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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孤竹 최경창의 시 두편

보현화 2018. 6. 8. 20:54

1)홍랑의 이별 시 to 고죽

 

 折楊柳寄與千里(절양유기여천리) :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 :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 행여 밤비에 새잎이라도 나면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2)고죽의 시  to 홍랑

 

(1) 증별(贈別)

  玉頰雙啼出鳳城(옥협상제출봉성) : 고운 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리정) : 새벽 꾀꼬리가 이별의 슬픔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나삼보마정관외) : 비단옷에 천리마로 나루 건너니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조송독행) : 풀잎은 아득하니 날 떠나보내누나

 

 ( 2) 송별(送別)

  相看脉脉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랴

  莫唱咸關驀時曲(막창함관맥시곡) :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 하리.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지금은 궂은비 내려 청산이 어두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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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최경창을 만난 것은 최경창이 선조6년(1573년) 가을 북도평사(北道評事) (주1)로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가 있을 때였다. 경성에서 머잖은 또 하나의 변방 홍원(洪原)의 관기였던 홍랑은 최경창의 부임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최경창은 그 무렵 이미 삼당시인(三唐詩人) (주2)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홍원군수가 홍랑을 지목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노래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

  옆에 있던 최경창이 물었다.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고죽(孤竹) 선생님의 시를 좋아합니다.”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

 

  최경창의 호(號)가 고죽이었다. 이 첫 만남 이후 최경창은 경성의 거소로 아예 그녀를 데리고 갔다. 불꽃같은 사랑이었다. 그 해 서른다섯, 피끓는 연배였던 최경창의 변방 근무에 그녀는 위안이었고 기쁨이었다. 홍랑의 나이는 얼마쯤 되었을까? 분명하지만 않지만 아마 최경창보다는 훨씬 어렸으리라.

 

  그러나 둘의 만남은 짧았다. 이듬해 봄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홍랑은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까지 따라갔다가 거기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홍랑과 헤어진 최경창이 함관령(咸關嶺) 아래 한 주막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홍랑이 보낸 서찰 한 장을 받는다. 따로 이름이 없어 흔히 ‘묏버들가(歌)’로 알려진, 최경창이 후일 ‘함관의 노래’라고 명명한 이 시조는 그녀의 서신에 담겨 있는 절창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선조8년(1575년) 최경창이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였다. 소식을 들은 홍랑은 그날로 집을 떠나 7만에 서울에 도착, 지성으로 병을 간호했다. 그때는 '양계(兩界)의 금(禁)‘이라고 하여 서북(평안도와 함경도)인의 서울 출입을 금했던 때인 데다 명종비(明宗妃) 인순왕후 심씨(沈氏)의 국상이 막 끝난지라 이 일은 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끝내는 대간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선조9년(1576년 5월) 사헌부에서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일로 최경창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서 파직이 되고 말았으며 홍랑은 서울 생활을 서둘러 정리, 경성(鏡城)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또 다시 두 사람 앞에는 기약없는 이별이 놓였다. 천리 먼 길, 북관(北關)으로 떠나는 홍랑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돌아보고 돌아보며 차마 걸음을 옮겨 놓지 못하는 정인(情人)을 위하여 최경창이 지은 송별시(送別詩)가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증별(贈別)

  玉頰雙啼出鳳城(옥협상제출봉성) : 고운 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리정) : 새벽 꾀꼬리가 이별의 슬픔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나삼보마정관외) : 비단옷에 천리마로 나루 건너니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조송독행) : 풀잎은 아득하니 날 떠나보내누나

 

  2) 송별(送別)

  相看脉脉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랴

  莫唱咸關驀時曲(막창함관맥시곡) :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 하리.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지금은 궂은비 내려 청산이 어두워라.

 

  뛰어난 시재(詩才)에도 불구하고 최경창의 일생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중종34년(1539년)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선조1년(1568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은 정언, 북도평사, 영암군수 등 미관말직에 불과했다. 종3품의 종성부사가 그가 이른 최고의 벼슬이었다. 이때에도 대간들의 반대가 심했으며 이후 종5품 직간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성격이 대쪽 같아 타협을 몰랐던 그의 처세는 번번이 정적을 만들었으며 기생(홍랑을 이름)을 데려다 첩으로 삼은 일도 세인의 비난에 빌미가 되었다. 시절은 막 사색당쟁이 시작되던 때였다. 최경창은 그의 주변에 서인들이 많아 때때로 그들에 의해 비호를 받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논쟁에 휘말리고 탄핵의 대상이 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는 참으로 호방한 성품이었다. 그가 영암군수로 있던 시절의 일화. 어느 날 최경창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허균(許筠)의 스승인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12)의 시를 받았다.

 

  商胡賣錦江南市 (상호매금강남시) : 중국 상인이 강남의 저자에서 비단을 팔고 있네

  朝日照之生紫煙 (조일조지생자연) : 아침해가 비추자 자줏빛 노을이 피어나는구나

  美人欲取爲裙帶 (미인욕취위군대) : 미인이 가져다가 치마끈을 만들고 싶다는데

  手探囊中無直錢 (수탐낭중무치전) : 주머니를 뒤져봐도 치를 돈이 없구나

 

  마침 최경창이 있던 영암을 찾은 이달이 예쁜 관기 하나에 반해 자줏빛 비단을 사 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던 것이다. 시를 받은 최경창의 대답이 걸작이다. “손곡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그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글자에 비단 세 필씩 값을 쳐서 이달에게 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허균의 시화집 『학산초담(鶴山樵談)』에 이 일화가 실려 있다. 이 돈으로 이달은 좋아하는 기생을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고, 아마 몇 달은 한껏 풍류을 즐겼을 것이다.

 

  쫓기다시피 서울을 떠난 홍랑은 이후 다시 최경창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행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날이 하마나 올까, 기약없는 세월을 참고 견디던 그녀를 찾아온 것은 최경창의 부음이었다. 선조16년(1583년) 최경창은 방어사(防禦使 )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객사였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밤을 낮 삼아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파주를 찾았다. 파주는 아무 연고도 없는 객지이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길고 험난한 시묘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몸을 씻거나 단장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운 얼굴에 자상(刺傷)을 내어 일부러 흉터를 만들었다.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삼년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홍랑은 최경창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연인의 무덤 곁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그녀는 최경창의 유묵(遺墨)을 챙겨서 다시 함경도로 향했다.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그것들을 지켜내야 했던 것이다.

 

  홍랑이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것은 선조32년(1599년), 참혹한 왜란이 끝난 이듬해였다. 앞뒤로 무려 7년에 이르는 전무후무한 전란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주옥같은 시작(詩作)들이 전해져 오는 것은 오로지 홍랑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의 산물이다. 그녀의 태어남이 그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또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최경창의 묘역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홍랑이 죽자 이제는 해주최씨 문중에서 그녀를 시신을 거두었다. 문중에서는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임씨(善山林氏)의 합장묘 바로 아래 묘소를 마련,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고 새겨 묘비를 세웠다.

 

 

  다음은 그녀의 묘비명.

 

  <홍랑(洪娘)은 선묘(宣廟) 관북인(關北人)으로 기적(妓籍)에 올라 행적(行蹟) 밝혀 전(傳)하는 바 없으나 출상(出象)한 재화(才華)로써 선조(先祖) 고죽최공(孤竹崔公) 휘(諱) 경창(慶昌)의 풍류반려(風流伴侶)로 기록(記錄)되여 있고 그의 절창(絶唱)인 시조(時調) 1수(首)가 오직 청아(淸雅)와 정숙(貞淑)을 담아 주옥(珠玉)으로 전(傳)할 따름이라 공이 북평사(北評事) 퇴임(退任)하실 제 낭(娘)이 석별(惜別)하여 바친 글월을 한역(漢譯)하여 번방곡(翻方曲)을 읊으시니 격조(格調) 높은 쌍벽(雙璧)으로 세전(世傳)하여 홍랑(洪娘)의 문명(文名) 시사(詩史)에 빛나니라

…(중략)…

고죽공(孤竹公) 관복(關北)에 유(留)하실 새 낭(娘)은 막하(幕下)에서 조석(朝夕)으로 모시었고 환경(還京) 3년(年) 후(後) 요환(療患)하신다는 전언(傳言) 듯고 ○界(이 한자를 모르겠으니 나의 학문의 짧음이여! - 필자 주)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 7일(日) 만에 상경(上京), 시양(侍養)했다 하며 후일(後日) 공(公)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재위(在位) 중(中) 경성(鏡城) 객관(客館)에서 돌아가시매 영구(靈柩) 따라 상경(上京)하여 공근시묘(恭謹侍墓)하니 지순고절(至純孤節) 인품(人品)을 가(可)히 알리라 이제 파주군(坡州郡) 월롱면(月籠面) 소재(所在)의 누대(累代) 선영(先塋)이 정부(政府)의 국토계획(國土計劃)에 인(因)하여 징발(徵發)되매 공(公)의 예손(裔孫) 원부(元溥) 병희(秉喜) 등(等)의 주선발의(周旋發議)로 영역(瑩域)을 동군(同郡) 교하면(交河面) 다율리(多栗里)에 개정(改定)하고 고죽공(孤竹公) 천장(遷葬)에 따라 낭(娘)의 묘소(墓所)도 복원(復元)토록 하니 교하(交河) 영역(靈域)의 첨가(添佳)라 할지로다 심산(深山)의 한 떨기 유향(幽香)이 어찌 각○(各○)에 한(限)하랴 낭(娘)의 고결(高潔)한 심지(心地)가 공(公)의 원덕(元德)과 문중(門中) 가화(佳話)로만 그치리요 새로 비(碑)에 명(詺)하여 기록(記錄)함은 홍랑(洪娘) 시인(詩人)의 영세(永世)를 기(祈)함이오 숭문상덕(崇文尙德)의 조훈(祖訓)에 봉답(奉答)하여 낭(娘)의 문명(文名)을 다시 현창(顯彰)함이라>

 

 

  최경창이 가고 홍랑 또한 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5백 년을 넘었다. 사후에도 그녀에게 편안한 잠을 허락하지 않는 이 개발의 광기는 어드메쯤 가서야 그칠는지. 이제 곧 운정3지구의 삽질이 시작될 터인데 그녀의 운명이 기구하다.

 

 

 그녀가 누워 있는 발치에 손톱만한 들꽃 몇 송이가 가을 찬바람에 떨고 있었다. ♣

 

 

1) 북도평사(北道評事) : 함경도 지역 병마절도사(종2품)에 딸린 정6품의 무관직. 병마절도사의 막하에서 군사조치에 참여하며 문부(文簿)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2) 삼당시인(三唐詩人) : 조선 중종에서 선조 연간에 시명(詩名)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곧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을 이른다.

 < 퍼온 글>

 

출처 : 별 빛 가득한 집(bright star happily)
글쓴이 : 금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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