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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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화풍(地水火風), 깨달음..外

보현화 2020. 11. 2. 20:29

www.jungto.org/pomnyun/view/82896  중에서 발췌

 

“IQ가 높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요?” - 스님의하루

2020.10.23. 정토대전 회의, 금요 정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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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님들은 3개의 질문을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부처님 당시에 왜 물질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분류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왜 부처님 당시에는 물질을 지수화풍으로 분류했을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물질의 근원을 무엇이라고 보며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시대마다 규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옛날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표현했지만, 17세기에 화학이 발달하면서부터 원자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원자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변하지 않는 단독자라는 뜻입니다. 만약 원자를 단독자가 아니라 조합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물질의 최소 알갱이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원자도 변한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물질의 최소 알갱이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단독자가 아니고, 단독자가 아니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합이라는 것은 공간의 관계성을 가진다는 것을 뜻하고, 변화란 시간의 관계성을 가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물질의 세계 또한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을 현대 과학으로 해석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현대 과학에서 밝혀낸 화학이나 핵의 개념까지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현상으로 물질을 분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을 고체, 액체, 기체로 분류한 거예요. ‘지(地)’는 땅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고체를 의미합니다. ‘수(水)’는 물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액체를 의미합니다. ‘풍(風)’은 바람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체를 의미합니다. ‘화(火)’란 불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에너지 또는 파동을 의미합니다. 손으로 감촉하는 것은 고체와 액체라면, 혀가 감촉하는 것은 액체이고, 코가 감촉하는 것은 기체이고, 귀와 눈이 인식하는 것은 파동입니다. 이것을 지수화풍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도 사물에 대해 굉장히 연구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분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것을 요즘 사람들이 현대 과학과 연결을 못 시켜서 추상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과학적으로 분석한 겁니다.

8괘를 그릴 때도 8가지를 그리잖아요. 이것도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가로가 x축이고, 세로가 y축, 높이가 z축이고 합시다. x축에도 +방향과 –방향이 있고, y축에도 +방향과 –방향이 있습니다. z축은 위가 +방향이고, 아래가 –방향입니다. 그러면 공간이 총 몇 개로 분할이 됩니까?”

“8개요.”

“그 8개를 배열하면, x, y, z가 모두 +, +, +일 때가 있고, +, +, -일 때가 있고, 이렇게 주욱 배열하면 총 8개의 공간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8괘입니다.”

“3차원을 말하는 거네요.”

“그렇죠. 여기에 시간 축인 t를 더하면 64괘가 됩니다. 그러면 4차원이 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도 나름대로 합리적 사고를 갖고 세상을 이해하고 분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부처님도 ‘무엇이 나인가?’라고 깊이 탐구하신 겁니다. 부처님은 ‘나’라는 것이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셨습니다. 우선 몸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이 ‘색(色)’입니다. 그다음에 정신적 성질이 있는데, 정신적 성질 중에는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고, 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각각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부처님의 말씀이 현대 과학과도 아무런 모순 없이 연결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왜 경전 속 부처님의 말씀을 다 찾아보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전 속에서 근거를 다 찾아보는 이유는 가능하면 옛날 사람들이 기록한 것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정토대전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논쟁이 안 생기니까요.

불교사상서 편찬팀에서 궁금한 점을 계속 물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순서로 설법한 부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대답합니다. 왜 무상한 것이 괴로움이라고 하셨을까요? 무상한 것을 깨달으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스님은 부처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상한 것, 즉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에요.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이자 원리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고,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착을 한다는 겁니다.

스케이트 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음이 녹는 것을 싫어합니다.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이 어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렇게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변화가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실제의 세계는 변화하는 것인데, 우리의 욕망 때문에 변화를 바라지 않는 거예요. 또 다른 원인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식 범위 안에서는 그것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항상 하기를 원하거나 항상 하는 줄 잘못 알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의 세계는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 같아요.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문답을 하셨다고 나오죠.

‘그것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입니다.’
‘괴로운 것을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삼법인을 의미하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마음의 원리 측면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표현해야 정확할 것 같아요.

‘그것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면 괴로움인가?’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문답에는 ‘참나(진아)는 괴롭지 않아야 한다’라는 전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아’의 상태에서는 일체의 괴로움이 없다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전제로 한 것 같아요. 범아일여 사상에서 ‘아’는 괴로움이 없는 절대적 존재를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는 대답이 나온 게 아닐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무아’로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마음의 원리적인 측면에서는 안 맞는 것 같지만, 그 시대에 사용했던 논법을 따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부분의 불교교리는 외부의 이교도들과의 논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불교도 논리를 만들어서 대응해야 했고, 상대가 믿음으로 접근하면 불교도 믿음을 강조해서 대응해야 했고, 상대가 신통을 갖고 접근하면 불교도 신통을 갖고 대응해야 했던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불교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지만, 시대적 환경에 대응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자본주의로 변하면서 모든 것이 성장 중심으로 가고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니까 불교도 절을 얼마나 크게 짓느냐를 갖고 불교 중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돈이 있다고 해서 절을 짓는 일에 돈을 다 사용하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포교하는 일에 돈을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물량주의가 번성하니까 불교 포교의 제1번 목표가 번성하는 대형 교회에 대한 대응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저는 오늘날 불교인들이 깨달음을 너무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인들이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천국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요구만 다를 뿐입니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둘 다 심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고,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둘 다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현재 불교인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의 절대화와 비슷한 개념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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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가 높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 예”

“아무 관계가 없는데,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까?”

“저는 젊은 시절에 스트레스로 담배와 술을 많이 한 탓에 현재 기억력이 많이 나빠졌어요. 그래서인지 불교대학에서 배운 아주 좋은 말씀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기억력이 깨달음을 얻는데 어떤 영향도 안 미치나요?”

”예, 아무 영향도 안 미칩니다. 부처님 당시에 주리반특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문장도 못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없어서 인도 최고의 바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자기 형이 먼저 출가해서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출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지혜제일 사리불(사리풋트라, Śāriputra)이 지도를 해도 공부에 진전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수행이 암기력 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해도 문장 한 줄도 못 외우니 사람들이 ‘너는 안 되겠다. 집으로 돌아가거라’라고 했나 봐요. 그 이야기를 듣고 주리반특이 울면서 기원정사 밖으로 나가다가 부처님과 마주쳤어요. 울고 있는 주리반특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은 주리반특을 데리고 다시 정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주리반특에게 물었어요.

'너는 세간에 있을 때 무엇을 잘했니?'
'저는 청소를 잘했습니다.'

이 대화를 볼 때 주리반특은 청소를 담당하는 불가촉천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청소하는 카스트(caste, 계급)가 있거든요. 부처님은 주리반특의 이야기를 듣고 온화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라는 말을 하면서 청소를 하도록 해라.'

사실인지 모르지만 주리반특은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라는 한 문장도 외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빨래와 청소를 모두 주리반특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출가수행자라면 본인 처소의 청소와 빨래는 본인이 해야 하지만 주리반특을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청소하고 빨래하는 주리반특의 옆에서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라’라고 반복해서 외워주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주리반특은 ‘수행자는 청소하듯이 마음의 티끌을 털고 때를 닦으면 맑은 마음이 되어 깨달음을 얻게 되는구나!’ 하고 탁 깨달아버렸어요. 그래서 번뇌가 다 끊어졌다고 합니다. 질문자가 아무리 기억력이 없더라도 주리반특보다는 나을 거 아니에요.

깨달음은 기억력이나 아이큐와 관계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으로서 불교는 기억력과 관계가 있고 종교로서 불교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으로서 불교는 체험과 경험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아이큐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법문을 듣고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남을 가르쳐야 한다면 기억력이 필요하지만 자기 해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좋은 인사말인데요. 어떻게 사람이 오랫동안 건강할 수 있습니까. 건강하다가 아프기도 하고 늙으면 죽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부처님은 몸이 아픈 것도,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불사(不死)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두려움과 번뇌가 없다는 뜻이에요.”

“네, 제 욕심인 것 같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