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22>부부의 사랑은,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랑
세계일보 engine 입력 2016.09.03. 16:01 수정 2016.09.03. 16:13
“넌 나를 사랑하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남편은 가끔 섭섭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사랑하지. 아니면 왜 같이 살겠어.”
남편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같이 산다고 사랑하는 건가.”
나도 남편에게 섭섭함이 밀려올 때면 같은 질문을 했다. 남편의 대답은 매번 “으∼응∼”이었다.
“사랑해?” “으∼응∼” 이런 식이다. 나 역시 찝찝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부부가 사랑 타령을 시작한 건 아이가 생긴 뒤부터다. “연애는 장난, 신혼은 소꿉놀이였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의 탄생으로 부부 갈등, 고부 갈등의 진면목을 경험하며 상대를 물어뜯었고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너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더 조근조근했는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 나는 갈등 사안이 생겼을 때 예전보다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나의 현실이 다음 세대에서도 이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출산 이후 인터넷에서 본 한 여성 네티즌의 자조가 절절하게 와닿았다. “아내와 며느리는 하녀다”라는 말이었다. 나를 하녀 취급한 사람은 없지만 요구 수준이 그러했다. 일과 육아에 남편 내조까지…. 대놓고 이 역할을 내 몫으로 규정한 사람은 없었다. 은근한 세뇌로 어깨에 부담을 얹어놓고는 했다.
영민한 남편은 “나를 사랑하니?”라는 질문으로 수많은 의무에 나를 묶어두려 했다. ‘사랑한다면 아침 밥을 해줄 텐데, 사랑한다면 다림질을 해줄 텐데’라는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결혼 전 우리의 사랑은 로맨스와 위안,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연애 초반에는 설렜고 후반에는 위로와 편안함을 즐겼다. 나는 결혼 생활은 가족 관계가 확장된 연애 후반의 연장일 줄 알았다. 부부는 성별에 따른 차이보다는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연애 때처럼 각자 알아서 생활하는 인간들이 더 살뜰하게 지내는 상태가 결혼이 아닐까, 라고 여겼다.
착각이었다.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내조를 사랑의 요건으로 추가했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라면서 그의 무의식에 새겨진 고정관념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아내라면 남편을 위해 아침에 찌개를 끓이는 등 뒷바라지를 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내게도 남편이 기대하는 행동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긴 했다. 다만 여성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나도 남편이 해주는 밥 먹고 싶다”고 반박했다.
기대를 채워주기는커녕 고집이 세진 나를 보며 남편은 “나를 사랑하니?”라며 자조적으로 물었다. 나도 육아와 집안일에 매인 나와 달리 자유롭게 생활하는 남편에게 화가 날 때면 “나를 사랑하긴 해?”라고 쏘아붙였다. 연애 때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사랑을 말했는데, 이제는 인상을 팍팍 찌푸리며 사랑(‘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라는 의미)을 질책하게 됐다.
결혼에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뒤따른다. 자유로운 삶, 내가 벌어 내 마음대로 쓰는 경제적 자유로움 등이 일부 사라진다. 이런 점에서 외벌이 경제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고 우리 사회가 남성에게 더 많은 경제적 의무를 요구하는 만큼 결혼을 둘러싼 남성들의 부담과 상실감은 클 것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살림에 대한 요구까지 시달리는 여성의 상실감도 상당하다. 오죽하면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소원이 됐을까. 직장에서도 “여자는 애 낳고 나면 전력이 확 떨어진다”는 편견에 시달리며 불이익을 받게 될 때가 많다. 엄마, 아내, 며느리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이 말이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 되는 슬픈 현실을 맞기도 한다.
전업주부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살림을 야무지게 꾸리는 것에 크나큰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성격의 사람들이 다수는 아닐 것이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잘 표나지도 않는다. 그런 속성의 일에 자신을 묻어버린 채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삶에는 나만의 것을 향한 갈증과 불안이 한 구석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결혼을 통해 인생의 짝꿍과 2세라는 보물을 얻었다. 그러나 배우자 또는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왜 같이 살겠어?”라는 대답은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 아이에 대한 책임감, 이혼을 둘러싼 사회의 부정적 시선 등은 결혼을 지속케 하는 고리들일 뿐이다. 그 바탕에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의 일부를 포기할 수도, 끊임 없이 투닥거리는 에너지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로맨스도, 설렘도, 위안만도 아니다. 결혼에 따른 상실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계속 같이 살잖아” 이 말이 내 사랑을 드러내는 진짜 항변이 됐다. 그 속에 들어있는 여성으로서, 맞벌이 엄마로서의 고단함이 남편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 이제는 우리 부부가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랑을 이용했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남편의 “으∼응∼”의 속뜻은 무엇일까, 새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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