에서 끝내려고 한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고, 상좌들에게는 그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도문 스님의 상좌 중에는 교수, 군법사, 선방수좌, 사회운동가 등 별의별 직종의 수행자들이 다 나왔다. 그러나 개중에는 대성석가사 주지 법신 스님처럼 스승의 유훈사업이 제 것인 양 사찰건립에 젊음을 다 바치는 상좌도 있어 마음 한쪽이 무겁다.

“법륜(죽림정사 주지 겸 정토회 지도법사)도 스스로 유훈을 받든다고 생각하고 이게,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닙니다. 수행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는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멘토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법륜 스님은 일찍이 막사이사이상과 만해상을 수상한 사회운동가로, 경주고를 다니다 출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도문 스님이 대학을 가라고 하면, 어디서 대학 교재를 구해 와서 모두 독파해 버린 뒤, “대학 공부가 시시합니다. 차라리 은사 스님에게 배우는 ‘도문 대학’을 나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법륜 스님은 영남지역 불교학생회를 이끌면서 수재들만 끌어들여 학생회를 운영했다. 그런 법륜이 공부는 안 하고 ‘평화재단’이니 ‘좋은벗들’이니 사회단체를 만들어 분주히 쏘다니니, 도문 스님은 속이 상하는 것이다. 도문 스님은 제자를 죽림정사에 주지로 앉혀놓으면 조용할 줄 알았는데, 사회 불의와 주변의 불쌍한 꼴을 못 보는 법륜 스님은 잘 붙어있지 않는 모양이다.

“용성이 나를 버려놨듯이 시대가 법륜이를 버려놨지요. 법륜이는 조계종 승적도 없어요. 참 안됐어요. 딱한 노릇입니다.”

상좌 학담은 또 어떤가.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는 도문 스님이 서울대 불교학생회를 지도하며 ‘즉문즉설’로 학생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자 불교에 매료됐다. 법보다 더 큰 인생 공부가 있다는 사실에 눈뜬 것이다. 그는 법관이 되려는 꿈도 접고, 도문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학담 스님은 조계종 종회의원이자 서울 종로 대승사 주지 소임을 맡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그는 미주지역 대상으로 국제포교에도 여념이 없다.


#“산승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늘 下心으로 일관


“부처님의 제자라면 응당 악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선행과 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심(心) 청정에 이를 수 있지요.”

도문 스님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한 수행생활 3대 지침을 오롯이 실천해 왔다. 예컨대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지악수선(止惡修善), 낳고 죽는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미혹을 굴려 깨달음을 여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생활이 그것이다. 그는 수행자라면, 여기에 철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무지 잠이 없는 도문 스님은 2시 30분이면 새벽예불을 올린다. 좌선하는 시간이 많아 골반은 틀어져 있다.

“용성 스님은 저의 부친에게 제가 12살이 되면 출가시켜 동헌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가르침을 받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전에 스님이 될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용성 조사의 제자인 동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문 스님은 이미 12살 때 백양사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정진해 근현대의 대선사 만암 스님을 탄복시켰다. 스님은 세수 81세인 지금도 전국을 누비며 법(진리)을 전하는 일에 힘쓴다. 스님은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었는가?”라고 물으면, “산승은 불회(山僧不會)”라고 답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중’ 이라는 뜻의 지극히 자신을 낮춘 말이다. 그의 회상에는 위아래가 없다. “누가 먼저 성불을 할지 모른다”며 누굴 만나도 스님이 깍듯이 대하기 때문이다.

“‘심처존불 이사불공(心處存佛 理事佛供)이라,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마음으로 극진히 해야 합니다.”

도문 스님은 이야기 대부분을 은사와 제자 이야기에 할애했지만, 그 속에 자신의 사상을 확연히 드러냈다. 용성 회상의 큰 나무로 우뚝 선 도문 스님. 늘 낮은 자리에서 맡은 일에 철두철미한 그의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롭다. <글·사진=정성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