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고교 은사인 K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서울 광화문으로 소집하셨다.
은퇴 후 경기 성남시 분당에 살고 계시는 선생님은 70대 초반에도 지속적인 독서와 운동으로 심신을 단련할 정도로 건강하셔서 50대 초반의 제자들에게 늘 자극을 주신다.
또 이따금씩 제자들에게 ‘분당 김노인’이란 명의로 친필 편지를 보내 근황을 전달하시면서 격려와 충고를 해 주신다.
50대 제자 꾸짖는 70대 선생님
언론사에 근무하는 제자는 국어 선생님으로 명성을 떨치신 선생님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혹시 잘못 쓴 표현이나 맞춤법 때문에 편지를 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부터 난다.
이날은 “고교 졸업 후 30년이 넘도록 거의 거르지 않고 명절 때마다 찾아오고 스승의 날도 챙기느라 수고가 많은 제자를 위해 이번에는 내가 제자들에게 밥 한 번 사겠다”며 굳이 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오셨다.
즐거운 대화가 오가다가 제자 중 한 명이 “선생님 요즘 어떻게 소일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선생님께서 정색을 하시며 언성을 높이셨다.
“아 이 사람아 소일이 뭔가. 소일이.
소일은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야.
나는 소일 안 해. 석음(惜陰)을 하지. 석음이 뭔진 알지.”
제자들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못하자 선생님은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는 내게 눈길을 주신다.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혀를 차시며 “석음은 ‘세월이 헛되이 지나감을 애석하게 여겨 시간을 아껴 소중히 보내고 있다’는 의미야.
그러니 자네들은 절대 ‘소일’하지 말고 ‘석음’하게.
나는 ‘퇴직 후 3년은 퇴직 전 30년과 같다’는 찰스 램의 경구를 되새기며 퇴직 전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어.”
선생님은 시간 외에도 우리가 아껴 써야 할 것들을 열거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머리가 벗겨졌거나 반백이 된 제자들을 고교 재학생 대하듯이.
절제(節制) 절약(節約) 절전(節電) 절수(節水) 절주(節酒) 절감(節減) 절미(節米) 절식(節食) 절연(節煙) 등의 단어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선생님은 아직도 치약 튜브를 가위로 잘라 마지막까지 쓴다고 소개하시면서 특히 튜브의 목 부분에 의외로 많은 양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셨다.
제자 중 한 명이 “저도 그렇게 한다”고 맞장구치자 선생님은 “그렇지”라며 칭찬하셨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다른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임 후 선생님은 제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기어이 본인이 밥값을 내셨다.
“오늘은 꼭 내가 돈을 내야겠네.
자네들 야단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더 있겠나.
늙은이 찾아와 주고, 사회 중견이 돼서도 야단맞아 주는 자네들이 고맙지 않은가.
좀 더 좋은 선생 만났으면 자네들도 좀 더 잘됐을 것을…”이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은 이처럼 훌륭한 은사님께 배웠고, 또 지금도 야단을 쳐 주시는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슴 가득 안고 헤어졌다.
‘소일거리’ 찾는 부끄러움 깨달아
최근에서야 선생님의 가르침을 비로소 실천해 봤다.
헬스클럽에 두고 쓰는 샴푸가 다 떨어져 가는 것 같아 용기(用器)를 버리려다 문득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기껏해야 5, 6회 정도 더 쓸 수 있겠거니 생각했으나 20여 회나 더 사용할 수 있었다.
암만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처럼 샴푸가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위아래를 뒤집어 몇 번을 더 사용한 데 이어 마지막에는 용기 안에 물을 부어 흔들었더니 두 번이나 더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내 스스로도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70대의 노(老) 은사가 독서, 음악 감상, 인라인스케이트, 탁구 등으로 여생을 ‘석음’하면서 치약 머리를 잘라 쓰는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며 50대 젊은 제자는 벌써부터 ‘소일’거리를 찾으려들면서 분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어렵고 힘든 세상, 살아남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땀 흘려 일하고, 근검절약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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