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 스님의하루 (jungto.org)
2023.1.12 정토경전대학 한국불교의 역사 2강
지난 시간에는 한국 불교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불교는 한국에 전래가 되어서 한민족의 문화와 사상이 되어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세계사에 유례가 없었던 500년 동안의 탄압을 받게 되는 과정까지 공부를 마쳤는데요. 이어서 오늘은 근세에 한국 불교를 중흥한 용성 조사의 불교 혁신 운동에 대해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고, 재산이나 권력 등 욕망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당시 인도 사회에서 지역적으로만 세상을 보는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전 세계의 모습을 보는 통일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어느 한 부분에 국한적이지 않고 확 트인 시각을 알려주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인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를 이끄는 이미지를 주지 못하는 데는 조선조 500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받은 역사의 무거운 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에 와서 불교를 새롭게 불러일으킨 사람
비록 한국불교가 긴 시간에 걸쳐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지긴 했지만, 근대에 와서 불교를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용성 조사님입니다.
조선시대에 극심한 탄압을 받고 상당히 위축된 모습을 한 한국불교였지만, 조선조 말기에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용성 조사님은 곧바로 서울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불교를 전파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용성 조사님의 새로운 불교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둘째,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셋째,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용성 조사님은 평생 동안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정신을 본받고, 선불교의 오롯한 수행 정신을 이 땅에 다시 실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용성 조사님을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라고 부릅니다. 근대 한국불교를 새롭게 일으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성화
첫째, 불교의 지성화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회복하고, 수행 중심의 불교를 정립하는 일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우리가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해방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계급차별이나 성차별도 부정했습니다. 부처님은 양반, 상놈 등 계급을 부정하고, 남성, 여성 사이에 있는 차별도 부정하고, 나아가 만인의 평등을 주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고, 많은 왕들을 교화하셨고, 사업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교화해서 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에는 크게 퍼져나가지 못하다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200년이 지나 인도가 통일되면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깜깜한 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을 켜고 눈을 뜨니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처럼, 갇혀 있는 곳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걸 알기가 어려웠는데, 전 세계가 열리고 나니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 인도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은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는 수행 정진이 중심입니다. 이러한 근본정신은 조선시대 탄압의 시기를 겪으면서 많이 사라졌습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의 핵심인 붓다담마가 사라진 거죠. 불교가 탄압을 받다 보니 주변에서 절을 찾기도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설령 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산 중에 있고, 승려들은 거의 숨어서 살듯이 살아가야 했습니다.
또, 조선시대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양반이나 남자들이 불교를 믿으면 신분이 격하되었기 때문에 불교는 주로 여성들, 평민, 노비들이 믿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지배 계층의 종교에서 평민의 종교가 되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피지배 계층은 글을 알지 못해서 진리에 대해 탐구하기보다는 그저 복을 비는 것에만 치중한 단점도 있었습니다. 즉, 경전을 읽을 줄 모르니까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부처님께 빌면 복을 받는다거나 재앙이 없어진다는 기복 신앙으로만 받아들인 거죠.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무지를 타파하기보다는 전생의 업이라고 받아들이기 일쑤였고, 성차별로 핍박받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도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결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종으로 태어난 것도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종으로 태어났고, 신체장애를 가진 것도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 봉건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오히려 불교가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도 아니고, 붓다담마도 아닙니다. 진정한 붓다담마는 나의 어리석은 무지를 깨우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소멸해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회복하고 수행 중심의 불교를 정립한 것이 용성스님의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주자학을 비롯하여 유교의 가르침을 중심사상으로 받아들인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글이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죠. 그러다가 조선조 말기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천주교가 불교를 미신과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대중들의 요청에 의해 용성조사님이 1913년에 쓰신 글이 바로 귀원정종(歸源正宗)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이에요. 그 후 1930년에 간행된 각해일륜(覺海日輪)에서도 용성조사님은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가지 종파들이 강제적으로 통합되어 있었지만, 기존 종파들이 추구하는 수행법들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다양한 수행법들을 정리해서 불교의 5대 수행관을 정립하셨습니다.
첫째, 선종에서 중심으로 하는 참선수행, 둘째, 정토종에서 중심으로 하는 염불수행, 셋째, 교종에서 중심으로 하는 간경수행, 넷째, 밀교 계통에서 다라니를 외워서 업장을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력수행, 다섯째, 나라의 은혜,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를 갚는 것을 통해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불사수행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간경수행이란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법화경을 독송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행법이에요. 불사수행은 한마디로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비록 선종인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선(禪)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선종에서 주장하는 참선수행뿐만 아니라 정토종에서 말하는 염불수행, 밀교에서 말하는 주력수행,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간경수행, 일상에서 복을 짓는 불사수행 등 5가지 수행관을 모두 정립하고 아우르셨습니다.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용성조사님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계승해 온 법맥을 확립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법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즉 이심전심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음을 말합니다.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대중화란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당시 불교 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읽지 못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3.1 독립운동으로 인해 3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 계셨는데, 감옥살이가 끝나자 바로 삼장역회를 조직하고 경전 번역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경전대학에서 배운 금강경도 바로 용성조사님께서 한글로 번역한 걸 교재로 쓴 겁니다.
그리고 승려의 도성출입 제한이 풀리자 서울로 오셔서 종로 봉익동 1번지에 민간인 집을 하나 사셔서 포교당을 열었습니다. 당시 도심에 불교 포교당을 처음 여신 분이 바로 용성조사님이었습니다. 그리고 1호 법당을 ‘대각사’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도심 속 포교당을 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시민들을 위한 선방도 만드셨습니다. 스님들만 참선하는 게 아니라 재가수행자들도 그곳에 모여 참선할 수 있는 재가수행의 길을 연 것입니다. 또, 시민선방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이 와서 수행할 수 있도록 부녀선방도 열고, 어린이들이 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도록 어린이 법회도 여셨습니다. 당시 어린이 법회를 진행하기 위해 오르간을 법당에 가져다 놓고 아이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찬불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용성조사님께서 작사, 작곡한 찬불가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재가수행자가 되는 삼귀의 오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재가자가 수행자가 될 수 있도록 삼귀의 오계를 복원하셔서 평생 동안 3천 명에게 수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100만 명이 수계 하도록 하라는 유언도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경전이 난해해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법을 알 수 있도록 경전을 번역하고, 누구나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을 개설하고, 아이들에게는 어린이 법회를 통해서 담마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도심 속에 1호 포교당을 개설해서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하셨습니다. 산속에 숨은 절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절을 만들어서 대중화에 앞장섰습니다.
나중에는 대각사를 아예 '대각교'라고 이름을 바꾸셨는데, 당시 기존 불교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파격적으로 이름을 바꾸신 겁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라는 뜻이고 불교는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라는 뜻인데, 크게 깨닫는 걸 한문으로 표현하면 '대각(大覺)'입니다. 그렇게 불교라는 이름을 대각교로 바꾸신 거예요. 스님에게도 '중'이나 '중놈' 등 나쁜 이미지의 명칭이 따라다니니까 자신을 선생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이름도 안 쓸 정도로 불교를 새롭게 하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을 하셨습니다.
불교의 생활화
불교의 생활화란 생활이 곧 수행이 되도록 하는 일을 말합니다. 생활 속 수행이 가능케 하기 위해 '세간오계'를 만드셨습니다. 신라시대에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는데, 그것처럼 용성조사님의 세간오계(世間五戒)가 있습니다.
첫째, 나라에 생명 바쳐 충성하라. 둘째, 어버이에게 생명 같이 효도하라. 셋째, 스승에게 생명 다해 공경하라. 넷째, 벗에게 생명 다해 신의로 사귀어라. 다섯째, 싸움에 생명 걸고 지혜롭게 이겨라.
용성조사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나라에 생명 바쳐 충성하라' 하는 계율을 만들어서 불살생 계율을 실현하게 했습니다. 독립을 통해 더 많은 생명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의 제자 중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윤봉길 의사도 용성조사님으로부터 세간오계를 수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계율은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맞춘 수행자의 지침으로,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탄압의 역사가 길었던 불교 신자들이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도록 독려하시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마음공부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셨습니다. 이는 농사와 참선, 즉 일하고 수행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수행자들이 남으로부터 보시를 받아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산해서 먹으면서 수행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선농일치는 수행자들을 위한 가르침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가를 돕고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가면 '안도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안도현은 백두산이 소속된 현이기도 합니다. 백두산 아래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30만 평의 산림 황무지를 개간한 다음 농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수행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은거하고, 또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이 와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훗날 일본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간도토벌대를 창설했는데, 바로 명월촌 입구에 간도토벌대의 본부를 세운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얼마만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경남 함양군에 있는 백운산에서는 '화과원(華果院)'이라는 과수원을 만들어서 경영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과수원 농사를 지으셨지만 실제로는 모두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전라도의 만석꾼들에게서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과수원으로 가지고 와서 그걸 농산물처럼 포장해서 다시 상해임시정부로 운반하는 일종의 위장 재정지원의 중심지였습니다.
수행과 생활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밥 먹고, 똥 누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주화를 이루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곧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이렇게 용성조사께서는 불교가 세상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시대적 과제가 나라의 독립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독립에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격려하셨고, 재정을 모아서 독립운동 단체에 끊임없이 지원하셨습니다. 승려로서 본분을 지키면서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을 지원하신 겁니다.
이것이 용성조사님의 불교혁신 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용성조사님의 불교혁신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불교나 정토회가 이만큼이라도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불교는 용성조사님의 불교혁신 운동에 비해 훨씬 더 후퇴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이른 극심한 절망의 시기였지만, 용성조사님께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복을 지으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운이 열린다. 그러면 세계 일류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희망을 주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지금은 어렵지만 절망하지 말아라. 세월이 얼마 지나면 새로운 나라로 발전해 갈 테니 이렇게 복을 지어라’ 하고 당부하시면서, 바른 법을 세우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유훈으로 남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훈십사목입니다.
바른 불교, 쉬운 불교, 생활 불교
법륜 스님은 이런 용성조사님의 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토회를 설립하여 불교를 더 바르게 하고, 더 대중화하고, 더 생활화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정토회의 창립목표 중 첫 번째가 바른 불교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정법을 공부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성조사님께서 말씀하신 ‘불교의 지성화’와 일맥상통합니다. 일체의 허례허식을 배격하고 정법을 중심에 두고 전법을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정토회의 창립목표 두 번째는 쉬운 불교입니다. 불교가 생활언어로 이루어져야지, 학문을 하듯이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쉬운 불교는 용성조사님의 ‘불교의 대중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정토회의 창립목표 세 번째는 생활불교입니다. 이것은 용성조사님이 말씀하신 ‘불교의 생활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지구환경을 아끼기 위해 환경실천을 하고, 우리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복지활동을 하고, 전쟁위기가 일어나면 평화운동을 하고, 이런 사회적 실천 운동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법당에 가서 절하는 것만이 불교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내가 스님이자 수행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곳이 바로 법당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청정히 가져서 내가 밥 먹고 똥 누고 생활하는 그 공간을 법당화 시키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 이웃을 평화롭게 만들고, 이 좋은 법을 이웃으로 널리 전해가자는 겁니다.
어떤 권위도 내세우지 않고, 스님과 신도를 차별하는 것도 없애고, 남자니 여자니 하는 차별도 없애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하는 관점에서 해나가는 것이 정토회 운동입니다. 불교라는 형식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면, 불교라는 형식마저 과감하게 버리고 법을 전하자는 것이 행복학교입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교로 바로 접근하고, 불교라는 이름마저도 거부하는 사람은 종교를 넘어서서 이 좋은 법을 전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법을 전하는 것이 정토불교대학과 정토경전대학이라면, 불교라는 이름도 없이 법을 전하는 것이 행복학교입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은 불교와 상관없이 전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자발적인 행복시민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정토회가 주창하는 내용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님으로부터 대승보살, 역대조사, 근대불교의 아버지인 용성조사님의 법이 계승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의 혼란기에 태어나셔서 인도의 민중을 구제하고 인도가 통일되는 기초를 마련하셨듯이, 오늘 우리들도 여러 사회적 혼란과 환경위기를 맞아 인류문명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나가야 합니다. 동양철학은 유불선이라고 해서 유교, 불교, 도교적 기반을 갖고 있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우리는 한국 고유의 전통사상 기반도 갖고 있고, 최근에는 기독교, 사회주의 등 외래 종교나 철학의 기반도 갖고 있고, 또 자연과학의 기반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다 융합해서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 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이 하셨던 것처럼요.
누가 옳으냐고 서로 싸우니까 혼란스러운데, 이 모든 것들을 중도적으로 통일해 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결해 낸다면 우리나라는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과제를 해결하는 가장 앞선 문명의 비전을 제시하는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정토회가 지난 30년 동안 걸어온 길
오늘날 정토회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도 아니고, 정토회라고 하는 단체 하나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후위기도 닥쳐오고 세계가 각축하는 이런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예요. 종말론 같은 종교적인 해법이 아니라, 인류가 나아가야 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혼란기에 새로운 사상이 나와서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늘 있었습니다. 인도 당시에 기존 브라만교가 붕괴하고 사회가 분열되고 혼란에 빠지고 여러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서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부처님이 출연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듯이, 기존의 불교가 권위주의적으로 타락했을 때 대승불교인들이 새로운 보살사상을 제시했듯이, 중국의 불교가 세속의 권력과 결합해서 타락했을 때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다’ 하는 선불교가 일어나서 동양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듯이, 오늘 우리는 철학, 과학, 종교 등을 기반으로 해서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지금도 좋고 미래도 좋은, 중도적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토회는 이런 비전과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험하고 다시 보완하고 개선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문즉설, 정토불교대학 등 불교 가르침을 전하는 것도, 환경, 복지, 평화 등 많은 사회적 실천운동을 하는 것도, 모두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냥 한 종교단체가 좋은 일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하면, 현생에서 복을 빌고 죽은 뒤에 극락에 가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성립하고 신자가 온다고 하죠. 그러나 정토회는 지난 30년 동안 복 비는 얘기나 죽은 뒤 얘기를 하지 않고, 불교라는 이름도 고집하지 않고 활동해 왔습니다. 자기 마음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얘기, 즉 내가 행복해지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동시에 ‘나만 깨달으면 된다’ 하면서 안주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좀 더 민주화되고 정의롭고 인권이 존중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 왔습니다. 활동 규모는 작지만 거대한 실험이고, 작은 성공은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이 좋은 법은 과학적으로 봐도 모순이 없고, 철학적으로나 종교적 믿음으로 봐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이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의 삶이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종교, 성별, 국적, 계급 등을 떠나 누구든 자유롭고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인도의 아이들이나 차별받는 무슬림 아이들이 똑같은 사람으로서 존중받으면 좋겠다. 그들이 어렵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눠가지겠다.’
‘지나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더 이상 하지 않도록 막아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 등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같이 살도록 하자.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 후손들도 지속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나가 보자.’
이것이 정토회가 창립되고 지금까지 활동해 온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토회는 작지만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이런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다만 얼마라도 내가 기부해서 재정을 자립하고, 얼마라도 내가 주인이 되어 봉사를 하지, 정토회를 움직이는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스님이 훌륭하시니까 우리는 그저 따라가면 된다’ 이런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인입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스님이니 신자니 이런 말을 안 쓰고, ‘회원’, ‘활동가’, ‘수행자’, ‘봉사자’ 이런 말을 씁니다. 차별적인 용어는 가능하면 안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지만, 정토회는 오히려 그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서 새로운 문명을 제시하는 쪽으로 나아가자는 관점을 갖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자료&관심사● > 법륜스님·법문 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78. 최근 커리어 우먼에 대한 생각 (0) | 2023.01.20 |
---|---|
1839. 사랑하는 엄마지만 가까이 있으면 너무 힘들고 멀어지면 죄스러운 마음 (0) | 2023.01.17 |
제810회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요? 진정한 성공이란? (0) | 2023.01.09 |
1816.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애를 가졌습니다 (0) | 2023.01.09 |
이거 할지 저거 할지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0) | 2023.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