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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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한국/104분/개봉 2012.9.6

보현화 2012. 9. 21. 23:49

피에타 (2012Pieta

 

 

 

피에타 관련 책정보 보기

피에타 피에타
타이틀곡
피에타 (Pieta)음악듣기
아티스트
박인영
발매일자
2012-09-10
 
  • 저자 ,김기덕 (각본)황라현
  • 출판사 가연
  • 출간일 201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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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
드라마 | 한국 | 104 분 | 개봉 2012-09-06 |
홈페이지
국내 pieta.kr/
제작/배급
김기덕필름(제작), NEW(배급)
감독
김기덕
출연
조민수 (미선 역), 이정진 (강도 역), 우기홍 (훈철 역), 강은진 (훈철부인 역), 조재룡 (계송 역)  출연 더보기
 
 
김기덕 감독 열 여덟번째 영화.
<나쁜 남자> 이후 11년... 더 나쁜 남자가 온다!


상상 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는 남자 강도(이정진)
어느 날, 악마같은 이 남자에게 ‘엄마’라는 여자(조민수)가 찾아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에게 빠져버린 그.
그러나 여자가 사라지고, 그와 그녀 사이의 잔인한 비밀이 드러나는데…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두 남녀.
신이시여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


PIETA IS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란 뜻으로 미켈란젤로, 고흐 등 세계의 수 백 명의 예술가에 의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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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김기덕, 진화인가 퇴보인가
김기덕의 신작 [피에타]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정식 개봉작으로는 [비몽]2008 이후 4년 만의 영화다. 과연 '돌아온 김기덕'의 영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초심으로의 회귀인가, 또 다른 진보인가. [피에타]는 그것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점이다.

※ 이 글은 [피에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김기덕 감독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는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제목의 의미를 무색하게 할 만큼 죽음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휠체어에 앉은 한 남자가 목매달아 자살하고 이어지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은 강도(이정진)다. 강도는 그에게 사채 수금 일을 시키는 사장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 백정"이고, 자신이 엄마라며 찾아오는 여자(조민수)에 의하면 "돈으로 인간을 시험하는 악마"다.

강도는 철거를 앞둔 청계천 세운상가의 텅 빈 골목을 마치 저승사자처럼 돌아다닌다. 그가 돈을 받아내는 방법은 극도로 악독하다. 그는 채무자의 손목을 자르거나 다리를 불구로 만들고, 그 결과로 받아낸 보험금으로 빚을 갚게 한다. 강도가 보는 앞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죽음의 이미지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화에는 마치 상징처럼 끊임없이 육식이 등장하며, 강도는 닭을 사다가 직접 도살하기도 한다. 강도는 영화 후반부에 시체를 매장하고, 자신도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피에타]는, 황량한 살풍경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죽음의 맞은편에는 이 영화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고 표현하는 '돈',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있다. 이것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어떤 징후처럼 드러나는 테마다. 이 테마의 배경은 2008년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이른바 '위기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순간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출산율은 점점 내려가고 자살률은 점점 올라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생명의 위기'다. 이런 현실을 영화가 반영하는 방식 중 하나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 부쩍 늘어난 사채업자나 채권 추심원이나 폭력적인 해결사 같은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영화의 갈등 구조를 만들고 폭력을 조장하며 주인공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기도 하고 범죄와의 연결고리가 된다.

'김기덕의 작가 영화'라는 수식어 이전에, [피에타]도 이런 현실적 맥락 위에 서 있다. 이 영화는 세운상가라는 몰락의 공간 속에 서식하는 도시 빈민들과 그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하수인' 강도의 이야기다('강도'는 캐릭터의 이름을 넘어, 몇 달 만에 원금의 열 배에 가까운 돈을 가져가는 '강도'(强盜)인 셈이다).

[피에타], 죄와 속죄의 드라마

[피에타]는 죽음과 돈에 관한 영화다. 감독 자신이 프로덕션 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피에타]는 "극단적인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며 "돈이라는 것에 의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불신과 증오와 살의가 어떻게 인간을 훼손하고 파괴하며 결국 잔인하고 슬픈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여기서 김기덕 감독은 흥미롭게도 '모성'을 끌어들인다. [수취인 불명](2001)에서 애증의 대상 정도로 등장했을 뿐, 김기덕의 영화에서 '모성'은 조금 낯선 테마다. [비몽](2008) 이후 3년의 공백을 가졌던 그의 영화 세계가 조금은 변했다면, 그리고 그 흔적을 [피에타]에서 찾아야 한다면 바로 '모성'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황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되돌리며 결국은 돌아가야 할 유일한 대상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어머니를 가져보지 못했던 강도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비로소 영혼의 온기를 되찾기 때문이다. 강도에게 어머니는 점점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첫 만남에서는 여자가 강도 앞에 무릎 꿇었지만, 나중에는 강도가 그녀 앞에서 무릎 꿇게 된다. 강도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소리치며, 급기야 어머니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런 면에서 [피에타]는 '죄'와 '속죄'에 대한 영화다. 그것은 강도가 거쳐 가는 여정의 반복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강도는 청계천 세운상가의 공업사를 돌며 잔인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낸다. 후반부에서 그 경로를 반복하는 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휠체어에 앉아 있으며 누군가는 불구가 되어 아내에 기대어 살아간다. 후반부에 반복하는 경로는 표면적으로는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과정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보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돈으로 가려졌던 눈을 떠 진실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머니는 강도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영화 첫 장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구(이원장)라는 젊은이의 엄마였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강도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가짜 어머니 행세를 했다(강도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강도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강도에게 진짜 엄마가 되어준다. 원한의 관계를 연민의 관계로 바꾼 셈이다. 그리고 오히려 강도를 위해 복수해 준다. 그녀는 강도를 하수인으로 부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온 장 사장(손종학)을 타깃으로 삼는데, 이것은 개인적 복수처럼 보이지만 냉혹한 자본가(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응징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김기덕의 영화 세계는 어떻게 변화했나

1996년 [악어]로 데뷔한 김기덕 감독은 [비몽](2008)까지 13년 동안 열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며 숨 가쁘게 달려온 '다산성의 아티스트'였다. 한국 사회의 시스템 밖에서 성장한 그는 힘겹게 영화계로 들어왔고, 들어온 후에도 자신만의 제작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결국 그는 해외 영화제와 외국 시장의 지지를 통해 마치 역수입되듯 한국 시장으로 재진입한 희귀한 감독이 되었다.

쉽진 않았지만 굳건히 길을 걷던 그는 4년 전 멈춰 섰다. [아리랑](2011)에서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비몽] 현장에서 있었던 아찔했던 사건과 후배 감독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영화를 너무 찍고 싶다고, 영화를 찍어야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리랑]을 내놓았고, [아리랑]과 짝을 이룬 [아멘](2011)이 이어졌다. 그리고 [피에타]는 [비몽] 이후 4년 만에 정식 개봉하는 영화다.

30대 중반부터 빠르게 달려온 김기덕 감독은 40대 후반에서 50대로 넘어가는 3년의 기간 동안 휴식과 사색과 고뇌의 시간을 가졌고 새롭게 시작했다. [악어]로 시작했던 그의 필모그래피는 거친 추상화 같았던 영화에서 [숨](2010)이나 [비몽] 같은 몽환적 세계로 건너갔고, 다시 출발한 그의 영화는 초심으로 돌아간 듯 또 다시 거칠어졌다([악어]에서 악어(조재현)가 시체를 건져내던 한강은, [피에타]에서 강도가 수금하러 다니는 청계천 세운상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것을 일종의 '김기덕 리부트'라고 본다면 달라진 점은, 그러니까 그의 영화적 중심이 이동한 지점은, 그가 새롭게 빠져든 테마는 '종교적 세계'가 아닐까 싶다. 한풀이와도 같았으며 번뇌에 찼으며 한국 영화라는 십자가를 진 순교자로서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겼던 [아리랑]에 이어, 한 여인의 로드 무비를 통해 시련을 이야기했던 [아멘]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피에타]까지,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바세계를 건너고 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에게 종교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거나 구원을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평론가인 안드레아 벨라비타가 지적한 것처럼 "죄와 속죄의 변증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교리적인 차원이 아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여전히 깨어지기 쉽고, 불안하며, 고통스러운 피조물이다. 과거의 영화에서 그 원인이 인간의 본성 때문이었다면, [피에타]에서는 하나를 덧붙인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식할 때, 그 인간은 진실해지지만 그 죄만큼 약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김기덕 감독은 '모성에 의한 무조건적 구원' 같은 무책임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모성의 완성은 구원이 아니라 죽음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의)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긴 마리아처럼 여자는 두 아들(마치 카인과 아벨 같은)을 모두 품고 죽음을 선택하고, [피에타]의 강도는 속죄 받기 위해 쓸쓸한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인 키리에가 흐르는 마지막 신은, 김기덕 감독의 엔딩 중 가장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 뉴스 글_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  | 무비위크 | 2012.09.10 16:55:04

 


http://bbs.movie.daum.net/gaia/do/movie/detail/read?articleId=211303&bbsId=review1&searchKey=meta&searchValue=1:69714&nil_id=text&t__nil_TotalReview_total=netizenReview 

 

 

용서와 자비-피에타(Pietà)는, 진정한 구원의 방식

 

 

작성자 : 고양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발췌함

 

 

기자님의 질문 : 영화에는 닭이나 토끼 등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인가 ?

 

 

김기덕 감독님의 말씀 :  \'피에타\'의 캐릭터가 닭, 토끼, 물고기 같은 것을 도살해서 먹는 캐릭터다. 죽이고 싶은 심리가 몸 안에 가득찬 캐릭터의 이미지다. 그 장면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강도\'의 결말을 미리 예고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다음\' 영화 사이트에서 \'고양이\'라는 분이 쓴 리뷰를 봤는데 정말 잘 썼더라. \'피에타\'를 내가 생각한 것과 가장 가깝게 해석한 것 같았다.

 

 

 

- 김기덕 감독님, 제 어리석은 글을 이렇게 공식석상에서 언급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 부탁드리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ㅜㅠㅜㅠㅜㅠㅜㅠㅜ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밤에, 눈물 흘리는 고양이 올림)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하찮은 제 글에, 많은 분들이 관심과 애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봅시다 !!

 

 

 

 

프롤로그

 

 

 

자본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 왔다. 돈이라는 사탄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을 짐승처럼 굴복시키고 타자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인간의 구원은 어려워 보인다. 스스로 현대라는 지옥을 만든, 인간의 구원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물질 앞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자본 앞에 인간은, 나약한 괴물이다.

 

 

 

자본이 파괴하는 인간성

 

 

 

강도는, 이러한 짐승의 상징이다. 그는 닭을 제대로 익혀 먹지도 않고, 날 것처럼 먹어대는 짐승이다. 타인의 고통은 필요 없다. 타인의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강도에게 공격을 당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가족의 테두리 안에 괴로워한다. 어떤 이는 사랑스런 아내가 있고, 어떤 이는 뱃속의 아이가 있고, 어떤 이는 늙고 병든 엄마가 있다. 모두, 가족 안에 있다. 하지만 강도에겐 이러한 가족이 없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이나, 타인의 가족이 안고 살아야 할 슬픔을 알지 못한다. 자본은 그의 노예인 인간들을, 이처럼 파괴자로 만들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그랬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 한국 사회가 그렇다. 돈을 위해선, 돈을 벌기 위해선, 타인의 삶 따윈 무시해도 그만인 것이다. 극소수의 부르주아가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가지고, 다수의 민중을 지배하고 조롱하며, 마치 날 것을 탐하는 짐승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작품 속의 배경인, 화려한 빌딩과 철거 직전의 청계천 상가의 대비가 그러한 것을 상징한다. 커다랗고 위엄 있어 보이는 쭉쭉 뻗은 빌딩 숲 사이, 마치 유폐된 섬처럼, 청계천 상가는 우울한 잿빛으로 그렇게 포위되어 있다. 자본을 가진 지배자가, 자본이 없는 피지배자를 사방에서 억누르듯이, 서울이라는 한 공간에 서로 다른 국경을 가진 이질적인 공간적 이미지가 화면 안에 가득히 흐른다. 청계천의 상가 노동자들을 그렇게 포위하고 공격하는 것은, 자본의 앞잡이이자 자본의 개인, 강도이다. 강도는 어쩌면 그래서 더욱 불쌍하고 가엾어 보이기도 한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자신도 같은 하층민이면서, 자본의 칼을 들고 서민들을 공격한다.

 

 

 

인의 삶에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나

 

 

 

그러던 중, 강도에게도 가족이 찾아온다. 엄마라고 자칭하는 여자. 강도는 처음에는 그녀를 매몰차게 거부하지만, 차차 그녀를 엄마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야수의 탈을 벗어 던지고 사람의 아들이 된다. 자신이 그토록 공격했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엄마의 존재를 통해 자신도 느끼게 된다. 엄마가 누군가에게 공격당하는 전화기 너머의 소리에, 강도는 울부짖으며 괴로워한다. 자신도 지켜야 할 가족이 생기면서,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가족에 관심을 갖게 된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두 손을 훼손하겠다는 젊은 노동자를 이해하게 되고, 한평생 청계천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의 최후를 안타깝게 목도한다. 그들 모두에게 가족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슬픔이 절실했음을 강도는 엄마의 존재를 통해 공감하는 것이다. 점점 짐승이 인간으로 성숙한다. 엄마라는 모성의 힘을 통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엄마라는 가족의 존재로 그는 순결해지고, 아이처럼 선량해진다.

 

 

 

진정한 복수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 이 작품만의 독특한 복수가 있다. 박찬욱 식의 형이하학적이고 직접적인 복수가 아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구원’의 복수가 있다. 박찬욱은 칼로 찌르고 자르면서 직접적인 공격형 복수의 완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완성한다. 어쩌면 가장 설득력 있고 인과성이 분명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복수는 너무나 역설적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에게, 직접적 타격이 아닌, 종교적 회개와 인간의 ‘양심’을 갖게 한다. 원수에게 ‘양심’과 ‘마음’을 갖게 함으로써, 그 원수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짐승에서 인간으로 변모하게끔 한 것이다. 그 원수가 진정으로 괴로워함으로써, 복수가 완성되게 하는 것이다. 낡은 건물 위에 위태롭게 올라선 엄마와, 그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 하듯 엎드려서 회개하는 강도의 대비적 모습은 그야말로 이 작품의 압권이다.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우리 엄마만은 살려 주세요... !!’ 이 애절한 절규가,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었다. 여자의 복수는, 원수가 ‘양심’을 갖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진정으로 괴로워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 강도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구원’ 받았다. 이것이 바로, 자비 - 피에타(Pietà)이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용서와 구원이, 어쩌면 감독이 바라는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유일한 돌파구와 해결책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소재의 상징성

 

 

 

이 작품에는 동물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처음의 붉은 닭의 이미지는, 길들여지지 않은 강도의 야성을 상징한다. 실제 그 닭을 대충 삶아서 먹는 강도의 모습에서, 야성의 극한의 모습이 보여 진다. 화장실 바닥에 가득한 닭의 피 흥건한 내장의 이미지도 그러한 강도의 짐승을 상징한다. 두 번째로 토끼의 이미지가 나온다. 자살한 노동자의 어머니에게서 가져온, 토끼는 강도의 화장실에 방치되어 있다. 엄마는 그러한 토끼를 풀어주고, 급기야 집 밖으로 내보내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토끼는 이내 아스팔트 위에서 차에 치여 숨을 거둔다. 이것은 어쩌면 강도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강도도 엄마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 엄마가 토끼를 새로운 삶을 위해 풀어주었듯이, 엄마를 만난 강도도 새 삶을 살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마치 토끼가 아스팔트에서 피 흘려 죽듯이, 강도도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질질 차에 매달려 끌려가며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에 의해 새 삶을 찾았지만, 결코 아스팔트 같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은 그들을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강도는 살이 찢겨 가며, 아스팔트에서 자신의 피를 쏟아내고 있다. 물론 이 장면은, 모든 것을 회개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고행으로 몰아넣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세상에 자비를 구하는 강도의 수도승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마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처럼, 아스팔트 위에 붉게 물드는 새벽의 핏빛은 숭고하게 묘사되며 영화의 결말과 여운을 장식한다. 그런 면에서 앞부분의 토끼의 이미지와 죽음이 더욱 공교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장어의 이미지가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사온 장어를 강도는 죽이지 않고 어항 속에서 살게 해준다. 그것은 엄마가 자신에게 준, 첫 선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대상이기에, 강도는 어항 속의 장어를 기념품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는 그 장어의 목을 치며, 아침상을 마련한다. 강도는 그래서, 그 장어구이를 먹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엄마는 그러한 강도를 떠나보내며, 매정하게 장어를 씹어 먹는다. 여기에서 이미, 이 엄마의 정체가 어느 정도 암시된다고 볼 수 있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장어를 그렇게 요리하고 먹음으로써 엄마라는 여자는 강도의 자그마한 행복을 짓밟고 있던 것이다.

 

동물만이 아니라, 소나무의 소재도 상징적이다. 물가에 심어진 소나무, 강도는 이 나무가 잘 자랄지 의문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는 강도를 안심 시킨다. 이 소나무는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은 존재이다. 부모가 걱정하며, 아무 탈 없이 자라주기 바라는 자식 같은 존재. 엄마는 이 물가의 소나무가 잘 자랄 거라고 웃으며 확신한다. 엄마가 떠난 뒤, 강도가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강도는 힘들고 외롭지만 물가의 소나무처럼 꿋꿋이 인생을 살아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엄마가 뜨개질로 만들던 그 스웨터도 상징적이다. 그 스웨터는, 당연히 엄마의 사랑을 뜻한다. 엄마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 아들에게 입히려 한다. 강도는 왜 자기 생일날 케이크만 있고, 옷은 없냐고 묻는다. 엄마의 사랑을 입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에 엄마를 묻어주기 위해 땅을 팠을 때, 그때 거기에서 스웨터를 입은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강도는 그 스웨터를 시체에서 벗겨내 자신이 직접 입는다. 이 엄마라는 여자가 자신의 진짜 엄마이든 아니든, 이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스웨터를 입은 강도는 엄마와 그 시체 옆에 나란히 누워 교감하고, 스웨터를 입고 서서 소나무에 물을 준다. 또한 마지막에 강도는 스웨터를 입고 차에 질질 끌려가며, 수도승의 고행의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의 사랑을 입고, 자신과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솔직히, 나의 하찮은 글로 이 위대한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랴. 여운과 감동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횡설수설 지껄였지만, 이 작품을 보았다는 기념과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마음에서 글을 쓴 것이다. 평가를 할 만한 자격이, 나에겐 없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의 관객들과 평론가들 모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영화는 한국의 영화 산업과 관객이 아닌, 전적으로 감독 자신의 힘과 외국 평단과 관객의 힘으로 탄생되었고 유지되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길을 걷지 않는다고, 얼마나 우리는 그를 매도하고 이방인과 아웃사이더로 내몰았지 않았나. 나도 또한 과거의 작품들 - 악어, 섬, 수취인불명, 파란대문 등 - 을 보고, 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의 새작품을 매도하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솔직히, 그의 최고 작품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 을 보고 굉장히 매혹되었음에도, 그의 그 이후 작품들을 초기작들의 불편한 이미지들 때문에 외면하고 경시했으니 말이다. 베를린의 사마리아와 베니스의 빈집을 왠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다. 그의 작품을 이렇게 개봉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의 때를 조금이나마 씻고, 구원받고자 한다. 나에게도 이 작품은 용서와 자비 - 피에타(Pietà)인 셈이다.

 

 

 

** 김기덕 감독님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 당신은 한국 영화의 구원이자, 자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