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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15 /법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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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정이 촉박해서 서둘러 점심 식사를 한 후 전국 비구니회가 위치한 법룡사로 향했습니다. 현재 스님은 외부 강연을 일절 하지 않고 있지만, 비구니회에서 여러 번 요청을 해서 스님도 특별히 시간을 내어 마련된 자리입니다.
법룡사에 도착하자마자 스님은 찢어진 가사를 1층에 마련된 가사원에 맡겼습니다. 몇 년 전 동남아 스님들을 모시고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가사원을 구경시켜 주었기 때문에 스님은 이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사가 찢어져서 그런데 혹시 법회 전에 수선이 가능합니까?”
“그럼요.”
이어서 법문을 하기 전 전국비구니회 회장 본각 스님과 잠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종교지도자들과 모임이 있어서 서울에 오고, 그 외의 대부분의 시간은 시골 폐교에 살면서 농사짓고 있습니다.”
“굉장히 멋있게 사시네요. 부럽습니다.”
“은퇴하면 농사짓고 살려고 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조기 은퇴를 시켜줬어요. 그래도 온라인으로 법회를 할 수 있으니까 안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네요. 어제는 외국인들과도 온라인 법회를 했습니다.” (웃음)
회장 스님은 스님을 강연에 초청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작년에 회장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남은 기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지금 비구니들에게 중요한 게 뭘까 생각해보니 수행 정신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4월 30일부터 비구니 승가공동체 수행결사라는 것을 시작했어요. 율장과 「권수정혜결사문」을 나누어서 합송하고, 매 회 좌선이나 법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스승을 추천받았더니 법륜스님을 모셨으면 좋겠다고 해서 스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스님이 걸어오신 길이 다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모두 귀가 열려있으니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사가 다 수선되었습니다.
“스님, 떨어진 부분을 다 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지간한 옷은 제가 꿰매 입는데 가사는 어렵네요.”
“스님 가사가 너무 낡고 떨어진 부분이 많으세요. 마침 사이즈가 똑같은 가사가 있는데 이것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더 이상 새 옷은 구입하지 않기로 했어요. 가사 기워주신 것을 강사료로 하겠습니다.” (웃음)
스님이 단호하게 사양하자 가사를 가져온 스님은 못내 아쉬워하며 가사를 되가져갔습니다. 강의할 시간이 되어 기운 가사를 입고 강의 장소로 갔습니다. 먼저 비구니회 회장인 본각 스님의 환영사가 있었습니다.
“모시기 어려운 분을 모셨습니다. 스님의 몇 말씀을 듣는 자체가 승가공동체의 정신을 일러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큰 박수 소리와 함께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스님은 먼저 긍정의 바탕 위에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한국 불교의 부족한 점만 자꾸 보게 되면 ‘우리 불교가 지금 이대로 괜찮겠는가?’ 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떤 비판을 할 때는 긍정적인 바탕 위에 비판을 해야 개선책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건설적인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반면 부정적인 바탕 위에 비판을 하게 되면 그만두자는 식의 파괴적인 에너지가 나오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현실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고 비판 의식이 전혀 없으면 ‘이 정도면 됐지’ 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도 한국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들끼리 내부를 바라보면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고, 강원 운영도 걱정이고, 스님들 생활하는 모습도 걱정이고, 승가 본연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는 비관적인 요소만 많이 보입니다.
긍정의 바탕 위에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
그렇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비구니 제도가 있다는 것만 해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비구니 제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구니 스님이 승가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비구니 강원도 여러 곳에서 운영되고 있고, 운문사와 봉녕사 등을 비롯한 비구니 사찰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대만에 자재공덕회가 있긴 하지만 그건 하나의 특정 단체라고 볼 수 있지 한국처럼 비구니 제도가 정착되어 있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러니 비판을 하기에 앞서 우선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자부심 위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모습입니다. 다만 앞으로 더 발전하고 미래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개선할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어서 요청받은 강연 주제인 ‘승가공동체를 위한 의식 전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승가공동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스님이 평소에 가져온 문제의식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세 가지
“제가 한국불교를 보면서 갖게 되는 첫 번째 문제의식은 소비주의에 너무 중독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하는 소비주의를 표방합니다. 북한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받아들여서 적응해야 하고, 중국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 적응해야 하고, 봉건왕조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봉건왕조 시스템을 받아들여서 적응해야 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르침이 아무리 좋아도 현실적으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소비주의에 중독되어 가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건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분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당시 인도 사회가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즉, 부처님 개인의 훌륭한 인격과 함께 전통사회가 붕괴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와 같이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기존의 가치가 고착된 안정적인 사회적 분위기였다면 이러한 변화가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조선시대에 누군가 여성운동을 하고자 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기는 어렵습니다.
기원후 2세기부터 5세기까지 인도는 굽타왕조 시대를 맞이하는데, 굽타왕조 시대에는 쇠퇴한 브라만교가 다시 힌두교로 재정립되어 부흥하는 시기였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인도에서는 윤회에 대한 믿음과 성차별, 계급 차별 등 힌두교의 전통 사상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불교 역시 윤회와 성차별, 계급 차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성차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졌던 비구니 제도도 사라지게 됩니다.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부처님의 말씀이 글로 옮겨지고 편집되는 시기도 이 시기와 맞물립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니까야’라고 부르는 초기 경전들도 이 시기의 시대 상황을 반영해서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까야’라고 해서 무조건 오리지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니까야 안에서도 교리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는 부분은 오히려 후대에 힌두 사상과 결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니까야 중에서도 붓다의 인격적 모습이 담긴 내용에 더욱 비중을 두고 봐야 합니다.
어떤 사상이든 소수의 인원만 수행을 하고 대중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는다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지만, 대중이 집단을 형성하며 일정한 규모를 갖기 위해서는 대중이 갖는 당시의 사회적 가치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그 사상에 동조를 하지, 현실적으로 도움이 전혀 안 되면 지속적으로 동조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교 역시 대중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봉건사회에서는 봉건적인 사상을 일부 수용하게 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을 일부 수용하게 됩니다. 대신 이렇게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수용한 측면들은 불교의 본질에서는 많이 벗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특징은 과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불교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불교를 현대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화되는 것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소비주의를 점점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불교도 자본주의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변색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과정을 그저 ‘왜곡’ 또는 ‘변질’이라고 표현할 것인지, ‘시대에 맞게 발전되어 왔다’라고 표현할 것인지는 바라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화된 불교는 비록 지금은 나름대로 적응도 하고 발전도 하겠지만, 자본주의 다음 사회가 되면 차츰 도태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봉건제 사회 속에서 그 사회에 적응하고자 불교 교리와 시스템을 봉건 왕조에 맞게끔 바꾸면, 이후에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불교가 봉건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때 불교 역시 봉건사회와 함께 소멸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설령 다수의 불교인이 이 사회에서 현실에 적응하는 길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인원은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고 다음 시대를 위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정신을 유지해 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소비주의입니다.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다는 건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또한 부처님이 늘 경계해 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불교인들조차 소비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비주의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이나 종교지도자라면 이런 생활도 문제 없습니다. 저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는 옛날부터 대궐 같은 교회나 절을 짓고 생활수준도 왕과 비슷할 정도로 사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부처님의 삶을 보면 부처님은 왕위를 버린 수행자셨잖아요.
‘부처님은 분소의를 입고 걸식을 하고 사셨는데, 지금 우리가 새삼스레 걸식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자의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제가 갖는 첫 번째 문제의식입니다.
수행자가 사람을 고용해서 사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두 번째 문제의식은 수행자가 사람을 고용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게 과연 맞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일절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밥 먹고 생활하는 문제를 사람을 고용해서 해결한다면 그것은 출가 승려의 생활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다음에도 예전처럼 마부를 따로 두고, 침구 정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요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스님들의 삶을 보면 부처님이 행하신 인격과는 많이 다릅니다. 불교에 기여하신 바가 큰 고승들조차 모두 사찰에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노비들이 농사짓고, 청소해주고, 밥 해주는 노고 위에서 스님들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종교지도자나 불교학자 또는 심오한 사상가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수행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토회에서는 사람을 일절 고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건제 사회에서 노비를 두는 것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임을 지급하고 사람을 고용해서 생활을 하는 건 출가정신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절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렇게 운영되는 절은 포기 해야 한다’ 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의 건물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절에서 부목 생활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절에서도 대부분 스님들 사이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부목들은 머슴의 삶을 살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스님들이 부목을 종 부리듯 부리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때 제가 선방에서 나오는 쓰레기도 치웠는데 수행자들이 생활하는 선방인데도 먹다가 남은 음식 쓰레기들이 마구 버려졌습니다. 환경운동을 말하기 이전에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가 출가할 때 수행자로서 배운 계율이나 가르침과도 맞지 않습니다.
과연 수행자가 사람을 고용해서 생활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이야기는 종교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수행자의 모임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수행자라면 이런 문제가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승려가 되면 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 번째 문제의식은 출가해서 승려가 되면 갖게 되는 교만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의 은사스님은 저에게 승려를 많이 배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출가 승려를 안 받고 있습니다. 머리를 기르고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겠다고 하면 수용하지만, 누군가 출가를 하겠다고 찾아오면 다른 사찰로 보냅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도 은사스님이 저를 불러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은사 스님이 보시기에는 정토회 안에 출가 승려가 없으니 앞으로 법의 계승은 누구에게 할 것인지, 이대로 가서 법의 계승이 단절되지나 않을지가 걱정인 겁니다.
저는 출가하는 걸 권유하지,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출가해서 ‘승려’가 된 후에 갖게 되는 교만함에 대해 우려하는 겁니다. 아직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 대안을 못 찾고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행자들 몇 분을 출가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원이나 선방에만 갔다 오면 ‘내가 승려다’하며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스님이 되면 재가자보다 더 겸손해야 하고, 돈에 대해서도 더 검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승려 문화로 정착되어 있어서 발생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스님을 예우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긴 한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리도 자기가 앞에 앉아야 됩니다. 수행공동체에서는 보시금을 모두 공금으로 처리하는데 스님이 되면 보시금도 개인적으로 받게 되는 일도 생깁니다. 이러다 보니 제가 생각하는 수행자의 원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 교만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큰 과제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이 말은 당당하지만 겸손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당하라고 하면 교만해지기 쉽고, 겸손하라고 하면 비굴해지기가 쉽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과제입니다.
미래 사회에는 가장 큰 경쟁력이 무엇이 될까요?
정토회는 지금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실험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외에도 저는 ‘왜 명상은 소비적이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도 갖고 있습니다. 명상을 꼭 앉아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나 걸으면서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고추 따면서 손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거죠. 그래서 명상도 생산적인 활동과 연결해서 하는 방법을 지금 연구 중입니다.
우리는 생산 활동을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유흥을 즐기는 방식으로 풀거나 아니면 명상을 하면서 풀고 있습니다. 마음병 걸린 뒤에 치료를 하려고 하지 말고, 애초에 생산 활동 과정에서 알아차림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별도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병든 후의 사후적 치유가 아니라 미리 병들지 않도록 하는 사전적 예방 수행법을 개발해야 불교가 미래사회에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돈이 얼마냐 있냐,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인기가 얼마나 있느냐 등이 경쟁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미래사회는 누구나 옷 입고 밥 먹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결국은 ‘얼마나 행복하냐’, ‘얼마나 스트레스가 없느냐’ 하는 것이 경쟁력이 될 겁니다.
옛날에는 옷이나 음식을 갖고 부자냐 가난하냐 따졌지만 요즘은 옷 입고 음식 먹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이럴 때 진정한 삶의 경쟁력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진 돈이 좀 적고, 지위도 낮고, 인물도 못생겼더라도, 행복하게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자가 가져야 할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보면 어떨까요? 계급차별, 민족차별, 성차별도 다 없어지고 있는 지금 시대에 스님이니 속인이니 이런 차별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열반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느냐?’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이 저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보편타당한 최상의 진리라고 번역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보편타당한 최상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새롭게 접근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님의 기조 강연이 끝나고 즉석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손을 들고 자유롭게 궁금한 점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스님의 강연 내용 중에 종교지도자와 수행자를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종교지도자와 수행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종교지도자와 수행자의 차이점을 어떻게 구분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종교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힘 있는 누군가에게 ‘이것 좀 하게 해 주세요’라며 부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종교는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충족시켜서 얻는 기쁨을 행복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첫째, 신과 같은 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요청하면 그분이 들어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힘 있는 존재와 그 힘 있는 존재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종교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신자’라고 일컫죠.
반면 수행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로울 때 이 괴로움이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수행자는 누군가에게 빌 일이 없습니다. 숫타니파타에서는 ‘희망을 갖는 것도 수행자에게는 옳지 않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이 좋지 않다는 의미잖아요. 수행은 지금이 좋은 줄을 아는 겁니다. 전생이니 내생이니, 극락이니 천당이니, 이런 것을 찾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수행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제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전생을 찾고, 내일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내생을 찾습니까? 지금 여기에 깨어있어서 늘 괴로움이 없는 경지를 유지해나가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다시 관점을 바로잡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생, 내생, 극락, 천당,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행자가 아니라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에 중독되어 있으면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욕망의 중독도 결국 카르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힘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수행할 때 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행에 대한 관점이 먼저 잡혀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관점이 먼저 잡혀야 됩니다. 관점이 바르게 안 잡히면 결국 애만 쓰고 스트레스만 받게 됩니다. 승려가 되어서 걸림 없이 세상을 살고자 출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남의 눈치를 보고 살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출가를 한 것인데 말이죠.
얼마 전에 어떤 스님이 사찰 운영과 자선 활동이 너무 힘들다고 저한테 하소연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수행적 관점을 놓치셨군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세속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이해가 돼요.
그렇다면 세속 사람들이 회사 운영하면서 힘든 것이나 스님들이 절 운영하면서 힘든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세속 사람들이 가족 관계에서 힘든 것이나 스님들이 절에 살면서 도반 사이에서 힘든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관점이 바르게 잡혀 있다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스트레스는 없어야 한다는 거예요. 설령 스트레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집착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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