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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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꼬집는 눈, 통(通)-장석주의 쾌설] 사랑의 법칙

보현화 2015. 12. 7. 14:37

[세상을 꼬집는 눈, 통(通)-장석주의 쾌설] 사랑의 법칙

[일간스포츠]입력 2012.06.04 11:03

 

 


KBS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때문에 주말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고아이면서 능력을 갖춘 남자를 찾던 차윤희(김남주)는 입양아에다 존스 홉킨스의대 출신이고 게다가 미남인 외과의사 테리 강(유준상)을 만나 결혼한다. 그런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인줄 믿었던 테리 강이 실은 자신들이 세든 집주인인 장수빵집 방장수(장용)와 엄청해(윤여정)가 잃어버린 아들 방귀남이라는 게 밝혀진다.

대식구가 모여 사는 시댁을 코앞에 마주보며 사는 차윤희가 겪는 소동들이 이 가족드라마의 줄거리다.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명대사들을 날리는 박지은의 대본과 김형석의 안정감 있는 연출력, 김남주와 유준상, 윤여정과 장용, 강부자 등의 연기가 버무려지면서 이루는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감칠맛이 난다. 방귀남은 늘 다정다감하게 아내를 감싸고 돌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완벽한 남편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의 로망을 깨우고 자극한다.

미디어들이 ‘국민드라마’라고 치켜세울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인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유난히 내 눈길을 끈 것은 방장수의 막내 딸인 말숙(오연서)의 철없는 사랑법이다. 말숙은 제 미모에 반한 남자들에게서 명품 가방과 구두 따위를 공물(供物)로 취한 뒤에는 가차없이 차버린다. 사랑의 주도권은 항상 더 사랑하는 사람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이 갖는 법이다. 이게 사랑의 역설이다.

아울러 모든 사랑은 비대칭을 이루고 한쪽보다 더 사랑하는 쪽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 대한 몰입도는 남성 쪽이 더 높아 주도권은 늘 말숙에게로 넘어간다. 연애가 자신이라는 고독한 지옥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욕망의 억제가 불가능한 욕구인 까닭에 어리석은 남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말숙의 사랑 놀음에 휘둘린다.

사랑이 가볍고 사소한 습관이 될 때 존재는 경박해진다. 말숙은 명품들로 넘쳐나는 이 찬란한 세상에 살며 사랑 놀음을 과소비하는 경박한 존재의 표상이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유행 상품이나 마찬가지다. 말숙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 사랑 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경박함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말숙은 경박함으로 팜므파탈의 흉내를 내며 팔랑거리지만 그 팔랑거림을 무조건 단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회 모두에게 이익을 베푸는 공공선(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숙의 사랑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콧대높은 사랑으로 승승장구하는 자 기어코 사랑으로 망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말숙 앞에 차윤희의 막내동생이자 바람둥이인 차세광(강민혁)이 나타나자 사태는 반전한다.

사랑의 주도권은 단박에 ‘완벽남’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차세광 쪽으로 넘어간다. 실은 차세광은 친구들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려고 나선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말숙은 한껏 낭만적 사랑의 달콤함에 취해 있다가 채인 뒤 하늘이 꺼지고 땅이 뒤집히는 충격에 빠진다.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게 사랑이고,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게 사랑이지만, 또 알 수 없는 신비에 감싸여 있는 게 사랑이다. 사랑의 이야기는 화수분과 같이 꺼내 써도써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간에 그토록 자주 우려먹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알 수 없기에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조관우 노래, '늪', 1999)이라거나,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남자가 변한 사랑 앞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영화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2001)라고 절규한다.

사랑은 알 수 없기에 신비하고, 신비하기에 알듯 말듯 애매모호하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 무엇도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결국 서로 만나게 되는 순간, 서로 만난다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의 설명은 사랑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 오리무중의 그 무엇으로 만든다.

정말 우리는 사랑이 뭔지를 아는 걸까? 그것은 욕망일까, 아닐까? 티스푼도 채우지 못하는 성호르몬이 불러일으킨 어떤 환각일까? 사랑이란 나와 당신의 만남에서 비롯된 우연의 기적이라는 것. 이 기적은 내가 당신에게, 혹은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돌연 생겨난다.

나와 당신의 만남이 우연에서 끝났다면 그것은 기적이 될 수 없었을 테다. 그 우연에서 싹이 돋는데, 그 싹은 약속·충실성·지속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우연은 운명으로 진화하면서 사랑의 기적을 꽃피운다. 사랑은 두 사람이 겪는 만남, 즉 사건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를 겪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연적이고 우발적으로 시작한 그것은 곧 바로 필연의 방식을 빌려 지속하는 체제를 갖춘다. 사랑이 발아하는 초기 단계에서 사랑은 하면 할수록 갈증이 난다. 그 갈증이 사랑을 깨질 수 없는 강철로 된 무엇으로 만들지만 시간은 다시 그것을 아주 작은 충격에도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으로 바꾸어버린다.

사랑은 그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늘 그것이 넘쳐나기 때문에 깨진다. 사랑의 과잉이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그것을 필연의 형식으로 바꾸었다면, 이제는 그 과잉 때문에 사랑은 깨지고 변질되는 그 무엇이 되고 만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말숙은 행위는 얄밉지만 존재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철부지다. 그 말숙의 사랑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지 궁금하다. 사랑은 끊임없이 재발명되는 것. 재발명되는 것이기에 사랑은 익숙한 관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그것을 새롭게 겪어낸다. 말숙은 젊고 예쁘다. 아마도 사랑의 순환은 더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철없는 말숙 역시 연륜이 쌓이면서 진정한 사랑이란, 다시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리면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이라는 사실들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프게도, 그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고, 변치 않는 사랑보다는 변하는 사랑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사랑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윤리의 명령이고, 사랑이 변하는 것에 속한다는 믿음은 생물학적 본성에 숨겨진 진실이다. 윤리의 힘이 본성의 힘보다 항상 강할 수는 없으니 그에 따라 사랑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믿음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그저 미친 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설사 사랑이 미친 짓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찬란하거나 쓸쓸한, 명랑하거나 우울한 하나하나의 생이란 바로 그 사랑의 부정할 수 없는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은 미친 짓이기보다는 위험한 모험에 속한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위험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따위는 어리석은 짓이고, 미친 짓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마침내 텅 비고 말테니까. 지구가 텅 비고 만다면, 이 땅에 내리는 햇빛과 비는 심심하고 공허한 것이 되고 말테니까.

사진=K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