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 전법회원 법회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려면”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차 만일결사가 진행되는 향후 30년의 과제는 전 세계인에게 행복을 전하고, 소비주의, 자본주의,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비주의나 기후위기 극복은 어떤 과제를 갖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고 실천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과제를 가지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조금이라도 많이 쓰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이다’ 하는 가치관이 자본주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옛날 노예제가 행해지던 시대에나 봉건주의 시대에도 그런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늘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화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시대는 달라도 대부분의 가르침은 욕망을 절제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죠. 그러나 여전히 가르침 자체는 항상 욕망을 절제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물질이 중심이 되면 안 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이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본주의에서도 물질이 중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신본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을 노예화시킬 소지가 있지만, 핵심은 인간의 정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신본주의에 반대하면서 인본주의가 일어났는데, 이렇게 발생한 인본주의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가치관을 옮겨오는 동시에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신 중심의 신본주의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부정 시 했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겉으로는 금욕주의를 주장하면서 뒤로는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모순을 드러내면서 금욕주의도 신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금욕주의에 반대하면서 차츰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시각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학문을 연구하거나,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도리어 금욕주의를 내세운 중세 봉건주의 시대를 우리가 문명사적 암흑기라고 표현할 정도니까요.
이처럼 사람의 욕망을 인정하자는 건 처음에는 좋은 의미였는데, 이런 사고방식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는 더 이상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고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끝없는 욕망을 좇는 걸 합리화하고, 오히려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장려하기까지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가치 기준이 더 이상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과 얼마나 더불어 잘 살아가는지, 다른 사람과 얼마나 협력을 하면서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돈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했다면, 이제는 계급도 아니고, 남녀 성별도 아니고, 오로지 돈으로만 평가하고, 돈만 많으면 우대받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물질적 소비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 대우를 받는 사회인 거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불법만 저지르지 않으면 술집을 해서 돈을 벌든, 무엇을 해서 돈을 벌든, 그저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조선시대와 같은 계급사회에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신분이 낮으면 대우를 받지 못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기준이 되는 사회입니다.
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돈이 돈을 버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을 해서 받은 월급을 저축하고, 그렇게 저축한 돈을 모아서 집도 사고, 삶을 꾸려 나갔는데, 요즘은 재테크라고 해서 투자한 돈으로 다시 돈을 버는 일에 다들 뛰어듭니다. 투자라는 이름하에 투기를 하기도 하고, 도박 같은 게임에 참여해도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인데, 요즘은 집들이 투기의 대상이 된 측면이 많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인정함으로 인해 초기에 문명의 발전을 이끈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데 반해, 지금은 지나치게 물질 중심의 사고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즉, 소비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닫는 데 제도적인 뒷받침을 자본주의가 해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도 왕이 되고,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들도 양반이 되고, 아버지가 관료면 아들도 관료가 되는 게 일상적이었습니다. 즉, 신분세습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신분세습을 과감하게 철폐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분 대신 자본이 세습되는 모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분이나 권력이 세습되는 건 반대하면서도 아버지의 재물이 그대로 아들의 재물이 되는 자본 세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신분이든, 권력이든, 재물이든 세습되는 건 막아야 하는데, 요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분이나 권력이 세습되는 건 막지만 자본이 세습되는 건 그대로 둡니다. 그래서 결국 자식이 부모의 자본을 받아서 그 자본의 힘에 의해 다시 권력을 잡는 권력세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가진 권력을 상당 부분 자식이 물려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요즘은 더 이상 아버지가 왕이기 때문에 자식도 왕이 되고, 아버지가 관료니까 자식도 관료가 되는 세습이 일어나지는 않지만,실제로는 돈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변형된 신분세습, 변형된 권력세습이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그래도 옛날에는 농촌집 아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사다리가 많이 무너진 상황입니다. 요즘에는 변호사 아들이 변호사가 될 확률이 높고, 의사 아들이 의사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의과대학도 보낼 수 있고, 아들이 의사가 되어서 졸업을 하면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다가 아버지가 은퇴하면 아버지가 돌보던 환자들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병원을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경이 없는 사람과는 출발점이 많이 다릅니다. 이런 건 법률회사들도 마찬가지죠. 심지어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는 세습정치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가 정치를 하면 나중에 아들이 그 지역구를 물려받아서 정치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질서가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해 다시 옛날 계급사회와 같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돈을 벌고 자수성가하는 사례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물고, 오히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다음 세대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그로 인해 다시 계급사회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재물의 많고 적음만 따졌지만 앞으로 바이오 산업이 발전하면 재물에 따라 삶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돈 있는 사람은 나이가 100살이 되어도 50대의 피부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보통 사람은 명대로 살다가 죽고, 가난한 사람은 명대로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상류층은 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면서 살고,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너도 나도 돈을 벌어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많이 쓰기 시작할 거예요. 지금은 화장품을 사거나 수술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나중에는 수시로 약을 사먹거나 주사를 맞는 쪽으로 나아가서 결국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삶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을 보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부러워하겠죠. 옛날에 하인이 양반을 부러워하듯이, 요즘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듯이, 훗날엔 육체를 젊게 유지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거예요. 사실 요즘에도 이미 이런 현상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60대인데 30대의 피부를 가졌다거나 40대의 건강을 가졌다는 사람이 미디어에 나오면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부러워합니다. 어쩌면 돈이나 권력보다 그런 걸 더 부러워하게 될지도 몰라요.
이런 것들이 전부 물질중심의 가치관으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가 얼마나 타인을 배려하는지, 그가 얼마나 평화적인지, 그가 얼마나 지구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서 후대의 삶이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지, 이런 건 삶의 평가 기준에 전혀 안 들어가고 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교회를 팔 때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십일조를 내는 신도가 몇 명인지 등을 기준으로 합니다. 교인 등록 수가 아니라 예배참석자가 몇 명인지를 따집니다. 왜냐하면 일요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십일조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참석 교인’으로 소개를 합니다. 이렇게 헌금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시설이 얼마나 큰지를 기준으로 교회를 얼마에 팔지를 결정합니다. 그러니 장사하는 가게를 팔 때와 다를 게 없죠. 가게를 팔 때도 손님이 몇 명인지, 매출이 얼마인지, 건물의 평수가 얼마인지를 기준으로 권리금 등을 책정하니까요.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절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를 기준으로 잘 되는 절인지 아닌지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절이나 교회에서도 결국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장로가 되고, 대보살이 되고, 신도회장이 되곤 합니다.
결국 모든 부분에서 자본이 중심인 세상이 된 겁니다. 종교 시설에 갔을 때 그곳이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결국 거기에 가서 기도를 하면 돈을 많이 버느냐 아니냐 하는 걸로 따지잖아요. 대형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은총을 물질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대형교회가 됐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 있다는 것으로 평가가 되고, 작은 교회는 그 자체로 은총을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은총 받지 못한 교회에는 가서 기도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형교회로 몰리는 거요. 이런 게 다 자본주의의 폐단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결국 시스템을 달리해서 물질적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비주의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이 중심이 되지 않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지향할 뿐입니다.그래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혜택을 누가 받느냐,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한다고 해서 이런 시장 경제 시스템을 모두 다 없애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을 곧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것으로 받아들여도 안 됩니다. 우리는 물질 중심주의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고, 삶의 가치가 물질이 아닌 행복으로 옮겨가는 사회를 만들고자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국가를 평가할 때도 1인당 GDP를 비롯하여 그 나라에서 물질을 얼마나 생산 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부탄의 왕은 국가를 평가할 때 그 나라 국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기준으로 지수를 잡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걸 요즘은 ‘행복지수’라고 부릅니다. 최근에는 뉴질랜드 수상이 행복을 중심으로 국가 예산을 편성하고 행복 증진에 맞춰 정부 정책을 집행하겠다고 하면서 행복 예산을 발표한 적이 있죠. 행복지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국가가 정책을 집행할 때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얼마나 올라가는가, 지역 주민의 행복지수가 얼마나 올라가는가 이런 걸 평가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처럼 세속에서도 더 이상 물질이 아닌 행복을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절에서도 무슨 행사를 할 때마다 대개 ‘이 행사를 하면 돈을 얼마나 벌 수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등을 달면 얼마나 벌리는가, 커피숍을 운영하면 수입이 얼마나 되는가,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들어서 팔면 수입이 얼마나 생기는가, 이런 관계들이 재정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통용이 되는 거죠. 스스로 재정을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자꾸 그렇게 흘러가면 불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고뇌로부터 벗어났는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얼마나 돕고 구제했는가 하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역시도 자본주의적 폐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극복해야 하는 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입니다. 정토회가 추구하는 것은 불교적 관점이고, 불교적 관점은 중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토회는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가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 중심이 낫다거나 인간 중심이 낫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극단적 폐단도 비판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불교는 지나친 권위주의도 비판하고, 지나친 물질주의도 비판하고, 지나친 자본주의도 비판하고, 지나친 소비주의도 비판합니다. 지나치게 소비주의에 빠져서 모든 것을 물질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지구의 환경위기를 초래합니다.
개인의 자유에 있어서도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 자유주의의 한 측면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욕망에 대해서는 일정한 절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갖고 정토회는 삶의 새로운 가치관, 삶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치우친 관점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모델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여기에 참여해서 함께 실험을 하는 중입니다. 스님도 참여하면서 실험하는 중에 있고,여러분도 참여자인 동시에 실험자입니다. 정말로 이렇게 사는 게 나은지, 아니면 그냥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서 목걸이 자랑하고, 귀걸이 자랑하고, 집 크기를 자랑하고, 아이 유학 보낸 것을 자랑하면서 사는 게 나은지, 여러분도 실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은 생활이 너무 곤궁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런 수다만 떠는 것에서도 삶에 의미 부여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실험을 하면서 과연 어떤 삶을 살 때 내 삶에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한 신념이 생길 때 비로소 정토회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네, 스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실험이라는 말씀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정토회에서 활동하는 우리 모두가 그런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더 깊이 생각하면서 제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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