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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져/유재철 연화회 대표

보현화 2017. 12. 23. 11:41

 대통령 3명 염한 '무념무상'의 손

박돈규 기자 입력 2017.12.23. 03:02 수정 2017.12.23. 08:21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대한민국 전통명장.. '대통령 염장이'유재철 연화회 대표

죽음이 축복이 될수도 있어
다들 자기는 안 죽을 것처럼 살아..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져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죽음 의식하면 하루하루가 소중
"삼베 수의·완장은 日帝 잔재.. 상주는 꼭 자식이 안 해도 돼"
사업 실패 후 장례 일 배워
고마워하는 유족들 보면 이런 대접 받는 일
또 있을까 싶어 직업 선택 잘했다 생각
3000여명 염해드려
관·수의 쓰지 말라해 법정스님 다비식 애먹어
대나무 평상으로 운구
염할 때 참여하세요
얼굴 보고 만져드리고 아무말 하지 마세요
수의에 눈물 떨구면 무거워서 못 떠납니다
유재철 연화회 대표가 서울 누하동 사무실에서 마네킹을 대상으로 염습을 해보이고 있다. 그는 전직 대통령 4명의 장례를 모셔 ‘대통령 염장이’로 불린다. 유 대표는 “죽음은 당하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라며 “삶을 돌아보면서 죽으면 유산은 어떻게 할지, 의료 행위는 어디까지 허용할지, 화장할지 매장할지 등을 적어놓는 ‘엔딩 노트’ 작성을 권한다”고 했다. 뒤에 보이는 액자는 지혜를 상징하며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생사를 뛰어넘으라는 교훈을 담은 금강경이다. / 오종찬 기자

사무실 전화번호 뒷자리가 '4444'였다. 남들은 한사코 피할 죽을 사(死)를 그는 붙잡고 있다. 염습(殮襲)이 직업이라서다.

유재철(58) 연화회 대표는 '대통령 염장이'라 불린다. 2006년 고(故) 최규하부터 2009년 노무현,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를 직접 모셨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國葬) 진행도 맡았다. 2010년 법정 스님을 비롯해 큰스님들의 다비도 대부분 이 염장이 손을 거쳤다.

지난 18일 서울 누하동에서 만난 유 대표는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진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은 안 죽을 것처럼 살지요. 그런데 스티브 잡스(애플 전 CEO)를 보세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할 것인가' 매일 자문했습니다. 기자도 원고 마감시간이 있지요? 끝이 있어야 뭐라도 나오잖아요. 죽음은 그래서 축복일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걸 의식하면 하루하루가 소중해져요."

대통령 '마지막 길'을 닦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운구병 행렬 오른편에 유재철 대표가 서 있다. / 연합뉴스

누구나 죽으면 장의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종교와는 무관하다. 그에게 '마지막 목욕'을 맡기고 수의로 갈아입고 관 속에 눕는다. 하지만 산 채로 염장이 손을 만지려니 좀 께름칙했다. 용기를 냈다.

―손이 차네요.

"그런가요? 사람들은 부드럽다고 해요. 저는 11월부터 3월 초까지는 외출할 때 장갑을 낍니다. 알코올 묻힌 솜을 하도 만져서 손가락 끝이 걸핏하면 갈라져요. 요즘엔 염할 때 특수약품을 써서 좀 나아졌습니다."

―손이 재산 목록 1호군요.

"제 몸에서 가장 소중하죠. 상처가 나면 염을 못 하니까요."

―생명이 없는 육체 앞에 설 때 어떤 마음인가요.

"무념무상입니다. 이 일 시작한 초기에 어린 애들 두고 떠난 50대 남자를 모시고 돌아온 날, 그분 얼굴이 자꾸 보였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죠. 이런 경우를 당했다고 하니 어느 스님이 '이눔아, 너 무슨 마음으로 염했냐?' 묻길래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했다' 답했어요. '나쁜 짓 했으면 지옥 가고 좋은 짓 했으면 극락 가는데 니가 마음에서 놓질 않아서 영혼이 떠나지 못한다' 꾸짖으셨지요. 그 뒤로는 정성껏 염만 하지, 장례 치르고 나면 바로 잊어요."

―3일장은 어떤 절차를 밟는지요.

"첫째 날 수시(收屍)를 합니다. 숨지고 몸이 경직되기 전, 보통 3시간 안에 시신을 바르게 펴는 거죠. 칠성판에 종이 끈으로 묶어드립니다. 둘째 날 목욕시키고 수의 입히고 관에 모시는 게 바로 염습이에요. 염(殮)이 '묶는다', 습(襲)이 '목욕시키고 갈아입힌다'는 뜻인데 시간은 40~45분쯤 걸립니다. 셋째 날 발인하고요."

―대통령들이 왜 한 사람만 찾나요?

"1990년대 중반부터 큰스님들 다비를 많이 했어요. '한국 단체장(團體葬)'으로 동국대 석사논문을 쓸 때 행자부 의전팀을 만났는데,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 자료만 받았지요. 그런데 2006년에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겁니다. 한때 나라를 책임지신 분이 별세했으니 돕고 싶어 찾아간 게 시작이었어요. 제가 또 중요무형문화재 111호 사직대제 이수자예요.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탤런트 여운계씨를 염하다가 연락을 받았어요.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달려갔죠."

―가보니 어떻던가요.

"피투성이더라고요. 정맥에서 피를 빼고 동맥으로 특수약품을 집어넣으면 부패를 막을 수 있어요.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추락사한 분들은 그렇게 복원해 드립니다. 가족들이 얼굴을 봐야 하니까. 봉하마을로 가기 전에 수습을 하고 임시 관에 모셨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에도 호출을 받았나요?

"장례협회와 상조회사 등 다섯 군데가 맡았는데 모두 저한테 연락해 왔어요. 경험 있는 사람이 끼어야 한다는 겁니다. 염은 천주교 교인들이 하고 저는 국회의사당에 고인 모실 곳과 조문받을 곳, 영결식장을 만들어드렸습니다."

사업 실패 후 장의사로

유 대표는 최근 '대한민국 전통명장'(장례1호)에 선정됐다.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받은 사람만 전국에 2만명이다. 그는 "밥 먹고 살려다 이 직업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염장이가 꿈은 아니었군요.

"그럴 리가요. 재수해서 79학번인데 전문대 기계과 졸업하고 스물일곱 살에 창업했어요. 아파트 창틀 설치, 방화문 제작 같은 걸 하다 죄다 들어먹었죠. 100일쯤 집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냈어요. 사람이 좌절해 무기력해지면 걷잡을 수 없더라고요. 어머니가 개운사에 기도하러 다니셨는데 거기 따라간 게 첫 외출이었어요."

―절에서 기운을 얻었나요.

"친구나 후배 때문에 사업이 망한 줄 알고 원망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소양도 없이 뛰어든 제 잘못이었습니다. 그때부턴 중학생들 필독서도 팔고 컴퓨터 학원도 운영하고 했는데 재미를 못 보다, 전라도 광주에서 열린 불교청년대회에 갔다가 장례업 하는 친구들을 만났죠. 실의에 빠졌다 살아난 게 불교 덕이라서 그 일에 끌렸습니다."

―시신 만지는 게 두렵지 않았나요?

"집안이 경기도 광주에서 400년 살았는데 어릴 적부터 상제례에 참여했어요.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아버지가 저더러 '머리 잡고 있어라' 해서 잡아드렸지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장례업 하는 청년들 사귀며 시신 닦고 염하며 매장·화장 쫓아다니면서 배웠어요. 또 3년간 지방의 고수들을 찾아다녔죠. 관을 묶는 방법만 전국에 15가지가 있는데 경기도는 21매듭, 경상도는 7매듭을 지어요. 염하고 수의 입히는 방식도 지역마다 다릅니다."

―관을 빼고 시신만 매장하는 곳도 있나요?

"그걸 '탈관'이라고 해요. 제 고향도 그렇고 충주 청주 안동 등 내륙 지방은 과거에 대체로 그렇게 했습니다. 시신만 베로 싸서 모신 거죠. 공원묘지 생기면서 따로 관을 처리해야 하는데 산불 위험 때문에 소각을 막으면서 15년쯤 전부터는 관째 묻고요."

―장의사 개업은 언제 했는지요.

"1994년 10월 24일. 1024라는 숫자가 '장의사'예요(웃음)."

―주변에서 뜯어말리지 않던가요?

"친구·선후배 가릴 것 없이 난리가 났어요. '멀쩡한 사람이 딸 시집은 어떻게 보낼 거냐'면서요. 이젠 청첩도 안 들어오지만 저는 결혼식에 거의 안 가요. 뭐가 잘못되면 제 탓을 할 테니까요."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지요.

"오늘 눈이 내렸잖아요. 빗자루로 사무실 앞을 쓸었어요. 안 해본 사람은 눈을 피해 다니기만 하죠. 염하고 유족들 눈동자 보면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할머니는 제 손 꼭 잡고 '나도 자네 손으로 해줘. 우리 언니 이쁘게 작별하게 도와줘서 고마워'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직업 선택 잘했다 싶죠. 염이 재미있어요. 며칠 안 하면 허전하고 병이 납니다."

한국 장례 문화는 엉터리

유재철 대표와 스님들이 2010년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 스님을 운구하고 있다. / 유재철 제공

유 대표는 '한국 국가장'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다시 한다면 더 일찍 이 공부를 시작해야죠. 쉰 살 넘어 박사 학위 따느라 고생하지 말고"라며 웃었다.

―염해드린 분이 얼마나 될까요.

"3000여 분쯤이요. 윤달에는 산소 개장(改葬)을 400~500개씩 하고 그랬어요. 전국 다비의 3분의 2는 저희가 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되나요.

"그때그때 달라요. 적으면 100만원이고 수금을 가장 많이 한 기업인 장례가 8500만원이었습니다."

―특별히 어려웠던 장례는요?

"법정 스님이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고 승복 입은 상태로 다비하라'는 말씀을 받드느라 애먹었습니다. 순천 송광사에서 15도 경사로 30분쯤 걸어 올라가야 다비장이 나오는데 팔다리를 그냥 잡고 갈 순 없잖아요. 스님이 오대산에 은거할 때 낮잠 주무시고 책도 읽고 했던 대나무 평상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거기 모셔서 대소변 치우고 몸 닦고 입었던 옷 그대로 입혀서 운구했습니다."

―대통령 장례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지요.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후 운구 장면. 유 대표가 건의해 운구병이 마스크를 벗었다. / 이덕훈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 만장(輓章) 사건입니다. 사나흘 안에 2000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글은 누가 쓰며 대나무는 어디서 구합니까. 서예 하는 분들 수소문하고 담양군청에 대나무 요청하고 동대문시장엔 비상을 걸었어요. 간신히 만들었더니 행안부에서 대나무를 PVC로 바꾸라는 겁니다. 죽창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겠지요."

―장례 문화 중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나요?

"완장과 삼베 수의가 대표적이죠. 완장은 일제(日帝)의 잔재입니다. 시위로 번질까 봐 조선총독부가 강요했어요. 출토 복식을 공부해 보니 색동저고리, 비단도 나와요. 삼베는 죄인들이나 입던 건데 일본이 비단·명주 약탈해가면서 문화를 바꿨습니다. 이맹희 전 CJ 명예회장 모실 때는 그분이 원해서 평소 좋아했던 양복을 입혔어요. 예법에 어긋나는 게 아녜요. 대통령 장례식은 그릇된 풍토를 바꿀 기회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 땐 김현철씨 설득해 상주가 완장 대신 리본을 달았습니다. 운구병들 마스크도 벗겼지요. 또 상주는 꼭 자식이 안 해도 돼요. 최진실·조성민씨 자살 때 어린 아이들을 세웠잖아요. 트라우마로 남을 겁니다."

―과거의 5일장과 요즘 3일장은 어떻게 다릅니까.

"5일장을 지낼 땐 첫날엔 고인을 그대로 뒀어요. 깨어나실 수도 있다 생각한 거죠. 둘째 날 칠성판 만들고 셋째 날 염을 하고 그제야 부고를 알렸습니다. 닷새째 나가는 거죠. 가족끼리 슬픔을 삭일 시간을 준 겁니다. 요즘 3일장은 너무 급하고 상업적이에요."

―직업병이나 습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따님 결혼식 땐 어떡하실 건가요?

"결혼식장과 초상집엔 안 가요. 재수 없다는 뒷말이 나와요. 제 딸 결혼식은 피할 수 없지요. 요새는 신랑·신부 동시입장도 많더라고요(웃음)."

"귀가 가장 늦게 닫혀요"

얼마 전 암 말기 선고를 받은 일본의 한 기업 CEO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건강할 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생전 장례식'을 열었다. 유 대표는 "일본은 그런 경우가 꽤 있는데 다양성이 부럽다"고 했다.

―국내에선 전무한가요?

"'나 죽으면 제일 예쁜 옷 입고 와야 해. 절대 울고 짜고 하지 마. 음악은 경쾌한 걸로 틀었으면 좋겠어' 했던 한국 미용계 대모(代母) 그레이스 리(이경자) 말고는 기억이 안 나네요."

―연명치료는 어떻게 보시나요.

"본인이 삶에 대한 의지가 있고 생각을 할 때라야 사람으로 존재하지, 기계에 의지해 죽음을 지연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마지막 인사할 때 유족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염할 때 참여하시라고 권합니다. 마지막엔 얼굴 보고 만져 드리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나아요. 울음은 전염됩니다. 고인 수의에 눈물 떨구는 거 아녜요. 그럼 무거워서 못 떠납니다. 귀가 제일 나중에 닫히니까."

―무슨 뜻인가요?

"1996년에 말기 암 환자 두 분을 염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부자였고 한 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부자는 인상을 쓰고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표정이 맑았습니다. 알고 보니 돌아가신 뒤에 유족이 좋은 말만 하고 염불도 들려 드렸대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터득한 철학도 있는지요.

"오늘 하루도 잘 살아야겠다, 이거죠 뭐. 인생무상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스스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죠. 제 손으로 복되게 모시니 위대한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언젠가 꼭 염해드리고 싶은 사람, 반대로 거절하고 싶은 사람도 있는지요.

"부모님은 제 손으로 모셔야죠. 누구라고 말은 못 해도 권력자 중의 한 분은 손대고 싶지 않아요."

―대통령 염장이가 세상 떠날 땐 누가 염해주길 바라나요?

"막연하지만… 제자들이 해주겠지요."

이튿날 유 대표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밤새 화두처럼 그 질문에 시달렸다고 했다. 20년 전 곱게 떠난 팔순 할머니 한 분이 떠올랐다며 이렇게 적었다. "마흔 살에 사별하고 2남 1녀 여법하게 키우셨는데 떠나실 땐 일주일간 곡기 끊으시고 가셨어요. 염을 해드리는데 대소변도 없이 너무 깔끔하셨지요. 지금 같으면 그대로 관에 모실 텐데. 본인이 임종(臨終), 끝을 맞이하며 스스로 염습도 다 하신 겁니다. 그 할머니같이 가고 싶네요. 제일 좋아하는 옷 입고 누우면 후손이 관 뚜껑은 닫아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