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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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행 이야기 (화두타파에 대한 욕심)/희명화

보현화 2010. 4. 9. 20:58

나의 신행 이야기 (화두타파에 대한 욕심) ㅣ 전체보기 2007/08/18
희명화
 
 
 人生難得이요 佛法難逢이라. (금생에 허송하면 만생에 불법 만나기 어렵다)

마음법을 공부하는 과정중에도 끝없이 생각들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몸이 있고 6식이 엄연히 작용하고 있으니 생각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안심을 하면서 더 이상 수시로 일어나는 생각과 씨름을 하지 않게 되었고 생각을 보는 순간 사라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생각은 망상이고 무명이라고 생각했고, 오직 무심만이 진여본성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생각이 덜 일어날 수 있도록 화두참구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고요하게 정에 드는 것만을 즐기게 되고 보니, 점점 행동도 민첩하지 않게 되었고, 예전처럼 잘 웃고 잘 떠들던 모습도 사라졌고, 오직 묵묵히 자신을 비춰보는 형상만 하다보니 마음은 점점 굳어만 갔습니다.
화두에 몰입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들이 모두 하찮아 보였습니다. 오직 화두를 타파하여 정법안장을 얻고 싶다는 생각 뿐이 였습니다. 점점 변해하는 저의 모습을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 가족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평소 엄마의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라고 불편함을 전해 왔습니다.
나의 수행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나 자신은 무척 편안하고 행복한데, 가족들은 반대로 예전과 다르게 거리감이 생긴다고 투정을 해오고 있으니, 수행을 한다면서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서는 잘못된 점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육조단경을 읽다가 문득 한 구절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  양선사가 예배하고 이르니 대사께서 말씀 하셨다.
“어디에서 오는가?”
“숭산입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노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다시 닦아서 증득할 것인가?”
“닦아 증득할 것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
대사께서 말씀 하셨다.
“다만 이 오염이 없는 것을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하심이며, 너도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예언하시기를 네 발 아래서 한 마리의 망아지가 나와서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니, 응당 네 마음에 두고서 속히 말하지 말지니라” ....]

오염은 없으나 닦아서 증득할 것은 없지 않다는 말씀이 제게는 큰 안심법문으로 들렸습니다. 좌복에 조용히 앉아서 화두 참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홀연히 올라오는 한생각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공부의 진전이 없음을 불안해 하고 있었던 저에게 안선맞춤과 같은 법어였습니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쳐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수백 생을 윤회해 오면서 길들렸던 업습을 어찌 단숨에 베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 글귀를 접한 뒤 저는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들고 있던 ‘무’자 화두를 관하면서 다른 화두들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제 마음과 계합이 되는 화두를 보는 날이면 그렇게 기분이 통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 수록 제 마음은 점점 단단해져만 갔고 다양한 선어록에 손길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 (대 발심) ㅣ 전체보기 2007/08/16
희명화
 
 
 
절을 할 때도 간절한 내가 있었기에 몸과 마음을 조복했고, 좌복에 앉아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을 때도 청정한 내가 있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도 한걸음 한 걸음 발자욱을 옮기는 온전하게 깨어있던 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앉아서 온갖 망상을 부리고 있는 것도 나고, 깨닫겠다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것도 모두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진짜 나는 누구인가?....................
알고 보니 모두가 나의 진공묘유였습니다. 온통 참나 뿐이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감격에 넘쳐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로전 응작여시관.

불성은 항상 나와 함께 있었건만, 단 한번도 그것과 만나지 못했고, 바깥경계에 따라 휘둘리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지금까지 시간을 허비하고 왔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수많은 제불보살님들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했던 저의 어리석음에 깊은 후회감이 일어났습니다. 온 천지가 문수와 보현으로 보였고 나 역시 천백억화신으로 화현하는 부처였습니다.
그 후 저의 공부는 점점 힘이 붙게 되었고, 간화선에서 임제선법이 가장 강하고 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제선원의 법현스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도 선객들은 스승을 찾아서 수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 나섰다는 말이 있듯이, 공부에 맥을 잡고 보니 좀 더 여실하게 견성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고 다시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고, 스님께서는 공부하다가 궁금증이 생기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서 물어 오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가난한 스님이면서도 법을 팔아 밥을 사려는 생각을 전혀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스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제 공부길에 손을 잡아 주셨던 여러 선지식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하루 빨리 깨달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배웠던 ‘비하라 호스피스’ 교육을 통하여 경희의료원 호스피스병동에서 호스피스환자들을(임종예정자) 대상으로 정신적 케어를 하는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불교상담개발원에서 상담교육을 이수한 뒤 ‘자비의 전화’ 상담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전생에 지은 복이 없어서 이 생에서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갖지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나는대로 복을 지으려고 욕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과 조상님이 물려주신 건강한 몸과 깨끗한 마음으로 남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넘치는 감사함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제가 하고 싶은 전법활동을 충분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오직 바른 깨달음으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였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 (대 의심) ㅣ 전체보기 2007/08/16
희명화
 
 
묵조선은 달마에서 5조 홍인까지 전해 왔던 수행법으로 (先修後悟), 묵묵히 오랫동안 좌복에 앉아서 호흡을 관하고 헐떡이는 마음을 쉬며 사량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방법입니다. 점점 마음이 쉬게 되면 선지식을 찾아가 공안으로 점검을 받고 인가를 받게 되는 것이 간화선과 비슷해 보이지만, 묵조선은 처음부터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고 정혜쌍수, 선정후혜를 말합니다. 간화선은 돈오돈수를 말하며 단박에 몰록 깨치는 언하대오를 강조합니다.
천마산 선원에서 공부했던 관법수행과 묵조선을 포기하고 간화선을 배우려고 새로운 공부도량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의심으로 가득 찼던 제 마음을 속 시원하게 답을 내려줄 선지식을 찾기로 했습니다. 조계사 근처에 있는 수선회에 입방하여 간화선의 기본교리에 대하여 배우고 나서 현담 회장님으로부터 ‘이 뭣고’ 화두를 받게 되었습니다.
 
선방에 앉아 화두를 관하면서 자꾸 관법수행과 혼돈이 되었습니다. 제가 했던 관법수행은 제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번뇌 망상을 여실하게 바라보면서 망상이 망상인 줄 알게 되면 생각을 갖고 생각을 없애려는 수고를 해왔었습니다. 일어나는 파도를 생각으로 가라 앉히는 작업을 해온 것같습니다. 그러나 참고 참았던 망상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오랫동안 망상을 잠재우려고 애를 써야했습니다. 인욕바라밀로.........
(진정한 인욕은 참는다는 생각없이 참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수지수)

참선을 하면서도 매 순간 일어나는 한생각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망상이 없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만 일어났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깨달음은 망상과 번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것은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참나>를 찾는 것이였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 뭣고? 제불보살과 역대조사와 천하 선지식들이 한결 같이 찾아 헤매던 <참나>를 나 역시 알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지니고 있으니 찾아 보라’ 하셨던 말씀이 제게는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화두를 받고 좌복에 앉아 답을 찾아내려고 제 안에 있는 제7 말라야식을 총동원해서 사량분별을 해가며 이치로 따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 마음은 답답함으로 가득했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되지 않았습니다. 화두공부를 포기 하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냥 살아도 되는 것을 왜 공연히 맨살에 상처를 내고 있는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동안 불법의 대의를 알고 싶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법을 탁발하러 다녔던 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 (대 신심) ㅣ 전체보기 2007/08/15
희명화
 
 
<< ...대덕 부루나시여, 정신을 집중하여 저 비구들의 속마음을 잘 관찰한 다음 법을 설하십시오. 보석으로 만든 그릇에 썩은 음식을 채우지 마십시오. 먼저 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소서. 유리를 수정으로 혼동하지 마십시오.
대덕 부루나여, 중생의 근기를 살피지도 않고 그릇이 큰 사람을 작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상처 나지 않은 곳에 상처를 내지 마십시오. 큰 길로 가려는 이를 작은 길로 안내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가두어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집어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태양빛을 반딧불로 바꾸어 놓지 마십시오. 사자후 소리를 여우 소리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유마경. 부루나의 설법 중에서] >>

그동안 포교현장을 찾아 다니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무척이나 후회스러웠습니다. 제 한 몸도 바르게 깨치지 못하고서 남을 구제하겠다고 다녔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 위하여 마음 도리를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가 보았던 경전들은 대부분 대승경전들이였는데 그 속에도 심지법문이 실려 있었건만 불법의 핵심종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문자에만 끄달려 왔던것 같았습니다.

선원장 법회에 동참하면서 스님들께서 하시는 한마디 한마디가 새롭게 들렸는데, 아는 법우님에게 여쭤보니 그런 말씀들은 선어록에 모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장 책방으로 달려가서 선어록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속에는 그동안 선사님들이 설하셨던 법문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으며,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과 계합이 되는 문장이 나오면 너무나 신기했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귀들은 혼자 힘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어록을 바르게 공부하고자 마음을 먹고 있을 때, 잘 알고 있는 법우님으로부터 스님을 소개 받게 되었습니다.

선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성본스님을 만나게 되어 신심명, 증도가, 임제록, 무문관, 육조단경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우리 생활 속에서 활용하고 있는 선의 생활과 연계 시키면서 수강생들에게 아주 열심히 불법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성본 스님처럼 많이 배워서 불법을 잘 전하는 부루나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께 부탁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운영하고 있던 대학생 법회때 쓸 스님의 저서 ‘반야심경’을 몇 권 달라고 했습니다.
“ 스님... 학생법회 때 필요해서 그러는데, 반야심경 몇 권만 주십시오.....”
“몇 권이 필요한데? ”
“스님, 제 능력만큼 주십시오.....”
“자네 능력으로 따지자면 단 한권도 줄 수 없지, 그렇지만 법회에 오는 학생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하하하...........”
저는 순간 방바닥을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스님의 생각은 너무나 지당하셨기 때문이였습니다. 사실 그 때 제 스스로 반야심경을 확실하게 통찰하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후 더욱 발심하여 열심히 경전과 어록을 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통한 실참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원력을 세우고 있을 즈음에, 불교카페를 통하여 다양한 구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선지식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 순간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기도를 올리면서 저의 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선원장 법회을 듣고서) ㅣ 전체보기 2007/08/14
희명화
 
 
위빠사나를 배우고 묵조선을 배우고서도 확연하게 마음 법을 알 수 없었던 것은 저의 배움에 대한 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더 늦기 전에, 이 생이 끝나기 전에, 제대로 불법을 만나서 꼭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선지식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큰 스님들은 지방에 계셨기에 가정주부로서는 쉽게 선지식을 찾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참선공부 하는 곳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저녁 시간 이였기에 가족이 모여 있는 저녁시간에는 집을 나서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참선을 배운다는 것은 마음 뿐 이였고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계사에서 전국 선원장 법회가 있다는 소식을 현대불교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불기 2548년 5월은 제가 깊은 꿈속에 잠들어 있다가 활짝 깨어나는 날 이였습니다. 신문 지상으로만 뵙던 큰스님들을 한자리에서 매 주 만나 뵐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뿔 수가 없었습니다.

고우스님께서는 ‘본래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난 자리를 돌이켜 비춰보는 ‘회광반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수행법을 닦더라도 우리가 본래부처 임을 꼭 믿고 해나가면 된다고 하십니다.
(제 소견 : 묵조선에서는 늘 회광반조를 강조했으며 한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했습니다. 단지 화두가 없었을 뿐이였습니다.)

대원스님께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안심입명처’ 라고 하시면서, 우리 중생이 갖고 있는 욕심과 욕망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제 소견: 마음은 공성이기에 연기법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욕심과 욕망의 실체가 없음도 알게 되기에 고통도 없습니다.)

도현스님께서는 정법을 바로 알려면 우선 부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면서, 부처님은 어떤 자세로 일상생활을 하셨으며, 어떤 인격을 갖추셨는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소견: 부처님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인간 붓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현웅스님께서는 현실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만나고 있는 간화선 수행에 대하여 간결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소견: 불자님들이 절에 가서 스님께 고통을 호소하면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해라’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그러나 스님들께서는 고통의 원인을 살펴서 사람마다 근기에 맞는 방편을 써서 얽힌 실타래를 풀어 주어야합니다.)

선원장 법회에 매 주 동참하면서, 오랫동안 제 안에 갈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의심들이 한꺼번에 쏱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저의 신행생활이 바로 수행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행과 수행이 다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보니 그 동안 제가 활동해온 모습들이 바로 부처님 마음에서 작용한 것이였습니다.
오랫동안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생각하며 저 멀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신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 바로 작용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성의 작용을 통하여 부처님은 늘상 나와 함께 먹고 자고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법당 안에 앉아 법문을 들으면서 조용히 환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구도자) ㅣ 전체보기 2007/08/10
희명화
 
 
 
매 월 셋째 주 일요일 날이면, 부산 범어사의 산내 암자인 원효암에 계신 큰스님께서 이곳 서울 선원에 오셔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큰 스님의 법문내용이 제게는 한 달 먹을 양식이 였습니다. 그곳 선원에 계시는 주지스님의 법문보다 오히려 큰스님의 법문이 제게는 쏙쏙 들어왔습니다.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의 염화미소를 지었다고 했듯이, 큰스님의 말씀은 제 가슴을 아주 시원하게 만들어 주셨으며 한 달 동안 저자거리에서 마음껏 법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셨습니다. 한 달에 한번 큰스님이 오시는 날 선원을 찾아가는 제 발걸음은 아주 신명이 났었고 늘상 설레임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큰 스님과의 단독면담은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직 대중법문을 통해서만 스님과 마음을 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큰스님은 뵈려면 원주보살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 절차가 의외로 까다로웠고 복잡 미묘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돈 없고 빽 없는 저는 그냥 법당 뒷자리에 앉아서 (앞자리는 선원 임원진들의 차지였음)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듣는 법문으로는 제데로 실참 실수가 되지 않았기에 좌복에 앉는 힘을 키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선회’에 입방을 하여 세 차례 안거도 마쳤고, 송광사 수련회도 두 차례 다녀왔으며, 우리 선원에서 하는 여름 수련회도 몇 차례 동참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한 용맹정진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우리 선원에서는 화두선이 아닌 묵조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좌복에 앉아서 면벽을 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벽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지를 않아서 오랫동안 헤메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화두라는 것이 없었기에 위빠사나를 하는 사람이나 묵조선을 하는 사람들은 화두선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절기도만을 해오던 제가 참선을 시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였습니다. 참선할 때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 좌선을 할 때는 결가부좌가 불편해서 반가부좌로 시작은 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금강과 같이 견고한 결가부좌로 돌아와야 합니다. 좌선의 요령은 몸을 반듯하게 하는 것이기에 정좌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리가 아파서 오랫동안 같은 모양을 취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꾸게 되는데, 그 때에도 쉽게 바꾸지 말고 하나하나 몸의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꾸는 것이 깨어있는 수행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음에는 눈을 감지 말아야 하며 자주 깜빡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깜빡이더라도 천천히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깜빡여야 합니다. 다리가 아파오다가도 온갖 망상이 들어오면 아픈 줄도 모르고 생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다가 좀 편해진다 싶으면 잠이 쏟아집니다. 그것을 혼침 이라고 말하며 좌선 초기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좌선의 자세가 잡히면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면벽을 할 때도 처음 입정에 들어가려면 호흡으로 집중을 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여 ‘일어남 일어남 사라짐 사라짐’ 하면서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합니다. 이와 같이 묵조선이든 화두선이든 처음 입정에 들어갈 때는 호흡법을 똑같이 사용합니다. 좌선시 호흡을 관하면 망상도 제거 할 수 있고 자세도 바르게 고칠 수 있습니다.

일단 제대로 호흡이 조절되고 몸의 균형이 잡히면 면벽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관하는 회광반조의 수행을 하게 됩니다. 면벽수행의 장점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섬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선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법우들은 모두 말을 삼가고 있어서 공부에 대하여 탁마를 한다거나 의심을 솔직하게 내놓고 서로의 부족함을 상의하는 일은 무척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의심이 유독이 많은 저는 간간이 낯익은 고참 거사님에게 질문을 하게 되면 종종 ‘저는 잘 모르는데요....’ 하며 답변을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선이 이렇게 답답한 것이 아닐텐데...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병을 고치려고 이곳 선원을 찾은 지 벌써 6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속 시원한 ‘불법의 대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 말고 마음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다른 수행법을 찾고 있을 때, 조계사에서 ‘전국 선원장 법회’가 있다는 소식을 현대불교신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 (스승을 찾아서) ㅣ 전체보기 2007/08/10
희명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불교방송을 들으면서 예불도 모시고 법문도 들으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교리공부를 했습니다. 포교사가 된 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전법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유명한 법사님들의 강의가 있는 곳이라면 찾아다니며 듣기도 하고 경전을 구입해서 밤새워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고3 수험생 때 보다 더 열심히 책과 씨름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교학적으로 조금씩 불법에 눈을 뜨기 시작할 즈음에 나의 삶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지지 않고 있음을 항상 불안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 왜 나는 끝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제 자신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저를 믿고 있는 주위의 불자님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항상 내 안에 가득했습니다. 훌륭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으면서 정작 내 안에서는 온갖 망상과 분별이 가득 차 있음에 대한 불안감이 도리어 부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음공부를 해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어서 참선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법우님의 소개로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선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버스길에서 천마산 자락으로 한 시간 정도 산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저에게는 차량이 없어서 그냥 걸어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길을 오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나는 병이 들어있다. 명의를 찾아서 나의 불안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 꼭 나에게 도움이 될 스승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혜가가 달마대사를 만나러 가서 ‘저의 불안한 마음을 없애주십시오’ 했던 것처럼 내 마음도 너무나 간절해 있었습니다.

그곳의 선원장 스님과 처음 대면을 했을 때 스님께서 제게 던진 첫 말씀이
“자네는 어디서 온 놈인가? 힘은 있어 보이는데 이것은 무슨 힘일까?” 하십니다.
“저는 어느 포교당에 다녔는데, 지금은 마음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아는 만큼 생활 속에서 실천이 안되고 늘상 분별심이 치성합니다. 스님... 도데체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요? ”
“보살은 이곳에서 공부하기가 힘들 것 같으니 그냥 내려가시게........”
하시며 방문을 나가 버리셨습니다. 순간 저는 스님의 매몰찬 행동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접견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올라왔던 산길을 다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세간에서 훌륭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스님은 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냥 함부로 하신 말씀은 아니실텐데,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 민망함을 주셨을까? 하는 이런 저런 분한 생각들이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 가득 찼습니다. 공부를 배우러왔다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냉정하게 하신걸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며칠 후 다시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죽을 각오를 하고 아랫 배에 힘을 꽉 주면서 스님께 한 말씀 건넸습니다.
“스님... 스님은 깨달으셨어요? 깨달은 분 만이 저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하........ 저~ 못 깨달았어요~ ”
아주 재밌어 하시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시는 스님의 밝은 모습을 뵈면서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순간 고개를 들고 스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합장을 올렸습니다. 그 후 스님과 인연을 맺고 열심히 선원을 다니면서 마음을 관하는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행 이야기 (끝없는 기도) ㅣ 전체보기 2007/08/08
희명화
 
 
불법을 공부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복이 있어야 한다. 시간복, 건강복, 돈복이 따라야지 공부할 분수가 생기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듯 싶기도 합니다.
 
새로 오신 스님께서 6년 만에 또 우리 포교당을 매매하고 말았습니다. 항간에서는 조계종이 아닌 종파에 팔았다느니 하면서 신도와 스님 사이에 아주 복잡한 말다툼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하여 한탄을 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나는 스승복도 없고 절복도 없을까? 스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불법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절간이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 ” 그 후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처님의 유훈이신 자등명 법등명이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사찰에 매이지 말고 스님들의 가사와 장삼에 유혹되지 말고 널리 세상 밖으로 나가서 불법과 인연이 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전파해야겠다.”

제가 10년 동안 다니던 포교당을 떠나면서 어린이법회도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저는 사찰을 조계사로 옮기고 부처님의 정법을 배우기 위하여 조계사불교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에서 실시하는 포교사고시에 합격하여 여법하게 포교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터는 법화경 법사품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래의 방에 앉아,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말씀을 널리 전하리라.’ 가슴깊이 다짐하였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조계사에서 함께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저는 더 이상 사찰에 매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산업대학 불교동아리를 매 주 찾아가 법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북서울중학교에서 특별활동시간을 이용한 불교반 운영을 월 2회 찾아가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의정부에 60여명의 고아원생들이 모여 있는 선재동자원을 어린이팀 포교사들과 함께 매 주 찾아가 어린이법회를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하고 싶은 포교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외부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가정 일에도 한 점 소홀하지 않으려고 저녁시간 만큼은 지켜서 가족들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봉사활동을 한다면서 가정 일에 소홀한 모양새는 옳지 못하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기에 항상 저의 몸과 마음은 절제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나름대로 ‘계율을 잘 지키는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틀에 정해진 듯한 나의 일상들 속에서도 나의 마음은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행복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안고 다니던 의심이였던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길을 알려 줄 스승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에 들어 갔습니다. 언제나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 뿐 이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는저의 서원을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