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요, 이상하게도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요. 내가 ‘스님이다’ ‘원성이다’ 하는 것을 잃어버릴 만큼요. 보여지는 풍경과 인도인의 삶 속에 그냥 스며들어간다고 할까요. 뭐라 말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 대자유의 느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얼마전, 어머니인 금강스님과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원성스님. 인도에서 있었던 26일간의 여정과 이야기들을 꿈결처럼 풀어놓는 그의 모습이 마치 그가 그려온 그림 속의 동자승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 풍경>과 <거울>이라는 2권의 책으로 동자승의 순수한 이야기를 세간에 알린 원성스님이 이번에는 인도 여행 중에 찍은 사진과 여행담을 엮어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엮은 이 책에는 인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만난 자신의 모습, 가난하지만 행복한 인도인의 모습,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심과 모정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풍경>과 <거울>에서 어린 동자승의 마음을 그리도 사무치게 했던 어머니. 끝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그 어머니와 함께 만행을 떠난 이야기들이란 머릿속에 그려만 보아도 흐뭇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몇년 전부터 금강스님께서 인도에 가고 싶어하셨어요. 평생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리며 살아왔는데, 생전에 부처님 성지에 가보지 않는 것은 제자 된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연세가 있어 기력이 안 좋은데 혼자 보내드릴 수도 없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패키지여행을 보내드릴까도 생각해봤는데 빡빡한 일정에 맞춰 다니시려면 쉽게 지치고 힘들어하실 것 같았죠. 느낌이나 감동이 있을 때 머물러서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나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모시고 가기로 했죠.”
부처님의 제자로서 두 스님이, 두 모자가 떠난 인도여행은 시작부터가 남달랐다.
“우선, 녹차를 가져가 녹야원에서 녹차를 마시고, 룸비니동산에는 한국의 꽃씨들을 가져가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2인용 다기도 준비하고,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해바라기 붓꽃 창포… 10가지도 넘는 꽃씨를 샀어요. 또, 어머니 사진도 많이 찍어드리고 싶어 카메라도 사고, 필름도 50통이나 준비했죠. 이를테면 추억 만들기를 계획한 거예요(웃음). 그런데, 금강스님께선 더 어마어마한 것을 준비하셨더라고요.”
쌀 두말에 전기밥솥, 배추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깻잎, 콩자반…. 아이들과 걸인들에게 나눠줄 커다란 사탕 2봉지를 제외하면 금강스님이 준비한 것은 무게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아연실색하는 원성스님에게 금강스님은 “부처님의 나라에까지 갔는데, 한국의 스님으로서 한국쌀로 밥을 지어 공양을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길 했다고 한다.
“저는 미치지 못한 신심에서 준비하신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어머니의 마음이 따뜻하게만 느껴졌죠. ‘너무 잘 생각하셨다’고 말씀드리고 모두 들고 갔어요. 정말 엄청나게 무거웠지만요(웃음).”
이렇게 시작된 인도여행은 두 스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감동과 성찰과 깨달음의 순간을 안겨주었다.
바라나시를 지나며 만난 깨달음의 순간들
“바라나시에서 화장터로 가는 길목에, 시체 한 구가 누워있었어요. 언뜻 봐선 잠자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어머니 스님께서 확인해보라는 거예요. 망설여지긴 했지만, 다가가서 손을 대보니 죽어있는 거예요. 길에서, 아무도 묻어주지 않고, 울어주지도 않는 임종을 맞이했을 시신을 보니 인생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몽환포영’이라는 금강경 구절처럼, 인생은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정말 그랬어요. 영원하지 않은 허망한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죠. 삶을 돌이켜 볼 줄 아는 자세는 비단 수행자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건만, 두 스님이 길을 가다 맞닥뜨린 죽음은 삶에 대한 강한 무상함을 일깨우게 했다. 인도는 그런 곳이었다. 길가에서도, 강가에서도 존재의 ‘상’마저도 없어져버리는 곳. 특히 신비의 강 갠지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러했다. ‘나’라는 존재마저 인식할 수 없이 공허하고, 텅 빈 느낌이지만 그 속에서 투명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는 곳. 너무나 자유롭고, 우주적인 고요함 속에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삼매의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제가 숨쉬고 있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고, 뜨거운 햇살을 맞고있는 찰나 속에 그냥 자연이 돼버린 기분이었죠. 이런 경험은 스님들이 참선을 할 때나, 절을 할 때나, 염불을 할 때에도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긴 해요. 가령, 이른 새벽에 예불을 할 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별과 내가 그대로 하나가 돼버린 것 같은 삼매의 순간을 잠시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 경험들을 밝은 대낮에, 강물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도였죠.”
인도의 풍광들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깨움이 절로 일어나게 했던 건 바로 인도사람들이다. 특히 인도의 아이들은 바라볼 때마다 동자승의 순수함 이상으로 투명한 영혼을 느끼게 했다.
“인도의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에 비해 눈의 깊이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요. 가난 속에 살면서 가난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자연의 흐름을 바라보고, 그렇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수도자의 눈빛과도 같죠. 그렇지만 제가 조금만 얘길 하고 장난치면 금세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또 그렇게 맑을 수가 없어요. 가난속에서 이토록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인지….”
원성스님이 만난 많은 아이들 중에서 ‘옥수수 소년’은 ‘이심전심’의 마음이었는지는 몰라도 ‘참 효자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아이였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숯불에 부채질을 해가며 옥수수를 구워 팔던 소년은 인도말로 장난스럽게 “옥수수 하나 드시고 가세요, 드시고 가세요” 소리치는 듯했다. 그 모습에서 스님은 ‘분명, 저 아이는 부모님이 농사지은 옥수수를 가지고 나와 동생들과 부모님을 위해 장사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예전에 금강스님께서 잘 배운 자식들 치고 명절 때 귤 한 봉지 사들고 부모님 찾아가는 자식을 못봤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되레 못 배우고,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자식들이 때 되면 부모님 찾아뵐 줄도 알고, 효도할 줄도 안다고. 어린 나이에 남들처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길에 나와 옥수수를 팔고 있지만 분명 그 아이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있는 아이였을 거예요.”
자식들 뒷바라지 다하고, 흐트러짐 없이 한길만 가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워
여러 아이들을 만나고, 바라볼 때마다 교차하는 감정이 모두 달랐다는 게 원성스님의 고백이다. 특히 책제목으로 사용한 ‘시선’이라는 글에 나오는 아이는 스님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이 마치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나의 예쁜 모습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매섭기도 했지만 맞은편에서 사진을 찍고있는 스님의 모습까지 투영될 정도로 정말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고.
여행의 고단함도 잊고, 바랑을 베개삼아 잠든 모습이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쉼 없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 부처님의 성지 곳곳에서 눈물을 떨구던 모습…. 책 속에는 이러한 금강스님의 모습이 등장한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금강스님은 별다른 포즈를 취하진 않았지만, 아들 앞이기에 자유로웠고, 기꺼이 모델이 돼주기도 했다.
< 시선>이 출간되고, 많은 사람들은 원성스님이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인도 여행을 갈 때 카메라 장비도 제법 챙겨갔을 것이라고 생각들 한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사진을 찍은 것으로, 단 2시간 동안 카메라 작동법만 배워갔다고 한다.
“사진은 기술보다는 뭘 담고 싶은지, 어떻게 바라보는지 ‘시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전문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제 사진은 내세울 것이 못되지만 사람들에게 제가 담은 인도의 모습과 느낌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사진들이 잘 나와줬어요. 처음엔 좋은 사진들을 간추려 어머니께 기념앨범을 만들어드릴 생각이었는데, 그보단 여행 중간중간에 기록했던 글이랑 느낌들을 함께 적어서 책으로 엮어드리면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람들에게 제가 경험한 인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더욱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랑스러운 제 어머니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스님이기 이전에 아들로서 어머니를 향한 효심에서 만들어진 책 <시선>. 이미 세번을 읽고, 네번째 읽고 있다는 금강스님은 딱히 말은 안해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며 내심 행복해하는 눈치라고 한다.
“금강스님은 제가 힘들고 지쳐 쉬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제 자신을 채찍질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정신적인 스승이세요. 또 물질적인 유혹, 이성적인 유혹, 어떤 쾌락적인 유혹을 끊을 수 있는 칼이 되어주시고, 행여 제가 딴 길로 나가지 못하게끔 지켜봐 주시는 관조자이기도 하세요. 저를 늘 그렇게 지켜봐 주시는 눈빛이 제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스님으로서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지 스캔들 하나 없는 것을 보세요(웃음).”
이런 어머니와 함께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만행에서 두 스님은 참으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특히 1만여명의 스님들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는 나란다대학. 이교도들한테 불제자라서 방어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그 순간의 스님들을 생각하면 같은 스님으로서 더욱 가슴이 아파 기도를 올리면서도 너무 안타까워 금강스님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정사에 갔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다음날 일정도 미루고 하루 더 머물러 있기도 했다고 한다.
“기원정사에는 부처님께서 기거하신 방이 있어요. 그 방에서 기도를 하는데, 마치 제가 앉아있는 자리 옆에 부처님께서 앉아계신 것 같았어요. 너무도 긴 세월을 초월해서 그 순간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수많은 세월을 거슬러 무슨 인연으로 어머니와 함께 출가해서 지금 이곳까지 와서, 부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지…. 도저히 경을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어머니와 얼마나 울었는지, 울다가 지쳐 힘없이 숙소로 돌아왔어요.”
인도는 기후나 환경이 다르고, 장소간 이동거리가 길어 젊은 사람들에게조차 적응하기 힘든 여행지다. 그러니 연로하신 금강스님이 여행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을 법도 한데, 우려와 달리 고생한 쪽은 되레 원성스님이었다고 한다.
“속병이 생겨 설사가 일어났는데, 그 와중에도 아이들을 촬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스님께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인도사람들을 붙잡고 약국이 어디 있냐며 헤매고 다니시는 거예요. 제가 찾아서 사먹겠다고, 구경이나 하고 계시라고 했는데도 계속 이 사람 붙들고, 저 사람 붙들고 물어보시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달려가서 스님 모시고 직접 약국을 찾아서 약을 사먹은 일이 있어요.”
어머니와 함께 한 인도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곳은 룸비니동산을 가기 위해 네팔국경으로 가는 길목. 덜컹거리며 달리는 야간버스 안에서 원성스님은 금강스님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며, 이런저런 얘기도 해드리고, ‘오빠생각’이란 노래도 불렀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길가엔 반딧불이 반짝이고, 어딘가에선 이름 모를 꽃향기가 창가로 스며들어와 정말 꿈결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금강스님이 “원성이는 나 죽고 나면 인도에 온 게 생각나서 눈물나겠어” 하시더란다. 어머니가 당장 떠날 것만 같은 느낌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는 스님은 ‘지금 이렇게 어머니와 여기에 와있다는 사실이 더 눈물이 난다’고 대답을 했다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사진 찍는 일들은 모두 포교를 위한 일일 뿐
미아리고개에 위치한 대불정사. 원성스님에게 부탁한 원고와 사진을 받기 위해 다시 스님을 뵙기로 한 날, 스님은 약속도 까맣게 잊고 작업에 열중한 듯, 손가락이며 옷자락 여기저기에 먹물을 묻히고 있었다. 10월 중순에 있을 전시회 준비로 그러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현수막을 그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제가 원래 날밤새기 선수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날밤을 새요. 요 며칠 동안 현수막을 밤새워가며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도 3일 동안은 더 밤을 새워야 목표한 20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체 20장이나 되는 현수막들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물으니 스님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북한산 살리기 운동’ 이야기를 꺼냈다. 현수막은 그 운동의 일환으로 있을 ‘3보1배(세 걸음 후 한번 절하는 것)’ 봉행 때 사용할 것이라는 것.
“세개의 산을 동시에 뚫는다는 거예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을 말예요. 어제는 불암산 쪽으로 가서 하루종일 저지운동을 하고 왔어요. 산은 스승이기도 하고, 어머니기도 하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숨통이기도 한데, 어쩌자고 그렇게 마구 파헤치려는지…. 반대운동이 곳곳에서 일고있지만 아직도 시민들의 인식과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요. 현재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있어 벌거숭이가 된 모습들을 보면 너무 속상해요. 산을 마구 뚫어서 도로를 만든다는 건, 바로 우리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어요.”
몇년 전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는 스님. 직접 나서서 활동하기는 올해가 처음이지만,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도심의 환경파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피부로 느낀 건 오래 전부터였다고. 그래서 더욱 환경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제 좌우명이,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자’예요. 그래서 병적일 정도로 잠시도 쉬지 않으려고 해요. 예불하고, 청소하고, 쓸고, 닦고, 그리고 정 할 일이 없을 때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 포장이라도 해요. 가령, 염주를 꿰서 포장을 한뒤 선물로 보내기도 하고요, 오늘 새벽에는 제 주위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기도 했어요.”
올 10월에 있을 전시회를 위해, 밀린 숙제하듯 구상해둔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는 스님은 요즘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까지 병행하고 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고, 음악회를 열기도 했고, 현재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모두 포교를 위한 거예요. 전 단지 열심히 포교하는 부처님 제자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억지스럽지 않고, 편하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꼭 그림만을 고집하고 싶진 않아요.”
옛날, 원효스님이 저잣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이야기를 한 것은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가깝고, 친근한 최고의 포교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이 시대의 대중들을 쉽게 잡아끌 수 있는 매체이고, 시대를 따라갈 수 있는 포교의 한 방법이라는 게 원성스님의 이야기다.
스님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불교영화는 번뇌 속에서 살거나, 아니면 번뇌하다가 쫓겨나는 극적인 상황만을 보여줄 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에 대해서는 표현하질 못했다고 지적한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사회인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절 이야기는 절에서 직접 살아온 스님들이 더 잘 알지 않겠냐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절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들, 친근감 있는 산속의 풍경들을 언젠가는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영화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갖고있던 차에 마침 유혁주 감독을 만났고,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됐죠.”
현재 집필하고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묻자 원성스님은 절집에서 일어나는 스님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로 총 90여명의 스님들이 출연할 예정이며, 내용의 50% 정도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일 정도라는 것만 귀띔한다. 인도 이야기만큼이나 따뜻하고, 인간적인 산사 이야기를 책이 아닌,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는 스님의 바람도 조만간 이뤄질 것 같다.
스님의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스님이 그린 동자승은 티셔츠와 공책과 책받침과 컵 등의 캐릭터 상품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에 대해 스님은 역시 “자연스러운 포교의 방법이 될 수 있어 관계자가 찾아왔을 때 흔쾌히 응했다”고 한다.
“티셔츠나 공책, 책받침, 조그만 자에 제 그림이 들어가 아이들이 동자승의 모습을 접함으로써 친근한 눈빛으로 스님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포교가 아니겠어요. 전, 제 그림을 고고하게 지키거나 예술적으로 격상시켜 주가를 높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동안 그려온 스님의 그림이나 이번에 출간한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스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 어디선가 고아원을 설립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어 묻자 처음엔 “계획 단계에 있을 뿐”이라고 말을 아끼더니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함께 살아갈 수십명의 자식들이 눈에 밟히는 듯, 이내 계획을 실토하고 만다.
“금강스님께서 예전에 절을 운영하셨던 자리가 있어요. 제가 아이들을 기르고 싶다는 얘길하니까 선뜻 그 땅에 지으라고 하셨어요. 실은 어릴 때부터 고아원을 지어, 보육사업을 하는 게 꿈이었거든요. 복지법인으로 새로 건물을 올릴 터인데, 나중엔 나라에 귀속되는 것이니, 금강스님의 큰 보시인 셈이죠. 5년 이내에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그려왔던 그림 속의 동자들을 이젠, 실재에서 만나 따뜻하고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게 원성스님의 바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