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대학생 시국회의 등 단체 회원들과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모인 약 100만명의 시민, 청년학생들이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대통령 하야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민심이 들끓고 있다. 전국에서 촛불이 불타오르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90세 노인까지 “이래선 안 된다”며 추위가 엄습한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요지부동이던 정권은 국민의 분노에 하나 둘 권력을 내려놓고 있다. 국민의 힘으로 역사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사는 국민 스스로 이뤄낸 민주주의 발전의 흔적이 역력하다. 때로는 환호가 때로는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절망하기도 했다.
국정농단과 권력위의 권력.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국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주최측 추산으로 약 100만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전,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정부 퇴진’,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4.19혁명과 6월 항쟁 등 국민 스스로가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새 시대를 열었던 상황과 유사하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분노할 만한 권력형 비리가 존재했고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국가와 국민이 서로 소통하지 못했고 권력자들은 국민을 기만했다. 이에 보다 못한 국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엄중한 역사가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현 정권의 움직임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개헌론 카드와 불통 총리 지명 등 얄팍한 술수로 정국을 돌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검찰에 소환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조사를 받는 사진이 공개되거나 구속된 최순실의 벗겨진 신발이 70만원짜리 명품이었다는 등 국민을 자극하는 내용만 계속되면서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성공한 혁명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채 정부의 계엄령에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 희생이 추후 민주화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당시엔 감당할 수 없는 고통만을 남긴 안타까운 사건으로 남은 게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에도 수많은 시위와 민주화의 노력이 있었지만 크나큰 공권력의 힘 앞에 국민들의 열망이 처참히 무너졌다.
국민의 승리
성공한 첫 민주화 시위는 ‘4.19혁명’이다. 국민들이 분연히 일어서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도화선은 3.15부정선거였다. 1960년 3월15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두 달 앞둔 1월경 자유당 후보 이승만의 대항마였던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됐다.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시 됐지만 부통령 후보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승만 세력은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을 앞세운 선거 운동망을 조직하거나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 투표를 조작했다. 또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고 자유당 정권은 이를 하향조정 발표해 이승만 963만표(85%), 이기붕 833만표(73%)로 당선된 것으로 조작했다. 이에 마산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故김주열 학생이 실종, 한 달 후인 4월10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앞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4월19일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하고 평화행진을 벌였는데 정부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이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 ‘4.18 고려대 학생 피습사건’이 발생한다.
정부의 부정선거, 김주열 학생의 죽음, 시위 세력의 과잉진압 등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4월19일 중·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재선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무시한 채 계엄령을 선포했고 학생들과 경찰, 군인이 대치하며 수많은 희생자를 내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더 크게 번져갔고 4월25일 대학교수들까지 시국선언을 하면서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후 8월18일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민중의 힘으로 이뤄낸 첫 번째 혁명이자 국민의 힘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6월 항쟁
그로부터 27년 후인 1987년 6월 국민들은 다시 한번 민중의 힘을 발휘했다.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의 신군부 시대를 처단하고 직선제로의 개헌을 이끌어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6월 민주항쟁의 발단과 과정도 4.19혁명과 비슷하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도덕성과 정통성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또 야당과 재야 세력을 중심으로 간선제 아닌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주의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에 신한민주당이 1986년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하면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됐고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했다.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이듬해인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잇따른 희생으로 국민들의 요구는 거세졌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전두환은 1987년 4월13일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여야가 헌법안에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지만 야당 때문에 합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선제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국민의 요구와는 정반대 행보에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5월18일 박종철씨가 정부의 고문과 폭행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이후 국민들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1987년 6월10일에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다. 하루 전인 6월9일 연세대학교 학생 1000여명이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부의 과잉진압 등 국민들 분노를 부추기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같은 달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의 인원인 100만명 이상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4·13호헌조치를 철회하고 29일에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이 나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두 번째 혁명이었다.
평행이론
2016년 11월 대한민국이 마주한 상황도 앞서 언급한 두 차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박종철·이현열 열사의 희생으로 6월 항쟁이 발발했듯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이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민심을 자극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5년 11월 ‘1차 민중총궐기’ 시위에 참여했던 농민 백남기씨가 버스에 묶인 밧줄을 잡아당기던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백씨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지난 9월25일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가 됐지만 백씨의 사망진단서에 나온 사인은 물대포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신부전증 등 병사로 나타나면서 논란은 다시 불붙었다. 시민들은 주말마다 청계광장 등에 모여 故백남기 농민 영결식과 촛불집회를 열어 정부의 공권력 남용에 대해 규탄했다.
이 상황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처음엔 단순한 권력형 비리로만 생각했던 최순실 사태는 파도파도 끝이 없는 게이트로 번지면서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최순실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설립해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데 청와대 고위 관료와 대통령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최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플릿PC가 발견되면서 비선실세 논란으로 번져갔다.
태플릿PC에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과 군사 기밀 등 수많은 기밀자료가 담겨있었고 이를 최씨가 수정, 지시했다는 증거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절대 남용돼선 안 되는 권력이 비선을 통해 수년째 흘러들어갔고 심지어 최씨의 주변에 호스트바 출신의 남성들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적나라하게 밝혀지게 됐다.
끝없는 의혹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지난 5일 광화문 광장은 수십만개의 촛불과 민심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박근혜 정부의 행보 역시 과거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박 대통령은 1차 대국민사과를 발표했지만 2분도 채 되지 않는 녹화방송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했다. 이어 4일 울먹이는 목소리로 2차 대국민사과를 발표했지만 제대로 된 해법이 부재하다는 등 논란을 잠재우긴 부족했다.
4.19혁명과 지금의 상황은 유사한 점이 많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기 직전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듯 7일 서울대 교수 700여명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즉각 국정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나섰다. 세월호 사건 때 200여명,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당시 400명에 육박하는 교수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700명이 넘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해 “엄중한 헌정 위기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박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헌정 질서를 수호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단순한 비리와 부정부패에 물든 정도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마저 유린하고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1943∼1960) 열사의 장례식이 50년 만에 범국민장으로 2010년 4월11일 오전 경남 마산시 마산중앙부두에서 엄수된 가운데 용마고 학생들과 상여꾼들이 꽃상여와 만장을 들고 3ㆍ15의거기념탑까지 운구행렬이 진행되고 있다. |
국민의 희생
역사적으로 성공한 혁명도 있지만 국민의 열망과 목소리를 처참히 짓밟고 유린한 정권과 대통령도 있다. 1979년 유신체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각종 시국사건에 대해 강압적으로 반정부 인사들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이에 야당과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해 10월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에는 5000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유신타도’ 등을 외치며 도청, 방송국, 경찰서 등을 공격하며 마산과 창원 일대까지 시위가 확산됐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해 500명이 넘는 시민들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국민들의 기본권을 철저히 짓밟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도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던 사건이다. 1980년 5월15일 전국의 학생연대가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이자 전두환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18일 비상계엄군은 전남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과 충돌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돼 갔다. 이후 27일까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2만5000명 이상의 군 병력이 투입되면서 1000명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국민의 시위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신군부의 탄압과 무자비한 공세에 진압돼버린 것이다.
양승함 전 연세대 정치학 교수는 “정부가 국민에 대한 탄압과 횡포를 해서는 안 된다”며 “민주화를 이끌어 온 것은 민중들의 힘이었다. 이러한 시민운동이 없었다면 권력자들의 실정은 계속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천인공노할 사건 앞에 국민들의 적절한 분노 표출이 필요하다”며 “앞으로 대통령은 2선으로 물러나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 다음 대선까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고 제안했다.
신상언 기자 unshin3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