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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건축가] 산업문명을 해방시킨 치유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
"당신은 자연에 잠깐 들른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직선은 신의 부재이다
식물성 규율의 건축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세입자 계약서에는 ‘창문권’을 행사 할 수 있는 권리장전이 포함되어있다. “이곳의 모든 세입자는 자신의 창문을 알록달록하게 칠할 수 있고 장식물을 달수 있으며 색색의 타일로 장식할 권리가 있다.” 건축은 세입자가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것이라 여긴 훈데르트바서의 생각 속에서 지금도 그의 건축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Hundertwasser_Toilet |
이제 갓 ‘건축이란 무엇인가’란 개론적 질문 따윈 묻지 않는 건축학도에게 훈데르트바서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놀이동산 벤치에 앉아 혁명을 꿈꾸는 건축가”였다. 짐작컨대 그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외벽을 장식하는 원색 색채의 대비가 공주님이 사는 성이나 놀이공원 입구에 늘어선 서양식 공동주택을 닮았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이동산과 벤치와 대비되는 혁명이란 단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훈데르트바서가 가진 미학은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선과 경쟁하는 곡선의 행위가 혁명적인 것인가, 라는 물음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긴 하다. 건축을 공학의 한 분야로 이해할 때 곡선 역시 쪼개어 생각하면 직선의 연장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근거가 없다. 결국 여러 답문 끝에 이건축학도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다섯 개의 스킨-궁극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뤄 인간성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론, 건물의 친환경성을 넘어 사회적 환경의 건강성까지 돌보는 자는 자기 한계나 욕심을 극복한 혁명가라는 설명이었다. 그러하기에 작품수익의 상당부분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검소한 삶을 누렸으며, 사후 비영리재단을 통해 혁명의 영속성을 담보하지 않았느냐는 설명, 그래 네 말이 옳다, 건축학도여.
훈데르트바서의 풀네임은 Friedensreich Hundertwasser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의 뜻을 가졌다. 그는 물이 가진 이미지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직접 수선한 배로 3년간 망망대해를 헤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수한 곡선을 향해 몸을 내맡겼다. 그 배의 이름은 ‘비오는 날’(Regentag)이다. 비 오는 날, 자연의 모든 색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훈데르트바서는 곡선으로 떨어지는 자연 앞에 경배를 드렸다.
Hundertwasser_Kindergarten |
곡선은 자연으로 부터 온 것이기에. 자연을 지키고자 생태주의 복음을 설파하며 환경포스터를 배포하고 나체시위를 벌였으며(1967년), 변기를 만들어 똥거름을 생산하고, 직접 옷과 신발을 지었다. 이는 생물 순환의 중추로서 인간은 도덕적 철학을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직접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가면 만나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 주거 건축물을 짓고자 시의회는 공영 아파트 리모델링을 계획했다.
Hundertwasser_Quixote_Entrance |
1983년 디자인 공모전에 당선된 훈데르트바서는 3년여 만에 비엔나를 상징하는 명품 공동주택을 재창조했다. ‘한국식’ 개발이었다면 지금의 명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1,543㎡의 공간에 3층부터 9층까지 다양한 높이를 새긴 이 공동주택에는 30~150㎡에 이르는 다양한 주거공간 52세대와 상업공간, 어린이 놀이터, 윈터가든, 카페 등 커뮤니티 공간과 계단식으로 디자인된 지붕정원을 지니고 있다.
이 공간에 스린 그의 건축 철학은 ‘건축은 네모’라는 고정 관념을 깨고 곡선은 어느 한 점에 이르러 교차한다는 소통의 꿈을 새겼다는 평가를 얻었다. “진정한 건축이란 사람들이 그 공간에 이사 온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는 재개발이 속한 파괴적 습성을 누르고 공간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재해석되기를 바랐다(1985년).
그가 물 위로 투영했던 조형미와 색감은 2000년 태평양을 항해하던 엘리자베스 2호 갑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함으로서 곡선의 정점을 하늘로 끌어당겼다. 그의 나이 71세, 그는 유언을 통해 뉴질랜드에 마련된 ‘행복한 죽음의 정원’튤립나무 아래 겸손하게 묻혔다. 그가 1967년 독일 뮌헨에서 행한 나체 연설문에는 죽음을 실천의 행위로 던진 유언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당신은 자연에 잠깐 들른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그래서 인간이 차지한 그 공간의 가장 높은 곳에 나무를 심었으며, 그가 묻힌 곳도 자연일 수밖에 없는 ‘자기혁명’을 실천했다.
Mk_Frankfurt_BadSoden |
“다른 사람들이 식물적 작품을 그리거나 식물적 삶을 꺼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시작되며 갈채나 드럼소리가 없이 천천히 소박하게 자라 우리 사회체제의 관심을 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전식 원칙에 근거한 즉각적인 결과를 원한다.”
건축은 계산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처럼 훌륭한 건축가는 예술이라는 재능에 겨워 살기 마련이다.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화가의 재능을 쌓았다. 예술의 지향점은 대자연에 대한 흠모이기에, 훈데르트바서 역시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확고한 주제 의식 속에서 건축세계를 열어갔다.
중세의 어두운 색채가 지배하는 도시에 가한 발칙한 생각은 환상적 색채, 각양각색의 창문, 지붕정원을 통해 도시를 동화나라로 변신시켰다. “누군가는 집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말한다. 집들은 창문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창문은 눈과 동일하다. 눈과 창문은단일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일반적인 평이한 창문들은 슬프다. 창문들은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현대건축의 폐단이 그러했듯 단지 기능성과 실용주의만을 강조했다면, 그는 한국의 현대식 아파트와 같은 네모난 공동주택을 연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는 자로 잰 듯한 직선은 없다”고 주장한 훈데르트바서의 생각은 부드럽고 율동적인 선의 리듬 속에서 주거의 목적을 새기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의 세계관이 담긴 5개의 스킨(피부, 의복, 건물, 사회 그리고 지구) 이론은 사람의 행복할 권리를 지칭한 것이기에 그 역시 치유의 건축가라 할 수 있다. 그가 주창한 식물성의 말랑말랑한 건축이 콘크리트 투성이 도시를 위로하는 제3의 피부가 될 수 있을지는 사람을 의중에 달린 문제다.
Darmstadt_Waldspirale_Hundertwasser |
진정한 건축이란 사람들이 그 공간에 이사 온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5의 피부인 ‘지구’를 살리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각종 환경재앙에 직면한 우리로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 건물이 세워짐으로써 빼앗긴 자연의 공간을 만회하는 건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지구의 생존 방식과 일치한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 훈데르트바서는 지속가능한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법을 존중과 배려, 실천의 덕목으로 푼 건축 활동가였던 것이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1928년 12월 15일 - 2000년 2월 19일) |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이다. 국적은 뉴질랜드이고 본명은 프리드리히 스토바써(Friedrich Stowasser)이다. 20세기 오스트리아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에는 ‘대성당 1 Cathedral 1(1951)’, ‘노란 집들-질투 Yellow Houses-Jealousy(1966)’, ‘작은 길 The Small Way(1991)’ 등의 회화 작품과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Hundertwasserhaus(1983~1986, 오스트리아 빈)’,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Wien, (1991, 오스트리아 빈)’, ‘블루마우 온천마을 Blumau(1993~1997,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 등의 건축물이 있다. [우드플래닛 유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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