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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수필]문양역? / 이동민

보현화 2013. 3. 24. 22:58

문양역 / 이동민

 

 

 

대구를 가로지르는 2호선 전철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서편의 종착역이 문양역이다. 나는 도시의 동쪽에 살고 있으므로 문양역까지는 한 번도 갔던 적이 없다.

7월의 동기회 모임은 무더위를 피하여 야외에서 가지기로 하였다.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12시까지 문양역에 내리라고 하였다. 그곳에 모이면 식당버스가 데리러 온다고 하였다.

전철역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 어쩐지 도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지하철은 바로 현대 도시를 은유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팔공산 자락에 있는 식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문양역에 모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다사역을 지나면서 전동차는 7월의 햇살이 퍼붓고 있는 지상으로 나왔다. 차창을 통하여 보이는 풍경은 햇살 속에 풋풋한 생기가 뿜어 나오는 한여름의 들녘이었다. 멀리 산자락 밑에 몇 동의 현대식 건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유일한 도시의 잔재라고 할까. 지하철 전동차는 내가 갑자기 낯선 세상을 만나서 어리둥절하게 하는 요술을 부렸다. 산자락에 있는 역사만이 도시의 풍모를 지닌 채 우뚝 서 있었다. 자하철 역사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낯설었던 것이다. 이곳에 서니 마치 꿈을 꾸듯이 내려오니 더운 열기가 후끈거리면서 덮쳐 왔다. 전동차 안의 찬 공기에 움츠려 있던 피부에 물기가 칙칙하게 배어들었다. 커다란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여기가…’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친구들을 찾았다.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홀의 쉼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멍히 앉아서 초점 없이 한곳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옆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조용하고, 착 가라앉아서 무거워만 보였다. 제법 말쑥하게 차려 입은 노인도 있었고, 행색이 허름한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조용하게 앉아 있기로는 모두가 같았다.

어쨌거나, 그들 나름의 긴 행로를 지나서 이곳까지 온 것은 틀림이 없다. 그들이 지나온 삶의 여정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의 행색을 미루어서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친구들이 보이지 않아서 바깥으로 나왔다. 역사의 마당에는 몇 그루의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시골의 정자를 잚은 건물도 서 있었다. 사람들이 빈자리가 없도록 앉아 있기로는 홀의 쉼터나 다를 바 없었다. 앉아 있는 노인네의 얼굴과 자세를 똑같이 닮은 친구들이 여기에 있었다. 반갑다고 손을 번쩍 들어서 환영해 주었다.

눈앞에는 자란 벼들이 검푸른 색을 띠면서 온 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들녘의 끝자락에는 녹음으로 뒤덮인 낮은 산줄기가 길게 흐르고, 산마루 위에는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 있었다. 유년을 보냈던, 시간 저 너머의 시골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지하철의 종착역이 바로 시골의 한가운데라니, 과거로, 과거로 끝없이 달려가서 내 유년이 펼쳐지는 시간의 끝자락까지 데려다 주다니.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양역에 처음 와 본 내가 신기해 하니까 여기를 잘 안다는 친구는 별 다른 일이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 해주었다. 요즈음의 지하철은 경로우대증을 가진 노인들이 무임으로 차를 탈 수 있다고 하였다.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전동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면서 흐르는 시간을 즐긴다고 하였다. 문양역에 특별한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고 여기가 종착역이니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차가 더 가지를 않으니까 문양역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그냥 여기까지 와서 아까울 것 없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구나. 기차가 실어다 주는 대로 여기까지 왔구나.’

이들이 동쪽의 종착역인 사월역에 가지 않는 이유는 사월역은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서 마땅히 쉴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노인들이 많이 모이니까 말 벗도 생기고…. 더러 연애도 한다더라. 친구는 이 말을 하면서 큭큭하고 웃었다. 종착역, 노인, 그리고 인생의 황혼이라는 말들이 연애하고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서 웃었을 것이다.

‘서쪽의 끝이라고….’ 나는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니 죽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문양역은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는 사람들과 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의 서쪽 끝에서 만난 문양역 앞은 시골 풍광이 펼쳐져 있어서 나를 유년 시절이 고향 들녘으로 데려다 주었다. 유년은 내 인생의 출발점이 아닌가? 지하철이 끝나는 곳에서 내 인생의 출발점을 만나다니, 끝이 바로 시작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쉼터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노인들이 지하철 전동차를 타고 생활의 현장이기도 한 도시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년의 추억을 만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을 만나러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출발점이 데려다 주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삶이 분명히 있으리라 믿으면서 문양역을 찾아왔는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문양역에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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