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불교&자료&관심사●/법륜스님·법문 外

2024.5.24 / 금요 즉문즉설

보현화 2024. 5. 27. 22:43

2024.5.24 금요 즉문즉설(온라인, 오프라인)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에서 직접 시민들과 만나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저녁에는 오프라인으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즉문즉설을 못 듣는 분들을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전에 즉문즉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전에 시청이 가능한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하고, 시차가 다른 해외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28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지적 장애인 거주 시설 거제도 애광원에 사는 식구들과 함께 순천만 국가 정원을 함께 산책했습니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잠깐 보고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 영상 보기
영상을 보고 나서 스님이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잘 보셨죠? 아픈 사람을 병문안 가보면 건강한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가 있고, 전쟁이 일어나는 나라에 가보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난민촌에 가서 고향을 떠나 난민 캠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주먹 만한 내 집이라도 갖고 사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있고, 장애인들을 만나면 내가 장애가 없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항상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봉사를 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장애인을 돕는 것, 난민들을 돕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이 행복을 얻어갈 수 있어요. 기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경전을 읽고 불교 의식을 하는 것만 불교가 아니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우선 물을 줘야 하고, 배고픈 자에게는 우선 음식을 줘야 하고, 아픈 사람에게는 우선 약을 줘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이 적어졌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육체적 생존 위협보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하는 주제는 ‘우리들의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지느냐’입니다. 이런 대화가 담마이고 진리입니다. 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부처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겁니다. 인종, 성별, 종교, 이런 것을 뛰어넘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는 각자 자기가 믿는 종교에서 위로를 받으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어떤가?' 이것이 중심 과제입니다.”


이어서 한 시간 30분 동안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외부에서 사회 인사 분들과 미팅을 가졌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해 질 녘에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오프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한 후 번호표를 한 장씩 추첨함에 넣은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튜브에서 5400여 명이 접속하고 현장에서 4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사전 공연이 있은 후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나서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무아가 뭡니까? 무상이 뭡니까? 공이 뭡니까? 이런 걸 물어야 법에 관한 대화가 아닙니다. 괴로움을 얘기하다가 그 괴로움이 사라질 때 그것을 법에 대한 대화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 하는 구절이 있죠. 육신이 건강해도 괴롭게 산다면 육체적 생명은 살아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잘 산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표현을 빌리면 지옥이 아닌 천국에 살아야 그게 영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스님이 자꾸 기독교 얘기를 하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서양 문화에 익숙하잖아요. 옛날에는 유교 경전을 비유로 들어야 이해하기가 쉬웠다면, 요즘은 성경을 비유로 들어야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얘기하느냐 불경을 얘기하느냐가 아니고, 마음이 작용하는 이치를 이해하고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담(法談)이고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고뇌가 점점 사라지는 대화
그런데 이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이 왜 법문은 안 하시고 자식 키우는 일이나 부부 싸움 하는 것에 대해 조언을 하느냐’ 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세요. 경전이나 불교 교리를 얘기해야 법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의 원래 목표는 고뇌가 사라진 상태인 열반(涅槃)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극락 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생에 잘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 생에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나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수행은 종교와 다른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보통 종교의 목표는 죽어서 천당에 가거나, 이 생에 복을 받는 것이지만, 수행의 목표는 고뇌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과 대화하는 이것이 바로 법담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고 보니 별 일 아니네’ 이렇게 깨닫고 고뇌가 사라지면 법담이 되고, 저와 얘기하다가 화가 더 난다거나 스님이 자기 마음을 몰라줘서 미워진다거나 하면 법담이 아니라 속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대화할 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너무 자기주장만 하지도 말고요. 여기 와서 자기주장만 할 거면 뭣 때문에 저하고 대화를 합니까. 자기가 옳으면 옳은 대로 살면 되죠. 자기 식대로 했는데 안 되니까 다른 길이 있나 해서 저와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스님의 얘기가 얼토당토않는 소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저렇게도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런 관점을 갖고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이어서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현장에서도 두 명이 추가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내와의 갈등으로 1년째 별거 중이라며 아이들이 아빠가 부재한 상태로 자라도 괜찮은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내와의 갈등으로 1년째 별거 중입니다
“저는 1년째 아내와 별거 중입니다. 아내와의 별거보다 현재 상황에 놓여 있는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더 염려됩니다. 작년 2월, 아내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저와 더 이상 못 살겠다며 별거를 원했습니다. 제가 나가지 않으면 자기가 집을 나가겠다고 하다가 결국 아내가 집을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마음을 곧 돌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고, 아이들은 계속 침울해졌습니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사는 것을 원할 것 같았고, 또 제가 나와서 아이들이 아내와 지내도록 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얘기하고 제가 집을 나왔습니다. 이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부인의 의사를 물어보기 전에 질문자가 먼저 부인과 살고 싶은지 분명히 해야겠네요. 별거 하신 지 1년이 넘었으니 합의 이혼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었습니다. 그동안 따로 살아보니 질문자는 어떠신가요? 또, 부인은 어떤지 얘기를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두 분 다 지금이 좋다면 이혼하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질문자는 이혼하고 싶은데 부인이 싫다면 법원에 이혼 신청하고 진행하시면 됩니다. 법원에서 이혼하라고 판결이 나면 이혼하면 됩니다. 좀 더 노력해 보라고 판결이 나면 노력해 보다가 다시 이혼을 신청하면 됩니다.


우선 질문자가 어떤지 살펴보아야 해요. 부인과 갈등이 좀 있지만 극복하고 살겠다면 어떤 갈등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질문자의 책임이 크다면 극복할 각오를 해야 하고요. 지금 상황까지 이른 건 질문자가 부인에게 여러 번 약속했던 걸 지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이 살고 싶어. 좀 살펴보니까 나는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 같아. 이것 말고 더 있을까? 당신이 보기엔 어디가 문제야?’

이렇게 물어보는 거죠. 그래도 부인이 아무 이유 없이 질문자와 살기 싫다고 하면 부인은 이혼을 원하는 겁니다. 질문자도 동의할 수 있으면 이혼을 하면 됩니다. 그게 힘들면 별거를 좀 더 하면 됩니다. 이렇게 풀어가면 돼요.

하지만 질문자가 아내와 같이 살고 싶다면 질문자는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옳은지는 따질 수 없습니다. 부인과 살고 싶다면 을이 될 수밖에 없어요. 부인이 원하는 걸 수용해야 해요.


반대로 질문자는 이혼하고 싶은데 부인이 같이 살고 싶어 한다면 질문자가 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인에게 뭔가 요구를 할 수 있겠죠. 부부간에 해결되지 않으면 법원에서 제삼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부인은 이혼을 원하지만 질문자가 원하지 않으면 별거 상태를 좀 유지하면 됩니다. 일 년 뒤에 얘기해 보고, 안 되면 다시 일 년 뒤에 얘기해 보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인의 의사에 동의해서 이혼할 수도 있겠죠.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서로 이혼하기로 했다면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봐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는 이런 이유로 이혼하기로 했단다. 우리는 따로 살지만 너희들의 엄마와 아빠로는 협력해서 잘 지낼 거란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살면서 서로 싸우는 것보다 친구로 지내며 너희들을 돌보는 게 낫지 않겠니? 너희들은 어떠니?’

이렇게 물어보고 아이들이 동의하면 이혼하시면 됩니다. 아이들이 싫다고 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 별거 상태로 좀 기다렸다가 이혼하시면 되고요. 별거하되 이혼을 전제로 하는 거니까 서로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인과 같이 살고 싶다면 을이 되어야 합니다. 요구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면 안 돼요. 무조건 항복해야 합니다. 이혼하더라도 부인과 싸울 필요가 없어요. 한때 좋아서 만났고, 또 한때 좋아서 아이들을 낳아 키웠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요? 현재 아이들의 엄마와 아빠이기도 하고요.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혼하고 나서는 각자의 생활을 해야 하니 재산 분할은 합당하게 하면 됩니다. 아이들 양육은 공동으로 하되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보아서 한쪽이 둘 다 키우기로 했으면 다른 한쪽은 양육비를 지원하고요, 아니면 한 명씩 따로 키우실 수도 있고요. 이렇게 합의해 나가면 됩니다. 질문자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제가 좀 특이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건 모두 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디 가서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내는 오랜 시간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을 견뎌왔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수긍되는 면이 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제가 부인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저와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했고, 또 저와의 생활에서 어떤 안정적인 느낌이나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이런데 제가 원한다고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또 이혼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고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고 말씀드린 건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지금 그러시다면 부인의 뜻을 먼저 존중하는 게 필요해요.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건 같이 살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부인에게 먼저 당신과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대화해 보는 게 좋습니다. 내 의사를 밝혔다고 그걸 고집해도 안 되고요. 반대로 부인은 같이 살고 싶다는데 질문자가 싫더라도 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결혼이란 서로의 약속이니까요. 한쪽이 싫다고 일방적으로 끊을 수도 없고, 한쪽이 좋다고 일방적으로 유지할 수도 없어요. 둘 다 같이 살거나, 이혼하는 것에 동의하면 문제는 간단하죠. 하지만 서로 입장이 다르다면 타협이 필요하고, 서로 좀 기다려주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서로 조금씩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이런 관점으로 문제를 풀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귀촌을 생각하고 있는데 뱀이 무서워 시골살이가 걱정이 됩니다. 뱀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성적이 잘 나오질 않아서 학원에 가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는 저희 부부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떡하죠?

친정아버님이 코 줄을 꼈어요. 친정에 다녀오면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 계실 때 자주 찾아뵙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하기가 힘이 듭니다.

즉문즉설을 듣다 보면 '별 일 아니에요' 하고 말씀하실 때가 많은데, 스님은 어떤 일을 '별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이 좋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내 발로 다닐 수 있고, 내가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스스로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입니다.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됩니다. 항상 지금 여기에 만족할 줄 알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대강당에 모인 청중이 모두 빠져나가고 1층 로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스님의 사인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강연 듣고 제가 정말 행복해졌습니다!”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봉사자들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