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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긴 하지만 죽으면 꼭 천당에 가고 싶어요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살아온 크리스천입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다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법륜 스님께서 ‘나는 사후세계에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종교란 영원한 세계인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영원한 것을 흠모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법륜 스님의 좋은 말씀으로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그런 법륜 스님이 왜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불교는 현세만 연구하는 종교인가요? 저는 현세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불교의 가르침이 참 좋지만, 죽은 뒤에는 천당에 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죽은 뒤에 꼭 천당에 가십시오. 가서 영원히 편안하게 사세요. 저도 질문자의 마음에 공감합니다. (웃음)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모가 죽었다’, ‘자식이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 이렇게 하소연을 하면 부처님께서는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늙으면 어떡해요?’, ‘죽으면 어떡해요?’ 이렇게 질문하면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라’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어제 얘기도 하지 말고, 내일 얘기도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고 가르치시는 분이 전생을 얘기하거나 내생을 얘기하실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유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죽음이 두려울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두려울 때가 언제예요? 아는 사람을 만날 때가 두려워요? 낯선 사람을 만날 때가 두려워요?”
“낯선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아는 곳에 갈 때가 두려워요? 낯선 곳에 갈 때가 두려워요?”
“낯선 곳에 갈 때입니다.”
“아는 일을 할 때가 두려워요? 모르는 일을 할 때가 두려워요?”
“모르는 일을 할 때가 두렵습니다.”
“낮에 두려워요? 밤에 두려워요?”
“밤에 두렵습니다.”
“두려울 때 공통점이 뭐예요? 그 사람을 모른다, 그 장소를 모른다, 그 일을 모른다, 밤에는 안 보인다, 즉 모를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것 중에 제일 모르는 게 뭘까요?”
“사후 세계입니다.”
“죽은 뒤의 세계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제일 두려운 게 뭘까요? 바로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가 가장 두렵습니다. 그런데 죽음 때문에 두려울까요? 모르기 때문에 두려울까요?”
“모르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장소 때문에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그 일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일을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그 사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밤이 두려운 게 아니라 밤이 되면 안 보이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그것처럼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방법이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 해본 일을 하거나 안 가본 곳을 갈 때 ‘그 일을 하면 돈을 더 번다’, ‘그곳에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약간 두렵지만 그 일을 하거나 그곳에 가게 되겠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게 더 좋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두려움도 함께 작아집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 낸 최고의 아이디어가 바로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간다’입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함으로 해서 자신이 죽을 때의 두려움이나 가족이 죽는 것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사람은 이것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냈어요.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간다고 해도 이생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다’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얼마나 좋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인도에서는 죽는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어디 갔다 금방 돌아온다고 믿으니까요. 우리처럼 며칠 지난 후에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오늘 죽으면 오늘 곧바로 화장을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관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관 밖으로 두발을 내보였다는 표현은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기록한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처음에 눈물 찔끔 흘리고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갔다가 금방 올 건데 왜 웁니까? 인도 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사실일까요, 믿음일까요?”
“믿음입니다.”
“네. 믿음에 대해 사실이냐 아니냐 따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사실이냐 아니냐 따지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두려움을 없애는 효과가 없어져요. 반면에 사실이라고 하면 면죄부를 파는 부작용이 벌어져요.
기독교인들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말하거나, 불교인들이 죽어서 극락에 간다고 말하거나, 인도인들이 죽으면 환생을 한다고 말하거나,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음에 속합니다. 믿음은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어떤 불교인들은 죽어서 윤회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불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저는 ‘윤회한다’, ‘윤회 안 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상관을 할까요, 상관하지 않을까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도 없고, 상관도 안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만약 천당이 있다 해도 제가 이 세상을 성실히 살아간다면 천당에 가게 될까요, 안 가게 될까요?”
“가게 되겠죠.”
“만약 지옥이 있다 해도 성실히 살아간다면, 지옥에 가게 될까요, 안 가게 될까요?”
“안 가게 되겠죠.”
왜 법륜 스님은 지옥에 갈 확률이 높을까요?
“그런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천당이 있든지 없든지 가든지 안 가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행동은 지옥에 갈 짓을 해놓고 지옥에 갈까 겁나서 천당에 보내달라고 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모순 아니에요? 저 같으면 천당에 갈 수 있는 복을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천당에 가기보다 지옥에 가겠어요. 왜냐고요? 천당에 가면 살기가 좋아요, 나빠요?”
“살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천당에는 남에게 도와달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살기 좋으니까 도와달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옥은 살기가 좋아요, 나빠요?”
“살기 나쁩니다.”
“그러면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이 많을까요, 없을까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가서 할 일이 많을까요, 없을까요?”
“할 일이 많죠.”
“그래서 저는 지옥에 안 가도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갈 겁니다. 여러분은 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만, 저는 주로 동남아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은 미국에서 덕 좀 보려고 이민을 가지만, 저는 동남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구호활동을 하러 가는 거예요.
이 생에서도 저는 미국에 가서 어떻게 덕을 좀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늘 동남아나 어려운 나라에 가서 무엇을 도와줄까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죽어서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저는 어느 쪽에 가 있을까요?”
“지옥에 가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별 관심 없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천당과 지옥은 없어도 괜찮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나요?
믿음은 자유입니다
저는 ‘있다’, ‘없다’ 이런 논쟁에 끼고 싶지 않아요. ‘있다’, ‘없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헌법에도 믿음, 신앙, 종교, 사상, 이념은 개인의 자유라고 명시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기독교를 믿고 질문하든, 불교를 믿고 질문하든, 거기에 대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믿으라는 말도 하지 않아요. 다만 ‘불법을 공부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이렇게 말하지 ‘종교를 바꿔라’ 이런 말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유이기 때문이에요. 종교는 각자가 알아서 믿으면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빨간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검정 옷을 입은 사람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 스님이 일절 간섭하지 않잖아요. 옷은 각자가 알아서 입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질문자도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좋아하는 거겠죠. 믿음은 자유예요. 여러분들이 각자 알아서 선택하면 됩니다. 남한테 강요할 필요도 없고, 남을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것은 피부 빛깔일 뿐이고, 남자든 여자든 그것은 성별일 뿐이고,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것은 국적일 뿐이고, 어느 종교를 믿든 그것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갖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돼요. 우리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질문자는 살아서는 불법을 열심히 공부해서 행복하고, 또한 기독교를 믿어서 죽어서는 천당에 가세요. 그런데 만약 질문자가 기독교를 열심히 믿어서 천당에 가 봤더니 교회도 안 다닌 스님이 천당에 와 있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하나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다닌 스님이 천당에 왜 왔나? 그러면 나도 교회에 안 다닐 걸!’
이런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나쁠 겁니다. 그런데 기분 나빠할 게 없지요.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런 사람까지도 다 구제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올바른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향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말했어요. 불교인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기독교 안에 진리가 다 들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보면 모든 고뇌가 사라집니다. 기독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편협한 생각과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썽이 생기는 겁니다. 편협한 생각과 잘못된 믿음을 기독교라고 이름 붙이다 보니 기독교가 욕을 얻어먹게 되는 거예요.
다시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기독교를 올바르게 믿으세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마음으로 사세요.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세로 삶을 사시면 언제나 행복하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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