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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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보현화 2023. 8. 15. 16:03

“스님께서는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평범한 스님이었다가 지금과 같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 스님으로 변화하게 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나요?”

“저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이 적었습니다. 어릴 때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계신 불심도문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난 인연으로 어떻게 보면 반강제적으로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붓다 담마가 좋아서 출가를 했지만, 스승님으로부터 아주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출가를 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웃음)

붓다 담마는 정말 좋았지만 막상 절에 들어와서 스님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개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교 개혁 운동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정 정도 포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대학생 청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한테 두 번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서암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암 큰스님은 미국 LA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LA에 있는 반지하 공간에 한국 절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서암 큰스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더니 ‘여기에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이 주인이니까 내가 당신을 접대하겠네’ 하며 밥을 해주셨습니다.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침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저한테 침대를 내어 주고 큰스님은 바닥에서 주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 분은 다른 스님들과는 많이 다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게 같이 저녁을 먹고 노스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한참 동안 한국 불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서 두 시간 동안 말을 했어요. 그러나 노스님은 한 마디도 안 한 채 그냥 듣고만 계셨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아무 이야기를 안 하고 다 듣고 계시더니, 제 이야기가 끝나니까 이렇게 한 마디를 하시는 거예요.

‘여보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그것이 불교라네.’

그 말씀이 저한테는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상에 집착하지 말라’ 이런 내용들이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상은 다 공하다’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지적을 받고 저를 돌아보니까 저는 머리를 깎은 사람이 스님이고, 스님들이 사는 기와집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라고 상을 짓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허상에 집착했기 때문에 ‘스님들이 문제다’, ‘절이 문제다’, ‘불교가 문제다’ 하고 불평을 늘어놓게 된 거죠. 그런데 그분의 말씀은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스님이고,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너는 지금 형상에 집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꿈같은 소리 그만해라’ 하는 뜻처럼 들렸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표현할 때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고 한다고 표현합니다. 꽃이라는 게 없는데도 있다고 생각하고 꺾으려 한다는 거죠.

그때 서암 큰스님의 말씀은 제가 활동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기존의 불교에 대해서 더 이상 불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스님이라는 이름, 절이라는 이름, 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비할 이유가 없어진 거죠. 그러자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하면 그가 곧 스님이기 때문에 스님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절이니까 절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 보여준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붓다가 나무 밑에 앉아서 지내던 그곳이 지금은 성지가 되었잖아요. 아쇼카왕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기념탑이나 건축물도 없었습니다. 아쇼카왕이 붓다를 기념하기 위해서 처음 탑을 세웠을 뿐입니다. 또 스님들이 사는 집을 지은 것도 불멸 후 500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스님이고, 어느 곳이든 우리가 담마를 이야기하는 곳이 곧 절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쉬운 게 없었습니다.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가정집에 모여서 담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토회는 처음에 가정집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모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가정집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비용을 나누어 내고, 건물에 공간을 하나 빌려서 법당을 운영하자’ 하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차츰 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만들어진 법당이 코로나 이전에 200여 개가 되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법당이 전법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팬데믹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일 수가 없으니까 200여 개의 법당을 모두 없애고 온라인으로 전환했습니다. 즉, 각자 자기가 사는 집을 절로 만들자는 취지였습니다. 정토회는 시작부터 건물을 짓거나 형상을 갖추는 것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 만들어진 것이 정토회이기 때문에 저는 정토회 멤버들을 신도라고 부르지 않고 수행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승단을 개혁하려고 하다가 멈춘 것이 오히려 새로운 불교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단을 개혁하려면 일단 비판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가 그동안 해온 일은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좋다는 판단이 들면 따라오도록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종단을 시비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를 출가시킨 불심도문 큰스님은 당시 불평하는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탑 앞의 소나무가 되어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 소나무가 탑이 자기를 가린다고 불평만 하는데, 어린 소나무가 크면 소나무의 그늘이 탑을 가리게 됩니다. 탑 앞의 소나무가 되라는 말은 탑을 시비하지 말고 자신을 성장시키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는 뜻이죠. (웃음)

이것 말고도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꼭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를 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