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초순, 수필공부 동아리 지도교수이신
운경 이경희 선생님과 함께 청도 유등연지를 찾았다.
2018년 현대수필 봄호에 실을 글을 써야 하는데
글감을 구상하기 위해서 현장답사를 하러 가신다는 거였다.
저무는 해, 차가운 겨울바람에
찬란한 녹엽을 잃어버린 마르고 시든 연잎을 보니
구순 넘으신 나의 노모를 닮았다.
겨울 유등 연지, 시들고 마른 연잎, 그리고 나의 노모..삶..불교...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올 3월 수필동아리 공부시간에 글을 주셨다.
* * *
유등연지
이운경
겨울 연지蓮池는 고요의 바다다. 지난 여름은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간이었다.
초록의 연잎들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그 사이로 연꽃이 등불처럼 피어올랐다.
비가 내리면 빗방울이 연잎 위로 음표를 그렸었지. 꽃의 시간은 지고 갈색의 대궁은 마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꺽였다.
저무는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선 연지의 실루엣은 고고하고 처연하다.
겨울 연지는 추상화다. 종내 선과 면으로 귀착한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본질만 남았다. 겨울 호수에 펼쳐지는 기하학의 행렬은
숭고한 몰락의 풍경이다. 수면위의 존재와 수면 아래의 그림자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저들의 긴밀한 호흡을 보라.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하려는 의지이려니.
순명順命의 미학을 보려면 겨울 연지로 가야 하리. 묵언 수행의 자세로 돌아선 연지의 풍경. 저 풍경의 언어는 침묵이다.
중력을 거스르며 직립했던 것들이 저물면서 보여주는 겸허의 아름다움을 보라. 어떤 그리움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수면 아래로
고요히 침잠한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연지의 시간은 적요롭다.
그녀의 노모는 아흔이다. 곱디곱던 어머니는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표정이 낙조의 잔영처럼 애잔하다.
마른 연잎처럼 쪼그라든 노모의 몸피는 하염없이 가볍다. 자식을 위해 다 내어준 노모의 인생도 나름 극진했으리.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지고 흐르고 사라지는 연지처럼 인간의 삶도 그러하리니. 깨침은 우연인 듯 깊다.
*유등연지는 경북 청도군 유등리에 있는 연지의 이름이다.
* 현대수필/ 2018 봄호
'☞■ my page ■☜ > 긴 글, 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남대학교 축제장의 재미있는 말,말,말 (0) | 2019.06.01 |
---|---|
중학교 문화교실/영화 신상(神象), 줄거리 (0) | 2018.09.23 |
'sweet home 3D'로 전원주택 꾸미기와 상상(想像) (0) | 2017.07.17 |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잔 할까?' 책을 읽고 (0) | 2017.01.04 |
독후감/장영희 冊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0) | 2016.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