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불교&자료&관심사●/불교이야기·불교뉴스

길상사 무소유 법정스님과 길상화 보살

보현화 2011. 9. 19. 20:30

▶ 글출처: 맑고 향기로운 도량 길상사, 법정넷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공덕주 길상화

 

길상화(吉祥華) 김영한님(1916~1999)은 일제치하,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성장하다.

16살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분단 조국의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편의 수필과(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하규일 선생 약전)(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내기고 했다.

 

 

 

 

일찍이 그녀는 바위 사이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배밭골을 사들여

잠깐 청암장(靑岩莊) 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되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은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후 10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그저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 평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그녀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있었다.

1999년 11월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10월7일에는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지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다.

 

 

 

  

법정스님은 누구인가?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가꾸는데 앞장 선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했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6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하셨다.
그 뒤 스님은 <불교사전>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내셨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영혼의 모음> 을 동서문화원에서 출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73년 6월에는 함석헌이 주도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합세하면서 씨알의

소리의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스님은 또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기관원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되어 마음이편치 않았다.”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당시의 심정을 스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

(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님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19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가셨다.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쓰셨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34년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무소유>이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았다.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나신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 등쌀에 그조차 뒤로 하시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드셨다.

1992년 일이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하셨다. 그 어이없는 심정을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로 발표하신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신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시겠다며

1993년 8월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조의 대중 강연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2010년 3월 11일 열반하실 때가지 17년 간 이끌어 주셨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법정 스님의 이와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한평생 청정하고 올곧게 수행하며

대중들 영혼을 맑히는 이 시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처럼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사셨다.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이렇게 맑은 삶을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무엇보다 스님의 간결하면서도 쉬움 말씀은 일반 독자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데

큰 발자국을 남기셨다. 1976년 범우사에서 펴낸 <무소유>는 초판 발행 한 뒤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명 에세이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밖에 <산에는 꽃이 피네>,

<일기일회> 들은 수십만 독자가 찾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