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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자" 치매 엄마와 보낸 10년

보현화 2018. 2. 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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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자" 치매 엄마와 보낸 10년

이치열 기자 입력 2018.01.31. 09:46 수정 2018.01.31. 11:18        


[인터뷰]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펴낸 하윤재 영화감독


[미디어오늘 이치열 기자]

‘스마트폰을 단 10분만 손에서 내려놓고 옆에 있는 엄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엄마의 하루 컨디션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을 조금 더 들여 지켜보면 엄마가 내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거기에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121~2p 하윤재 판미동>

단편영화 ‘봄날의 약속’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제 첫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하윤재(45) 영화감독. 그가 치매에 걸린 엄마(82)와 함께 보내온 지난 10여년의 이야기를 풀어 놓은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를 읽다보면 때로는 가슴 저리지만 의외로 유쾌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구절이 더 많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 멀리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가에, 허리 굽은 노모를 부축하며 마실 나온 딸이 보인다.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이규태 작가가 그린 파스텔톤의 표지를 넘기면 묵직한 다음 글귀와 마주하게 된다.


‘치매환자의 기억은 시간, 장소, 인물 순으로 소멸된다. 시간 상실의 1기, 장소 상실의 2기, 인물 상실의 3기, 즉 말기. 1기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엄마의 기억은 어느새 말기에 다다랐다. 자신의 삶을 하나둘 잊어가는 모습을 보며 엄마를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세상에서 나와 가장 오랜 인연인 엄마에게 바친다.’ 

그는 기대수명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우리에게 ‘치매’라는 병과, 치매 환자 가족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난 수요일 서울 광화문 한 프랑스식 찻집에서 하 작가를 만났다. 

▲ 사진=판미동

40대 중반의 비혼인 하 작가는 2007년 함께 살던 엄마가 맛있게 만들던 나물무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상을 감지했다. 이후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했고, 치매 초기진단을 받은 후 10년 동안 치매 진행을 최대한 늦추는 치료와 돌봄을 해오고 있다. 하 작가는 치매국가책임제와 요양보호제도가 많이 개선되어 치매환자 가족들이 사회 생활을 유지하며 환자를 돌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본인의 경험과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 어머니 근황은 어떤지. 

“혈관에 이상이 생겨서 오는 알츠하이머 치매(3등급)로 10년 전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시간 관념이 흐려지는 1기였는데 지금은 3기 초기(인물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예요. 우리나라 치매환자의 70%가 알츠하이머 치매고 파킨슨병은 상대적으로 적어요. 

평생 살던 방배동 집을 팔고 지금은 아버지의 고향인 하동에 새 집을 지었어요. 아버지와 둘이 내려가 계시는데 식사 후 30분 이상 햇볕을 쬐며 산책을 시켜달라고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께 권유합니다. 약간의 언덕이 있고 조금은 숨이 찰 정도까지 엄마를 걷게 할 수 있는 집 주변 산책 코스를 정해드렸어요. 어머니는 힘들다고 하시지만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중간에 쉬더라도 그 언덕을 많이 걸으라고 말씀드려요. 식사를 잘하고 40분 운동 갔다 오면 오전에 흐릿하던 눈빛이 또렷해지는 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노망’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면서 불치병으로 생각하고 환자 가족들이 손 놓고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실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악화를 늦추면서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병이 치매이며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쉽게 요양병원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가족이 돌보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요. 어머니는 현재 너무 잘 지내고 계셔요.”

- 하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왔나요.  

“5남매중 막내딸로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첫째, 둘째 언니오빠에 비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힘든 걸 모르고 자랐어요. 장난끼가 많은 아이였고 자라서 꿈은 만화가게 사장님이었지만, 졸업장은 따고 뭘 하던지 하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대학에 가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죠. 하지만 이내 대학에 실망하고 왜 인생을 다 똑같이 살아야 되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대학교때 별명이 ‘신문지’였어요. 수업은 잘 안 들어가고 도서관 앞에서 신문 깔고 누워있다가 친구들 기다리면서 신문 하나 다 읽고. 수업 끝나고 나오는 친구들이랑 밥 먹고 영화 보러 가곤 했어요.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4년 다니다가 꼭 해보고 싶었던 영화판에 기획팀 막내로 뛰어들었어요. 주변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직접 감독으로 나서 찍은 단편 ‘봄날의 약속(2009)’이 프랑스 끌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초청을 받은 후 첫 장편을 3년 동안 준비하다가 엎어지는 힘든 시기도 겪었구요.

 요즘 함께 광고회사 다니던 친구들 만나면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으며 가정을 꾸리고 차를 갖고 있고 내게 밥을 사지만, 얘기 나누다 보면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나인 것 같더라구요.”

-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다이어리와 시나리오를 쓰던 A4지에 엄마를 돌보는 얘기를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가까이 지내던 안귀여루 교수님이 우연히 그 글들을 보고 이 글의 목적이 뭐냐고 묻길래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거다’라고 했더니 출판을 권유했어요. 다 완성될 무렵 웬만한 큰 출판사들에는 모두 이메일로 돌렸어요. 대부분은 ‘기획팀에서는 출판가치는 있다고 하는데 유통쪽에서 돈이 안된다고 반대를 했다’는 답이 왔죠. 유일하게 판미동(장미 대리)에서 책을 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들은 이 책이 단기적으로 많이 팔릴 책은 아니지만 길게 보면, 읽은 사람이 주변에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얘기했어요. 삽화를 그린 유명 일러스트 이규태 작가도 처음엔 너무 무거운 주제라며 작업 맡기를 주저했는데 판미동에서 원고를 읽어보길 권유했고 그 후 수락했다고 해요. 이규태 작가는 ‘이 책은 치매 얘기라기보다 딸과 엄마에 관한 얘기’라고 했다네요. ”

▲ 하윤재 작가. 사진=판미동
하윤재 작가. 사진=판미동" width="533">

- 책이 나오고 나서 인상깊었던 독자의 반응이 있었는지. 

“출판 후 지난해 12월 19일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반차를 내고 올라온 22살의 물리치료사 여성이 있었어요. 엄마가 6년전인 47세때 조기치매에 걸렸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도 우울증 증세가 있어 가족부양을 해야만 했던 사연이었는데 다행히 그는 너무 밝고 건강했어요.  제가 요양병원 자원봉사도 여러 군데 가봤지만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어요. 그는 제 책을 보고 희망을 찾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위한 조언을  얻고자 왔다고 했어요. 질문이 길어져 긴 내용을 다 대답해 줄 수 없어서 2주 전에 다시 서울에서 만났어요. 얘기해보니 제가 아는 범위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죠. 그는 치매 등급이나 요양보험제도, 치매국가책임제도 등에 관해 잘 모르고 있었거든요.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 이런 만남이 의미가 있어요.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왔으니 내가 좋아하는 이태리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사줬는데 ‘이런 좋은 스테이크 처음 먹어본다’는 말에 울컥했어요. 저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살아왔는데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그를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 어머니의 치매선고 후 부인, 분노, 타협, 수용 단계를 거치는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5개월 쯤 걸렸던 거 같아요. 중증 치매를 겪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봤던 경험이 있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요.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치매의 과격한 부분만 보여주니까 많은 치매환자 보호자들이 그런 것부터 떠올려요. 그런데 겨울에 치매 초기 판정을 받았는데 여름이 됐는데도 어머니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어요. 혼자 시골(하동)에도 다녀오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내가 혼자서 너무 심각하게 반응했던 게 아닌가 반성도 했죠.” 

- 엄마가 식사와 약을 거부할 때 등 어려운 순간은 어떻게 견뎠나요. 

“제가 엄마의 치매에 대처하는 자세는 ‘단순하게 생각하기’에요. 어렸을 때 장난기가 많아 책에 쓴 것처럼 부모님 속 많이 썩였거든요.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어머니께 기저귀를 채워드리는데 기저귀 안 간다고 고집피우실 때면 ‘내가 어렸을 때 이거보다 더 했을텐데 엄마가 복수하고 싶었나보다’ 이런 식으로 단순화 시켜요(웃음). 치매약이 상당히 독해서 치매환자의 식사를 잘 챙기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런데 고령의 치매환자들이 균형잡힌 식사를 잘 안하면서도 약은 꼭 먹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돌보는 가족이나 요양보호사 분들이 그걸 잘 신경써야 해요.” 

- 우리나라 치매 정책(장단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준비해서 2008년부터 실시했어요. 초기엔 3등급으로 단순했지만 정부 당국도 치매에 여러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현재는 5등급으로 세분화됐죠. 초기엔 등급 받기가 힘들었다는데 지금은 조금 더 수월해졌고 복지선진국화 됐다고 해요. 저는 체감을 합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네 시간(10:30~14:30)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요양보호사의 돌봄(운동, 목욕 등)을 받아요. 밤에 두 시간반 돌봐주는 요양보호사는 가족이 사비로 충당해요. 제가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도 치매환자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면서 사회생활을 병행할 수 있게 나라가 책임지겠다는 치매국가책임제도 덕분인거죠.”

- 요양보호사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치매가족을 돌보러 집에 오는 요양보호사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분들이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들은 허드렛일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간호사에 가깝거든요. 환자를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첫번째인 식사와 두번째인 운동(산책 등)을 돕는 역할이에요. 

서울과 하동을 겪어보니 요양보호사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서울엔 고학력, 고스펙의 은퇴자지만 자원봉사의 뜻으로 요양보호사 하는 분들도 많은데, 하동은 99% 생계형 요양보호사다보니 생기는 일이죠. 하동에서는 서울에서보다 자주 요양보호사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엄마를 서울에서 하동으로 보내고 불안한 마음에 엄마 방에 홈캠을 설치했는데 설치기사 아저씨가 헤메는 거예요. 하동에서 저희 집이 처음으로 홈캠을 설치했던 거였죠. 처음엔 요양보호사 분들이 홈캠을 회피했지만 지금은 신경 안 써요. 제가 감시 목적으로 캠을 쓰는 게 아니라 요양보호사가 없는 새벽 시간에, 주무시는 저녁에 가끔 지켜보면서 어머니 컨디션을 확인하고 운동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 요양보호사께 알려드리는 정도로만 쓰고 있어요. 자세히 보면 엄마가 물 마시고 싶어하는 것까지 알 수 있어요. 시간관념이 많이 없어진 엄마가 밤중에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아빠와 각방을 쓰는데, 홈캠에 자다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불안하게 돌아다니는 엄마가 보이면 아빠나 요양보호사께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시켜요. 책이 나왔을때 요양보호사분께 책을 한 권 드렸더니 읽고 저의 가족사를 속속들이 알게 돼서 더 이해를 하게 됐죠.”

- 치매에 걸린 이후의 삶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걸 생각하면 힘들어질 때가 있어요. 서울 도심에서 밤 12시까지 동네 산에서 별보며 운동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어요. 하지만 방배동 집 뒷산에선 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를 하동으로 보내고 제가 이사온 분당에도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방배동 뒷산 같은 공간이 있었죠. 엄마도 하동에 내려갔더니 방배동에서 운동하던 언덕길과 경사도와 거리가 비슷한 길이 신기하게 있어서 운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어요. 운동하다가 ‘내가 이러고 사는 것도 사는거냐? 힘들어죽겠다’라고 투정을 부리거나, 새벽에 대소변 못 가리고 그럴 때 자괴감을 느끼며 그런 사실을 엄마 스스로 인지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런 시간은 24시간 지속되지 않아요. 운동이 끝나면 불가리스 무가당 요구르트에 콘프레이크 섞은 간식을 드리는데 그때는 세상 모든 일 다 잊어버리고 너무 맛있게 드시죠. 그럴 때면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너랑 있는게 너무 좋다’고 말해요. 그런 시간들이 더 많기 때문에 엄마는 인생의 의미를 잡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주변에서 속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시는 것보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시는게 낫지 않아?’ 이런 말을 할 때 땅속에 관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하루하루 맛있는 거 먹고 하루라도 세상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도 그게 더 좋을거라 생각해요. 아버지 친척들 중에 대놓고 엄마를 요양병원에 보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 일침을 가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런 말하는 분에게 ‘자식들이 못다한 효도를 이제라도 하겠다고 힘들다는 내색도 안하며 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요양병원 가는 게 낳다고 말할 수 있어요’라고 해줬어요.”

- 치매노인들이 유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한때 노트북으로 좋아하시는 이미자 씨의 노래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 보여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어요. 하지만 하루 종일 음악영상을 보는 것도 힘든 일이라 요즘은 잘 안보고 대신 요즘은 케이블채널에서 먹방 프로그램을 틀어드리면 잘 보셔요.  

하동 옆집에 70세 넘은 할머니가 사시는데 내려갈 때 먹을 것을 종종 사드렸더니 그분이 엄마한테  ‘타작하고 남은 쥐눈이콩 털기’ 같은 소일꺼리를 주시더라구요. 제가 오랜만에 내려가 그 집에 가면 엄마가 허리 아프게 그런 일 하다가 반가워하면서 저를 따라 나오실 것도 같은데 끝까지 까고 계셨어요.  요양보호사가 어느 날은 김밥 재료를 엄마에게 주고 드실 김밥을 직접 말아보라고 했더라구요.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가 손과 머리를 쓸 수 있는 소소한 일거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 두면 좋아요.”

- 치매환자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책 쓸 때 엄마한테 원고를 자주 읽어드렸어요. 책 나왔을 때 표지 뒤에 감사의 글을 써서 하동에 갖다 드리며 ‘엄마 덕분에 이 책을 냈어. (3년 준비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엎어졌던)영화 작업도 다시 들어가게 됐는데 다 엄마 덕분인거 같애’라고 말했어요. 지금 엄마의 상태는 감정을 먼저 말하지 않는, 누군가 물어봐야만 답하는 상태인데 이때는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아유 장하네...’ 이렇게 말씀해주셨죠.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런 느낌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의 기운이 이 세상을 망하지 않게 받치고 있다는 시선으로 치매를 바라보면 다르게 대응할 수 있어요.

엄마를 돌보며 힘들어하던 시기 찾아가 공부했던 서울 봉은사에서 수계증 받을 때 진화스님이 ‘당신 스스로 절에 와서 시주,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데, 실은 옆에 있는 사람이 부처다. 웬수 같은 마누라, 말 안 듣는 자식, 병든 노모가 부처님인데 그들하고는 사이좋게 못 지내면서 절에 와서 선업을 쌓겠다고 봉사하고 그러냐. 그런 거부터 잘해야 한다’라고 말했을때 크게 느꼈죠.”

▲ 어린 시절 하윤재 작가(왼쪽)와 엄마. 사진=판미동

하윤재 작가는 자신이 겪는 이 과정이 결국 어릴적 외할머니가 말했던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400년 고택의 종부로 딸을 시집보냈던 작가의 외할머니는 작가가 어릴 적 “종갓집에 시집가서 평생 손에 물 묻히고 사는 네 엄마가 참 안됐다. 너는 꼭 사람이 돼서 엄마를 잘 보살펴 드려라”고 당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엄마의 치매를 함께 겪어내며 처음에는 왜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이 나에게 왔을까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더욱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책을 통해 고백한다. 자신이 내세울 만큼 커다란 효도를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에는 더 열악한 환경에서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됐다. 

하윤재 작가는 10여년간 치매를 앓는 엄마를 돌보며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에 건넬 작별인사를 고민하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우리는 참 좋은 인연인 것 같지? 그러니깐 우리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꼭 만나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에게서 돌아온 예상밖의 대답에 작가는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나야 꼭 만나고 싶지. 근데 여서도 이리 니한테 짐이 되는데. 고마, 니는 다음에 더 좋은 부모 만나서 편하게 살아라.” 

작가는 엄마와 자신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