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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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알면 삶이 보인다.

보현화 2007. 1. 22. 12:18

  


  1, 생각이 운명을 만든다.


 한 노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에겐 딸이 둘 있었는데, 이 딸들 때문에 그녀는 늘 울면서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큰딸은 우산 장사한테 시집을 갔고 작은딸은 국수집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입니다.

 이 노부인은 태양이 내리 비취면 큰딸이 걱정이 되어 울상을 짓습니다. “이거 큰일 났구나!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니 큰애 우산가게에 손님이 없을 텐데, 장사가 안 돼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꼬리를 물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심한 나머지 그만 울게 되는 것입니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녀는 또 작은딸 때문에 웁니다. “작은애는 국수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태양이 나오지 않으면 국수를 말릴 수 없으니 이를 어쩐담?” 이렇게 태양이 비취는 날은 큰 딸 때문에 울고, 비가 내리는 날은 국수를 파는 작은딸 때문에 우니, 맑은 날, 비오는 날 가릴 것 없이 그녀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이웃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사람들은 이 노부인을 ‘울보 할머니’라 불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우는지 물었습니다. 그녀가 자초 지중을 말하자 스님께서는 온화하게 웃으시며 합장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께 해탈 법문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날마다 울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울보 할머니’는 이 말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어떤 방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께서 한 생각만 바꾸시면 되지요, 가령 태양이 높이 솟아 날씨가 좋은 날은 큰딸이 우산을 팔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마시고, 작은 딸네 국수 가게를 생각하세요, ‘아! 햇빛이 이렇게 좋으니 작은애가 국수를 잘 말릴 수 있어 장사가 잘 되겠구나’ 하구요. 또 비가 오는 날에는 큰 딸네 우산가게를 생각하세요, ‘아! 비가 오네, 큰애가 우산을 팔 수 있으니 장사가 잘 되겠구나,’ 하구요.”

 노부인은 이 말을 듣자 크게 깨달아 스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기쁨으로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되어 ‘울보 할머니’에서 ‘미소 할머니’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걱정되는 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울보 할머니처럼 한 생각만 바꾸면, 번뇌나 괴로움을 행복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무슨 대단한 신통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이해하기만 하면 우매함이 총명함으로, 어리석음이 깨달음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체 고락은 절대적 존재가 없으나 다만 우리의 관념(觀念)과 생각이 분별을 일으킬 뿐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받아들일 때, 일반적인 생각을 바꾸어, 즉 겉으로 드러난 이름으로부터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궁구해 들어가 반야광명(般若光明)을 열고, 보리(菩提)의 종자를 뿌리게 되면 삼매(三昧)법의 물줄기가 우리의 심전(心田)으로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저가 아는 불자님과 그 친구 분이 부부끼리 천주봉 등산을 하다가, 천주봉을 오르는 등산로엔 밧줄이 세 곳에 매워져 있는데, 차례로 잡고 오르다 같이 온 부부가 잡고 오를 때 그만 밧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큰일 날 뻔했습니다. 험한 바위를 타고 오르도록 하여 매달아 둔 것이라 참으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저가 아는 그 불자님은 산을 오르기 전에 부처님 전에 예배(禮拜)를 올린 덕(德)에 부처님이 도우셔서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여, 더욱 부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밧줄이 끊어져 구른 부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아주 운이 없고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상황이 서로 바뀌었다면 아마 반대의 입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어쨌거나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운이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가 사고를 당한 분께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평소에 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잘 믿었고, 또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나 봅니다. 그랬기에 당신의 공덕으로 다른 어떤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 이였다면 분명 그 사람은 많이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생명의 위험까지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는 아주 험한 장소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좀 놀라기는 했지만 아무 사고도 없이 무사할 수 있었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참으로 운이 없고 재수가 없는 분 이였다고 한다면 그렇게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은 아주 운이 좋고 재수가 좋은 분이고, 오늘은 또 그런 날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여기 오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이 믿는 하느님과 내가 믿는 부처님만이 아는 일이니까요!,

 자, 어떻습니까?, 저의 말이 틀렸습니까?,”

 그러자 그 분은 그 때 까지 생각했던 생각을 바꾸어 명랑하고 밝은 마음이 되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오늘 저희가 만약에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스스로 운이 없고 재수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 오랫동안 우울하고 침울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오늘 여기 등산을 와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은 스님을 만나 참으로 귀중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같이 천주봉 등산을 하자고한 친구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요!,”



 인연을 알고 인연(因緣)에 수순(隨順)하여 맡겨서 자기를 비우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고 편해집니다. 모든 일이 그저 생기거나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맙니다. 어떤 형태로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사라져야할 것 또한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 진리이고 법칙입니다.

 불교를 접해 본 사람이라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시 보리수나무 아래 금강좌(金剛座)에 앉으셔서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성이 빤짝 허공에 획을 그으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는 인생(人生)의 진리(眞理)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또 무엇일까요?,

 바로 인연(因緣)이고 연기(緣起)입니다.

 우리가 인연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수용(受用)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부처님과 똑 같이 이 유루세간(有漏世間)의 일체 고통을 버릴 수 있습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法)은 인연(因緣)에 의해 생(生)겨나고 인연(因緣)에 의해 멸(滅)해진다.’ 고 하셨습니다. 인연이라 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경과 사랑, 경쟁과 각축, 선린과  적대 등..., 모든 상황과 사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연을 이해할 때 세간(世間) 중생들의 운명(運命)의 부침(浮沈)을 깨닫게 됩니다. 온갖 세간 생명이 연(緣)에 의해 생(生)기고 멸(滅)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단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인연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2, 인연의 네 가지


 첫째, 무인무연(無因無緣), 즉 인(因)이 없으니 연(緣)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간의 모든 것은 암암리에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져 있어서 우연(偶然)이나 신(神)의 뜻에 의해 또는 숙명(宿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인과(因果) 관계(關係)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돌에서는 기름을 짜낼 수 없지만 만약 기름을 짜낼 수 있는 경우 그들은 석유층의 구성과 형성원인은 탐색해 보지도 않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또 어린아이가 너무 지나치게 많이 먹어 탈이 나도 포식의 화인(禍因)은 살피지 아니하고 그저 “운명이로구나! 운명이야!” 하며 탄식할 뿐이며, 강도가 물건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여도 그 피해자 가족들은 이렇게 된 것을 그저 숙명(宿命)으로 돌릴 뿐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신(神)의 뜻으로 돌리는 사람들, 그들은 일체의 모든 것은 신(神)이 분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세(現世)에서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가치의식을 부정합니다. 또한 일체의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다는 자아의식을 부정합니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개인의 노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모든 것을 운명(運命)으로 돌리는 것은 외도(外徒)이지, 올바른 인연론(因緣論)이 아닙니다.

 둘째는 무인유연(無因有緣), 즉 인(因)은 없고 연(緣)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과거에 의한 인연과보(因緣果報)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 모든 것은 현실적인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 졌으나 다만 동풍(東風)이 불지 않을 뿐이다.’(즉,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 졌는데 오직 한 가지 조건만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어떤 자식은 분심을 내어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을 하였으나, 어떤 자식은 분심도 내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며 장래성도 없다고 한다면, 이런 경우 그가 운이 나쁘고 기회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같은 선생님이 길러낸 학생들 중에서 어떤 학생은 성적이 좋고 어떤 학생은 성적이 나쁩니다. 성적이 나쁜 것을 단지 그 학생의 노력 부족으로만 돌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과 총명함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과 총명함은 ‘인(因)’인 것이요, 그 학생의 노력은 ‘연(緣)’인 것입니다.


 셋째는 유인무연(有因無緣)입니다.

 즉 인(因)만 있고 연(緣)은 없다고 하는 견해(見解)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因)과 연(緣)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 합니다. 가령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경우, 인(因)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연(緣)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불법(佛法)의 인연생멸(因緣生滅)의 오묘(奧妙)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예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젊어서 취직을 하러 회사에 갔더니, 회사 측에서 나이 든 사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몇 년 뒤에 다시 갔더니 회사에서는 오히려 젊은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어떤 회사에 갔더니 기혼자를 원했습니다. 서둘러 약혼과 결혼을 하고 갔더니 이제는 미혼자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사한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인(因)과 연(緣)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인(因)이 있다고 반드시 연(緣)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연(緣)이 있다고 반드시 인(因)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여깁니다.

 이는 인연(因緣)은 한 번 정해지면 결코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속에서 수시(隨時)로 변하면서 생멸(生滅)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은 항상 함이 없이 끊임없이 변함이라,’

 시생멸법(是生滅法)이니, ‘이는 모두 생멸하는 법 때문이다.’ 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연이 맞아야 이루어지고 인연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반대로 인연이 다 하면 허물어지고, 인연이 없고서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선인(善因) 선과(善果)요, 악인(惡人) 악과(惡果)라, 선에는 선과(善果)가 따르고 악에는 악과(惡果)가 따른다.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인(因)이 씨앗이라면 연(緣)은 조건(條件)입니다. 인(因)은 조건(緣)을 부르고 조건(緣)은 인(因)을 기다립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인연은 모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결코 불교의 올바른 인연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인연과보(因緣果報)는 고리처럼 서로 맞물려 있고 또한 상생(相生)하면서 서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일체 모든 것에는 인(因)이 있으면 반드시 연(緣)이 있다고 봅니다.


 넷째는 유인유연(有因有緣)입니다.

 즉 인(因)이 있으면 연(緣)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체법(一体法)은 모두 인연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성리(性理)와 사상(事相),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막론하고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모름지기 인연의 화합(和合)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능엄경소(楞嚴經疏)에 이르기를, ‘성인의 가르침은 얕은 것에서 부터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법을 말씀하시되 결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집을 짓기 우해서는 기와. 목재. 시멘트... 등, 등, 많은 조건이 결합해야만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우리가 손님들을 초대하고자 할 때에도 역시 몇 가지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즉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두터운가? 상대편을 초청할 경우 그가 곤란해 하지는 않는가? 때와 장소가 적절한가?...... 등등 여러 가지 인연이 갖추어져야만 원만하게 치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초대한 사람들 중 반만 오고 나머지 반이 아직 도착하질 않았습니다. 요리사가 주인에게 먼저 음식을 내올까요? 하고 묻자 부자는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와야 할 귀빈들이 오지를 않자 부자는 몹시 초조해져서 원망스런 말투로 내뱉었습니다.

 “에이! 난생 처음으로 손님을 초대했는데 와야 할 사람은 안 오고 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만 왔구먼!”

 탁자에 둘러 앉아 있던 손님들은 이 말을 듣자 몹시 계면쩍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주인이 결코 진심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로구나, 주인이 달갑지 않은 표시를 한 이상, 여기에 눌러 앉아 있으면 뭐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손님들은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거북해져서 한 사람씩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부자는 손님들 중 많은 사람이 가버린 것을 알고 다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습니다.

 “에이! 모처럼 처음 손님들을 청했는데 가야할 사람은 안 가고 가지 말아야 할 사람만 가버렸군!”

 주인이 말을 마치자, 가버리기가 좀 미안해서 그때까지 꾹 참고 눌러 앉아 있던 손님들도 한 사람씩 노기 띤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일체의 모든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인연을 깨뜨리면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기가 어렵습니다.

 ‘인(因: 원인)이 있으면 연(緣: 조건)이 있기 마련이니, 반드시 과(果: 결과)를 성취한다.’ 고 하는 것이 올바른 인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먹고 생각하는 것이 씨앗(因)이 되어 조건(緣)을 만들고 불러 과(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운명을 만든다.’ 고 하는 이 사실에 진실한 동의(同意)를 할 때 비로소 불교에 조금 가까이 다가서고 있음이 확인됨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