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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가 강의한 노자, 한국인이 꼭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보현화 2014. 12. 2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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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가 강의한 노자, 한국인이 꼭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분류없음 2013/10/17 13:25

(2013.10.17) (아래 내용에서 불온한 인문학의 공저 최진석은 동명 이인)

 

꼭 언급하고 싶었는데 깜박 빼먹은 대목이 있네요. 최진석 교수가 아들이 이메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답하겠습니다' 하자, 답을 하기를 '나는 너를 위해 산 적이 없다. 그러니 보답할 생각 말고 너는 너를 위해 살면 된다'라고 했다고 해요. 이런 개인주의적이고 대범하고 cool함이 한국인들에게 요구되요. 아이가 그렇게 듣기 좋은 말로 착하게 이메일을 썼는데 이렇게 냉정하고(그래서 cool하게) 답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최진석 교수가 강의한 노자, 한국인이 꼭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최진석 교수가 2012년에 도덕경 해설서를 폈고, 아마도 이 책의 반향이 좋아서 ebs에서 올 봄에 인문학 특강 프로그램에서 최진석 교수 강의를 했던가 싶어요. 최진석 교수의 책 목록을 봤더니 인문학에 대한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도 있고 여러 명이 공저로 한 '불온학 인문학'책도 있네요(요 공저는 연구그룹인 수유 너머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네요). 다 조금씩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EBS 강의는 14편인데, 마지막 편은 특이하게도 청중과 강사의 질의 응답 시간이었어요. 기대는 안했는데 요 편도 아주 좋았어요. 어쩌면 요 편을 먼저 보는 게 문제의식을 갖는데 대단히 좋다고 생각해요. 요 마지막 편이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전반의 핵심 포인트들을 다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질문하는 청중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생생하고 실천적이에요. 역시 한국의 대중이 '지식인 직업'갖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진지하고 문제의식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진석 교수가 질문의 의도를 잘 헤아리면서 진중한 태도로 그리고 추가 지식을 잘 섞어서 잘 답변하고 있어서 컨텐츠도 있어요.

 

14편에서 질문으로도 등장하는데, 역시 노자의 핵심단어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욕망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키워드죠. 그래서 최진석 교수가 노자를 현대의 철학자라고 보는 게 그냥 옛날 것을 억지로 현대적 의미로 포장했다고 볼 수 없이 근거가 있다는 거에요.

 

욕망은 모더니즘 시대에서 온전히 존중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모더니즘 시대는 돌이켜보면 규범체계가 가장 발달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어요. 프로이트가 20세기 초 욕망을 빅토리아시대의 위선으로부터 자리를 찾아주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모더니즘은 가장 강도높고 통제가 강한 일의 규범을 만들어 높은 사회에요. 9 to 5, 5 weekdays는 일견 자본주의 초기 노동착취보다는 나아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류 역사 전반을 놓고 보면 이렇게 인류가 통제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규범 체계에요.

 

욕망이 규범과 대립구도를 형성한다고 할 때 규범을 대표하는 사상 체계는 공자 그리고 유가이죠. 그래서 노자/도가는 공자/유가와 대립구도를 상정하고 논의를 전개하죠. 반면에 공자/유가는 굳이 노자/도가를 언급할 필요가 없죠. 규범을 강조하는 측은 그 자체로 테제를 형성하니까요. 반면에 노자/도가는 공자/유가에 대해 안티테제로서 위치짓기 때문에 공자/유가를 비판대상으로 상정하는 것이죠.

 

규범과 욕망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대립할 수 없는 구도에요. 비록 공자와 노자가 2,500년 전 사람들이지만, 이미 인류를 관통한 대립구도를 간파한만큼 공자와 노자는 영원한 classic일 수밖에 없죠. 이후에 인류의 많은 논의와 논쟁들이 결국은 주석의 의미를 못 넘죠. 그리고 대체적으로는 규범이 dominant하겠지만, 규범이 갖고 있는 도그마적인 한계로 인해서 욕망은 지속적으로 도전하죠. 그래서 때로는 욕망이 dominant한 시대도 맞는 것이죠.

 

규범이라는 단어는 무겁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나름 편하게 다가오죠. 반면에 욕망은 좋기는 하지만 대단히 죄스럽게 다가오고 그 마음을 숨기거나 억누르고 싶어지죠. 규범을 따르는 것은 힘들지만 당당하게 여겨지구요.

 

규범과 욕망은 거의 매순간 순간 우리의 삶에서 선택에서 기로에 놓이게 해요. 제가 미국유학하면서 혼자서 살다보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게 되는데, 규범적으로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편해져요. 늦게 일어나니 늦게 자고 그러니 또 늦게 일어나죠. 그럼에도 아침에 눈이 떠지면서 의식이 들 때 늘 고민하죠. ', 유가의 삶을 살 것인가? 도가의 삶을 살 것인가?' 전자라면 발딱 일어나야 하고, 후자라면 더 뭉게는 것이죠.

 

프랑스의 바카로레알의 철학 문제 중에 저한테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질문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가?' 였어요. 철학 문제인만큼 이 질문이 갖는 철학적 맥락을 짚어서 서술해가야 겠죠. 서양인 역시 규범과 욕망이라는 대립구도에서는 동양과 다를 게 없으니까 서양 철학에서 그 논의의 구도를 잡아낼 수 있겠죠. 그런데 아무리 학교에서 서양 철학을 배우고 그리고 지금도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서양철학을 접한다고 해도, 별로 시간도 들이지 않은 동양 철학에서는 그 논의구도가 금방 떠오르는데 반해서 서양철학에서는 딱히 안 떠오르는 거에요. 이래서 철학이라는 게 다만 교과서의 지식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내제된 소양이라는 것이죠. 딱히 공부를 안했어도 왠만한 동양 사람에게는 유가와 도가의 대립구도가 규범과 욕망(자유)라는 것은 의식하기도 하고, 비록 의식못했을지라도 한번 설명 들으면 팍 감이 오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의 문제를 고민할 때 그 답을 서양에서 찾기 보다는 동양의 고전에서 찾는 게 좋아요. 서양의 고전을 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도구로 쓰라는 거에요. 그리고 동양 철학은 재료로 쓰구요. 서양 철학이라는 도구에 의해 다시 조명되는 동양철학은 적어도 동양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쉽게 문제의 해법을 제공하는 것이죠. 서양 철학이 상당히 정교한 언어의 틀로서 인간과 근대성을 다루죠. 그래서 알게 모르게 동양인에도 그게 친숙해져 있죠. 그런데 동양 사람 것이 되기에는 거리가 있어요. 그래서 서양 철학을 잘 아는 사람이 동양철학을 조망해주면 대단히 효과가 높은 것이죠. 반면에 서양철학에 안 익숙한 채 옛날 스타일로 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의 설명은 거의 귀에 안 들어오죠

 

욕망을 강조한다고 할 때, 우려되는 게 있죠. 세상 사람들이 다 규범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하겠다고 한다면 세상이 유지되겠는가? Hobbs가 염려하는 바와 같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있지 않겠는가?

 

14편에서의 질문 중의 하나가 이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무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유위가 자리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노자에게 있어서 무위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욕망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진석 교수가 그 질문에 동의한다고 답변합니다. 성철 스님이 본인은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놓고 사람들에게는 '책 읽지 마라'라고 했다고 해요.

 

최진석 교수가 더는 설명을 안 했는데, 저는 그 질문이 바로 공자와 노자의 공통기반을 짚고 있다고 봅니다. 공자와 노자 공히 인간에 대한 또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봐야 해요. 공자는 인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 본성이라고 여기죠. 공자는 본성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쓰지 않지만요. 다만, 그 인에 기반해서 좀더 formality를 만들자는 것이었죠. 이게 ''. 그리고 개인의 실천윤리를 확대해서 정치철학으로까지 가져가는 것이죠. 공자의 요러한 인식은 칸트의 실천이성과 다를 게 없다고 여겨집니다.

 

노자는 공자처럼 그러한 근거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가 바라본 자연에서 충분히 자신감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자연을 보면 딱히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닌데 조화롭게 세상이 움직이쟎아요. 마치 Adam Smith '보이지 않는 손'을 제시하는 것과 비슷해요. 이런 점에서 노자는 대단히 서양의 liberalism의 전통과 흡사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제가 감히 의견을 붙인다면, 저는 인간은 충분히 남을 위한다고 여겨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인류가 존속되지 못했을 것 아니에요.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Dawkins가 잘 설명하는 바와 같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남을 챙겨야 하는 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운명이죠.

 

최진석 교수는 '노자의 정신'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는 일반론만 제기한 게 아니라 한국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요. 14편의 질문 중 하나가 '왜 한국인들이 이렇게 자살을 많이 하는가?'였죠. 최진석 교수는 한국인들이 너무 획일적이고 그리고 강한 고정관념화된 규범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에요. (정말 생계라던지 피치 못할 사정도 있겠지만), 청소년이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정말 한국적인 난센스라는 거에요.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성장하고 행복하자고 하는 수단에 불과한데 한국은 공부 성적이 무지하게 우선 순위가 높은 규범이 되버렸다는 것이죠.

 

한국인들의 획일화된 규범체계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발목으로 작용해요. 그리고 무지하게 많은 자원낭비를 가져오구요. 10% 정도의 고도성장을 하는 시기는 다양성 보다는 몰려 다니는 획일성이 효과가 커요. 대량으로 일정 표준 이상의 능력을 갖추게 해서 기업으로  빨리 보내는 게 급선무쟎아요. 그런데 지금의 한국은 그렇게 몰려다녀가지고는 일자리도 못 만들어요. 지금은 일자리가 대량으로 존재한다가 보다는 틈틈이 niche처럼 존재하거든요. 그런 niche 일자리를 찾아가야 하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만들어야 해요. 그러러면 사람들이 대단히 다양해야 합니다.

 

비유를 들면, 병에 공을 담는다고 할 때 빨리 그 공들의 부피를 늘리는데는 똑같은 규격의 공들을 집어 넣는 게 좋아요. 그런데 일단 그 병이 기존의 공들로 차버렸다고 할 때는, 보다 작은 공들을 집어넣어야죠. 공들의 규격을 줄여가면 사실상 무한대로 넣을 수 있죠.

 

이렇게 한국은 이제는 빨리 키우는 게 시대가 아니라(그렇게 될 수도 없구요), 촘촘히 채워야 하는 시대에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여전히 대량생산시대의 사고에 젖어 있쟎아요. 남들하는 데로 안하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고 하쟎아요. 그러니 밤 12시까지 아이들을 획일화된 학원에 보내는 것이죠.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구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개성(개인의 욕망의 표현)에 안 익숙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도 자기 것을 못 찾아요. 이렇게 되면 어차피 모두가 보기에 괜챦다고 여겨지는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못 먹더라도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몰려들쟎아요. 이게 거대한 자원의 낭비인 것이죠.

 

최진석 교수는 불가피하게 한국의 인문학의 과제를 '한국인이 2류에서 1류로 넘어가냐 그렇지 못하냐'는 생존의 문제라고 봐요. 2류니 1류니 하는 게 인문학자가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개념은 아니죠. 더군다나 규범 체계나 순서 가르기에 대해 비판적인 도가 철학자가 하고 싶은 바는 더욱더 아니죠.

 

그런데 한국의 2류성이 다만 1등 지향성이라는 외연적 가치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에요. 한국의 2류성이 한국인의 고통의 원천이죠. '천천히 제대로' 해서 가치 높은 산출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후다닥 건성으로'하면서 질 낮은 산출물을 만들쟎아요. 그러니 노동시간은 길고 부가가치는 낮은 거죠. 또한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을 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구요. 만든 사람 입장에서 봐도 후지기도 하고, 그리고 정신사납게 일하느라고 고통스럽게 가족도 희생시키면서 사는 것이죠. 그러니 한국인들이 전문성도 떨어지고 자기 만족도도 떨어지는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이죠.

 

21세기에 산출물은 개성이 담겨야 해요. 개성이 담겨야 비로소 경쟁력이 있어요. 획일화된 물건 만드는 것은 천상 부가가치가 떨어져요. 한국의 서비스업이 경쟁력이 없는 게 서비스업이야말로 정말 개성이 요구되는 산업이기 때문이에요. 그냥 되는 대로 만들어내는 식사값은 5,000원이지만, 요리사의 내공이 가미되는 식사값은 수십 만원이거든요. 한국인들이 그런 식사를 못 만들어내요. 그리고 그러게 값을 쳐주지고 못하구요. low valuation trap에 빠져 있는 것이죠.

 

한국인들이 창의성이 없니 하는 게 하루 이틀 듣는 게 아니죠. 그래서 정부정책도 혁신경제니 창조경제니 화려하죠. 그런데 그런게 먹힌다고 보는 사람은 없죠. 왜냐면 대중의 삶은 그런 화려한 개념들이 겉도는 구호로밖에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어요. 일상의 삶은 극히 비혁신적이고 비창의적인데, 어떻게 위에서 제시한 의제들이 먹히겠어요. 구호로밖에 안 받아들여지죠.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의제와 제도와 정책이 제시된다고 해도 결국 대중이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이 변화된 사회에 맞춰서 그 윤리적 실천 양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해요. 개인 차원의 윤리로 환원되서도 안되지만, 개인들의 윤리적 실천의 토양을 무시하는 제도나 정책은 아무 소용 없어요. 그것들이 또한 거대한 기회비용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윤리적 자각'은 중요하고, 그래서 여전히 노자와 같은 고전이 소중해요. 현대적으로 그 의미를 재해석해서 중요한 자산 밑천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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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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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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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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