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3-2)
96기 석정희
. 경쟁자들이 사라진 남은 싹은 땅의 정기를 혼자 빨아드리며 햇빛 듬뿍 사랑 듬뿍 쑥쑥 자랐다. 싱싱한 줄기는 화단의 나무 위로, 지붕 위로 올라갔다. 호박 줄기의 가느다란 손은 슬그머니 뻗어 무엇이든 붙잡고 탱탱 감는데 명수다. 어느 날 보니 나무 위로 올라간 호박넝쿨은 가지를 타고 골목을 건너 이웃집 옥상에 까지 가 있었다.
우리는 그 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데 호박 제가 먼저 그 집을 방문했으니 마치 자식이 허락 없이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가 서성이는 것 같이 미안했다. 몇 번 망설이면서도 그 집 대문을 두드리지는 못했다. 도시의 집들은 늘 침묵 속에 있다. 그 집도 그랬다.
그 집주인은 허락 없이 방문한 호박넝쿨을 배척하지 않았다. 초록과 노랑이 마음에 들었던 가 보다. 호박넝쿨은 자기가 주인인양 거침없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집 옥상에는 장독도 몇 개 있었고 화분들도 보였다. 식물들은 그들의 언어로 서로 인사를 했을 것이다. 적막을 헤치며 안주인이 올라와 호박잎을 따가기도 하고 줄기를 담장위로 얹어 주기도 했을 것이다.
호박 넝쿨이 그 집으로 건너가면서 골목길 위에 아취를 만들어 놓았고, 애호박들이 열려 공중에 둥둥 떠 있듯 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며 반짝 눈인사도 했을 것이다. 들판에 있었다면 그냥 지나칠 것을 희소가치가 누리는 영광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그렇듯, 뻗어나가는 길에 혼재해 있는 디딤돌과 걸림돌의 식별은 자신의 몫이지만, 주변의 도움은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게 만든다. 호박넝쿨이 지난 태풍에 날아가지 않은 것도, 가뭄에 시들지 않은 것도 애지중지 돌봐주는 덕분이다. 살아서 호사를 누리는 호박은 생각할 것이다. 죽어 거름이 되어준 형제들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사라진 그들에게는 다 쓸 때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남은 자의 마음일 뿐이다.
호박은 돌보아준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꽃을 피워냈다. 호박꽃을 가만히 들어다 보면 반기는 듯 웃고 있다. 엑스레이로 꽃을 촬영해서 연구하는 의사의 말에 의하면 엑스레이에 잡힌 모습은 호박꽃이 장미보다 더 예쁘다고 한다. 그것은 이면에 숨은 아름다움 때문이란다. 호박꽃은 활짝 핀 모습이 오종종하지 않아 좋고, 밝은 노란색은 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열어준다. 저절로 마음이 스르르 열린다. 꽃잎 끝을 돌말아 단을 댄 것도 단정하고 받들듯이 들어올리며 펴진 모습이 밤하늘의 별 같기도 하고 봉사의 상징 같기도 하다. 실제로 호박꽃은 달콤한 꿀로 벌, 나비들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호박꽃이 몸살이 나도록 드나들며 양껏 꿀을 얻어 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못난 여자를 왜 호박꽃에 비유할까? 호박꽃의 언어를 번역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몹시 화를 낼 것이다. 그녀는 말할 것이다. “호박꽃이 못 낫다고 평가하는 것에 화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기호의 문제이니까요. 들판에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내가 화나는 건, 나의 진가를 모르면서 함부로 나를 비하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나를 못난 여자에 비유하는 것은 여성에게도, 나에게도 모독입니다. 인간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요. 나를 두고 말하더라도 내재된 매력을 생각한다면 그렇게는 말 할 수 없겠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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