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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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보현화 2020. 3. 23. 23:37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떤 관점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소가 되고 말이 되고 한다는 얘기는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말하는 윤회입니다. 이런 윤회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지 죽음을 어떤 특별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두더지를 뿅망치로 때리는 게임 해보셨죠? 이걸 때리면 저게 나오고, 저걸 때리면 이게 나오고, 다시 이걸 때리면 저게 나오잖아요. 인생사도 그와 같아요. 아이 문제를 해결하면 남편 문제가 터지고, 남편 문제를 해결하면 시어머니 문제가 터지고, 시어머니 문제를 해결하면 건강 문제가 터집니다. 이걸 때리면 저게 나오고, 저걸 때리면 이게 나오고, 빨리 때리면 빨리빨리 나오고, 천천히 때리면 천천히 나와요. 이것이 인생입니다. (모두 웃음)


‘이 문제만 해결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살긴 사는데, 결과는 이거 해결하고 저거 해결하느라 바쁩니다.


그러면 수행은 뭘까요? 게임 기계의 전원을 확 빼버리는 거예요. 전원을 빼버리면 두더지가 더 이상 안 올라옵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전원을 확 빼버리면 죽음이라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안 죽고 싶은 것이 문제입니다. 죽음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에요.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이 문제라고 하는데, 사실은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것이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이 계속 마시니까 괴로운 겁니다. 남편이 술을 마셔도 좋다고 마음을 내면 남편이 술을 마셔도 하나도 괴롭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안 죽고 싶다’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데 죽어야 하니까 괴로운 것이지, 죽음을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면 죽음이 괴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히 산다’, ‘다음 생에 또 태어난다’, ‘천당에 간다’ 하는 말에 유혹이 되는 이유는 안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는 ‘죽는 것이 좋다’ 이렇게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신진대사가 작동하느냐, 작동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을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바라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고 천년을 산다면, 지구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죽겠다고 자살하는 것도 생명의 원리에 어긋나지만, 죽을 때가 됐는데도 산소 호흡기를 끼워 놓고 안 죽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자살은 하면 안 됩니다. 자살은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작용에 장애가 생긴 거예요. 자살 충동이 일어나면 빨리 정신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일부러 죽을 필요도 없고, 죽을 때가 됐는데 안 죽겠다고 발버둥 칠 필요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을 같이 봐야 합니다. 죽음은 특별한 게 아니에요.


최근에는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계를 이용해 수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가 하나의 큰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통계 자료를 보니까 평생 동안 낸 총 의료비와 죽기 전 1년 동안 낸 연명 치료 비용이 같다고 합니다. 연명치료는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 미국에서는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존엄하게 죽자는 캠페인을 하는 곳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어요.


일부러 생명을 죽이는 자살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그 죽음을 조용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호주에서는 데이비드 구달이라는 104세 과학자가 더 이상 억지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스위스에 가서 스스로 생명을 끊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국가에서 그렇게 해주면 범죄가 되니까, 의사는 링거와 주사만 꽂아주고 본인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의사가 버튼을 누르면 살인죄가 되니까요. 혼미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인터뷰도 다 하고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식 없이 혼미 상태로 1년씩 누워 있기도 하잖아요. 구달 박사처럼 그렇게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생명을 연장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두려움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면 두려움은 왜 생길까요? 무지, 즉 알지 못함으로 인해 생깁니다. 여러분들 어두울 때 두려워요, 밝을 때 두려워요?”

“어두울 때요.”


“왜 그럴까요? 똑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어두우면 두렵습니다. 그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두려울까요, 아는 사람을 만날 때 두려울까요?”

“낯선 사람을 만날 때요.”


“낯선 곳에 갈 때 두려울까요, 아는 곳에 갈 때 두려울까요?”

“낯선 곳에 갈 때요.”


“두려움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모르거나, 앞이 안 보이거나, 계산이 안 되거나, 이럴 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 중에 제일 모르는 것이 죽은 뒤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인간에게는 제일 큰 두려움이 되는 겁니다. 이 두려움을 없애려고 나온 많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첫째, 죽으면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즉, 천국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죽는 것은 못 막지만, 죽으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좀 되잖아요.


둘째, 인도 사람이 더 좋은 것을 발명했습니다.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즉,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장례식을 죽자마자 바로 하고, 별로 울지도 않습니다. 아침에 사람이 죽으면 당일날 바로 화장을 해버립니다. 화장하는 문화는 육신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헌 옷을 확 태워버려야 새 옷을 확 갈아입을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헌 옷을 옆에 놓아두면 새 옷을 안 입게 되잖아요. 새 옷은 아직 몸에 좀 안 맞는데 헌 옷은 편하고 몸에 맞으니까, 옆에서 아무리 헌 옷을 입지 말라고 얘기해도 헌 옷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헌 옷을 계속 꺼내 입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집착을 놓으라고 헌 옷을 태워버리는 겁니다. 장례식 문화는 대부분 이런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생긴 게 많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삶과 죽음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즉, 죽음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 겁니다. 죽음은 그냥 신진대사의 작동이 멈추는 것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는 죽는 순간에도 호흡을 관찰합니다.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고를 일상적으로 지켜보듯이, 죽는 순간에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왜 죽어서 어떻게 될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걱정하겠습니까. 자연을 보세요. 나뭇잎이 떨어질 때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어디로 가지?’ 이런 생각을 하나요?

 

‘다시 태어난다’, ‘천국에 간다’ 이런 얘기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종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그냥 삶과 죽음을 똑같이 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바로 해탈이에요.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지만, 죽음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은 것이 해탈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회사에 부도가 났다고 두려울까요? 몸이 아프다고 해서 두려울까요? 아프면 불편할 뿐이지 두렵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비록 괴로움이 조금씩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날보다는 더 나아졌다면 수행이 되고 있는 겁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누군가가 뺨따귀 한 대 때렸다고 두려울 게 뭐가 있고, 시어머니가 고함을 지른다고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 시어머니가 화가 나셨구나.’


이렇게 시어머니를 이해하면 더 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보여주셨잖아요. 한 바라문이 막 화를 냈을 때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저한테 묻겠죠.


‘법륜 스님, 당신은 그렇게 됩니까?’


저는 ‘안 됩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또 묻겠죠.


‘스님도 그렇게 안 되면서 왜 우리한테는 그렇게 하라고 말하십니까?’


그래도 저는 할 말이 있어요.


‘그래도 당신보다는 잘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모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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