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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장례식, 서길수 교수

보현화 2019. 12. 29. 16:02


https://news.v.daum.net/v/20191228030233547


故人도 哭도 없는..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돈규 기자 입력 2019.12.28. 03:02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살아서 장례식, 서길수 교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연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고구려연구소' 앞 골목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그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희한한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메일 제목이 '살아서 하는 장례식과 출판기념회'였다. 멀쩡히 산 사람을 장사 지낸다고? 고인(故人)도 없고 통곡도 없는 초상집에 초대받은 셈이다. 모시는 글은 이랬다.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다 생각했습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했습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어요. 연명 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지요.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 한 강연장. 서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장례식이 있기 열흘 전 서울 마포구 '고구리연구소'로 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는 뒤로 밀어놓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할 때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죠.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저는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주변 반응은.

"130명쯤 들어 있는 단톡방에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툭 던졌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하하하.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막막했겠지요. 파격이 일단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궁금하면 조문하러 올 테니까요."

―'장례식 축하드립니다'라는 댓글은 안 붙었나요.

"1주일 지나서야 '명복을 빕니다'와 '극락왕생하십시오'를 받았지요(웃음). 저는 뼛속까지 교육자라 그런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지금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여러 번 하면 멈칫거리지 않고 축하할 수 있을 거예요."

―산사에 틀어박혀 3년간 죽음을 공부했다면서요.

"더 올라가면 1992년부터 '관법(觀法) 수행'을 시작했어요. 지금 박 기자와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입니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잖아요.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얼마나 열심히들 합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웃음).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2014년 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이코.

"육종암인데 수술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지요.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어요.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습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갑니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지요.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지요.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곤 먼저 가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은 거예요.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종암은 어떻게 됐나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퉁퉁 부어오른 거예요. 의사도 당황했습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지요.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입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어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더군요."

죽음을 왜 알아야 할까. 서길수 교수는 "죽음을 아는 사람은 진지하게 살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축사를 맡은 공석구 고구려발해학회 회장은 "연락을 받고 '축사가 가능할까? 조사(弔辭)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며 웃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

서 교수는 MRI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의사에게 할 요청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치료가 가능하다면 살고 싶다. 둘째, 불가능하다면 책을 두세 권 마무리할 때까지만 살려달라. 셋째, 그것도 안 되면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

―의사가 뭐라 하던가요.

"암이 재발한 게 아니고 림프액이 새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1주일에 두 번씩 뽑아내면 된다고요(웃음). 5년이 지나 올해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그때 확실히 시작된 것 같아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결심한 계기라면.

"답사로 또 여행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요. 지난해 9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제 사진을 보더니 손녀(12)가 '이건 영정 사진이네' 그래요. 제가 물었죠. '넌 장례식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대뜸 '육개장 먹고 울다 가는 것'이래요. 하하하."

―즉물적으로 정확히 봤네요.

"이번 장례식에서는 '슬픔이 없는 가족'이 낮밥을 대접하는데 100% 채식입니다. 저는 2008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미래의 생명인 계란도 빼달라고 했지요. 내 죽음 때문에 다른 동물이 애꿎게 죽는 건 옳지 않으니까."

―교수님 연배는 조문하고 육개장 드실 일이 많았을 텐데요.

"가지 않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꼭 있어야 할 장례식만 두 번 갔어요. 자식들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빚이 없지요. 나중에 '세금' 걷으려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면 시간을 까먹는 일입니다.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어요. 왜 울어야 하나 궁금했지요. 아버지의 죽음이 제게 준 화두입니다."

―답을 찾아냈나요.

"산사에 있을 때 답을 읽었습니다. 진리는 이미 있는데 만나기가 힘들 뿐이에요.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반드시 죽습니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듯이요. 두렵지만 맞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어떤 실익이 있나요?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지 않아요. 몰라서 두려운 겁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데.

"결국 삶은 늘 선택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대로 가고 싶었어요. 지금의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은 사람을 위해 벌이는 쇼(show)예요. 죽음이 뭔지 알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죠. 수많은 목사님과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저는 실천을 하겠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번 장례식은 호상(好喪)이군요.

"축가도 부릅니다. '내 장례식에서 축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니 난감해하더군요. 이 장례식에선 슬픈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슬프다면 그 근원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에요. 제가 자식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 순서는 너희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흘을 지키고 염도 하고 다 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사에 관심을 가졌지요. 이 장례식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죽음은 마지막이자 시작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영세나 세례를 주지요. 살면서 지은 모든 업이 죽는 순간에 한꺼번에 몰려와요. 힘들게 죽는 사람은 힘들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편안하게 가지요. 하나님 곁으로 가든 윤회에 따라 다시 태어나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난 21일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연 서길수 교수가 죽음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박돈규 기자

고구려 연구를 다시 붙잡은 이유

마침내 장례식 날. 조문객은 '늘 입던 옷으로 편하게'들 모였다. "산 자의 장례식은 국내에서 처음 같다"는 소개를 받고 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앞으로 (장례식을) 몇 번 더 할지 모르지만 부의금 안 받을 테니 여러분이 계속 와줘야 합니다."

그는 고구려 산성 130곳을 발견한 고구려 연구 권위자다. 이날 조문객 100여 명 중에는 30년 전 서 교수에게 고구려를 일깨워준 조선족 청년도 있었다.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 중이었는데 이분이 '환도산성을 안 가보고 어떻게 고구려를 봤다고 하느냐'고 해 깜짝 놀랐어요. 올라가 보니 둘레가 7㎞예요. 압록강과 국내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일본이 펼쳐지는데 내가 한복판에 서 있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고구려는 크다. 열등의식은 없애려 애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크다는 걸 느꼈을 때 없어지는 것이구나."

―왜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나요.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악랑(樂浪)'을 '낙랑'으로, '계단(契丹)'을 '거란'으로. 다른 나라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거예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도 이웃 나라인 '고구리'와 '고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래어였습니다. 이 주장이 낯설지 모르지만 제가 10여 년 전에 논문을 발표해 많은 논의가 있었어요."

―대표적 증거를 꼽는다면.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한글로 엮어낸 '용비어천가'(1447)에 '高麗=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이미 그때 '고려'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7년 전엔 '고구려 연구는 이제 후학의 몫으로 넘기겠다'고 했는데.

"2017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는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이 얽혀 있다'며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습니다. 북한도 아니고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일부라니, 깜짝 놀라 언론사들에 보도 자료를 보냈어요. 그런데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향해선 조그만 것 가지고도 난리를 치면서, 우리 역사가 중국으로 다 넘어갈 마당에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고구려 연구로 돌아온 다른 이유도 있나요.

"통일 코리아의 이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요. Korea가 고구리와도 관계가 깊으니까요."

―중국의 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리 역사를 학술적으로 방어해야죠. 동북 공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적어도 2~3년 안에 작은 대응 논리라도 내놓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열어 이 문제를 널리 알릴 겁니다."

―학술서는 시장이 죽었는데.

"모두 10권을 낼 계획인데 제작비는 제가 대요. 마지막엔 재산이 제로(0)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보통 장례식 끝나면 자식들끼리 부의금 때문에 싸운다잖아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 참된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조문하러 온 출판사 사장이 판소리 심청가 중 상엿소리를 뽑았다. 고정관념을 깬 이날 장례식은 마지막 인사도 특별했다. 달 항아리처럼 둥글게 웃으며 서 교수가 말했다. "오늘 못 한 이야기는 '다음 장례식'에서 찬찬히 나눕시다." 밖으로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웠다. 자빠지면 머리 깨질라 조심조심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