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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앞두고 방을 뺐다.. 이제 돌아올 곳은 없다

보현화 2016. 8. 8. 11:57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60804204104839


여행 앞두고 방을 뺐다.. 이제 돌아올 곳은 없다

 [한국 여자 미국 남자의 불량한 도보여행 5] 돌아올 곳 없이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오마이뉴스 | 이수지 | 입력 2016.08.04 20:41




[오마이뉴스 글:이수지, 편집:박혜경]

최종 목표는 모든 것의 합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다.

국토종단 여행에 가져갈 짐을 싸는 데 무려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 앞에는 그보다 더 거대하고 두렵고 무서운 숙제가 남아있었다. 방 빼기. 그러니까,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 정리하기.

집 안의 물건은 다음의 세 분류로 정리한다. 첫째, 짊어지고 갈 짐. 국토종단 여행에 들고 갈 배낭이다. 둘째, 간직할 짐. 간직할 짐은 상자 두 개로 추려 보성 엄마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셋째, 폐기할 짐이다. 월세방을 빼는 것, 지겹도록 많이 해본 짓이지만 이번엔 그 의미가 다르다.

현재 우리에게 월세방을 뺀다는 것은 집이라는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너 집이 어디야?'라는 평범한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삼십 년 가량 살며 쌓아온 자질구레한 삶의 축적들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도 집과 함께 사라져줘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 그 외에 끔찍하게 소중해서 반드시 간직해야만 하는 물건 일부만을 제외하고 모두 폐기한다.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했는데...

자, (왠지 만만해 보이는) 옷장부터 시작이다. 옷장 안 잠바, 코트, 스웨터, 셔츠, 속옷, 양말, 스타킹 등을 모두 꺼내 방바닥으로 쏟아냈다. 신비로운 일이다. 입을 만한 옷이라곤 단 한 벌도 없었는데, 방 안에 느닷없이 백두산이라도 솟아난 듯 옷이 가득 쌓였다. 이 쓰잘데기 없고 못생긴 옷들. 옷장 정리를 할 때마다 기어코 살아남은 끈질긴 녀석들. 내 이번에야말로 모두 버려주리.

앉을 자리가 없어 두 무릎을 꿇은 채 옷을 하나하나 살폈다. 대학 졸업 무렵 동대문에서 산 면접용 정장 세트. 5년 전엔가 사서 단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바로 그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반바지. 엄마와 마지막으로 백화점에 갔던 2년 전, 너도 이런 것 좀 입어보라며 엄마가 우기는 바람에 산 짧은 오렌지 색 미니스커트.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옷들을 버릴 옷과 버리지 않을 옷으로 구분한 후, 다시 버릴 옷을 기부가 가능한 옷과 폐기해야 할 옷으로 나누었다. 퇴근하고 옷 정리만 했는데도 사흘이 걸렸다.

다음, 책장. 책장 정리는 의외로 수월했다. 애초에 엄마 집에서 책을 많이 가져다 놓지 않은 덕이다. 이번 집으로 이사하는 도중 친오빠 집에 맡겨 놓은 두 상자 분량의 책들을 제발 좀 가져가라고 오빠가 수십 번 사정했음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내 게으름 덕이다. 남아있는 책 중 아직 다 못 읽은 책과 좋아하는 책은 간직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지인들과 나누고 지인들조차 원하지 않는 책들은 온라인 서점으로 보내 버렸다. 그렇게 남은 게 두 상자 분량의 책. 음….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니.

"책만 두 상자면 대체 총 몇 상자를 보성으로 보내겠다는 거야. 너랑 나 두 상자씩 딱 네 상자만 보내기로 했잖아. 너무 많이 보내면 너희 부모님도 불편하실 텐데. 욕심을 버려. 다 버려야 해. 몽땅 다.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새롭게 시작할 거고. 자 봐. 나처럼 이렇게 다 버리라고. 존카사베츠 책? 버릴 거야. 리처드 3세? 버려."

가장 애정하는 영화감독 존카사베츠의 책을 버리겠다고? 지금 버려도 어차피 다시 살 거 아냐?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거야. 리처드 3세 버려? 책장을 펼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못 읽겠다고 호들갑을 떨어놓곤? 버려.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간 너처럼 책만 두세 상자 나와. Unlikely Destinations? (론리플래닛 창업 부부의 여행기, 창업기) 이거 친필 본인데? 나 아직 못 읽었어. 너 버릴 거면 나 줘.

의외로 매정한 더스틴의 짐은 줄어가는 반면 미련 가득한 나의 짐은 나의 미련 곱하기 무한대만큼 늘어만 갔다. 더스틴 너는 미국에서 한두 번씩 물건 정리하고 와서 그래. 나는 이따금 내 상자 속을 확인하는 더스틴을 애써 외면한 채 내 나름의 속도로 물건들을 꼼꼼히 살폈다.

책을 다정리하고 난 책장에는 상단에 두 줄로 꽂힌 음반들만 남아있었다. 패닉 1집이라…. 수능 전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었었는데. '내 머리를 잠가줘 이제 나는 멈출 수가 없어'. 넬4집. 미국에 있을 때 꼴에 뭔 외로움을 안다고 기숙사 방 안에 불 끄고 혼자 누워서 들었던 그 곡.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생각해.' 아, 롤러코스터. 고등학교 수학 수업 시간에 1번 트랙 드럼 소리부터 11번 트랙 피아노 음까지 완벽하게 외워서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연주했던. '기억해요 그대 어린 날들의 그 고운 세상을 향한 많은 설레임까지도.'

 책장 정리는 의외로 쉬웠다. 다시 읽고 싶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 사이의 경계는 분명했다. 어려운 건 음반 정리였다. 책장 상단 선반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음반들이 꽂혀있었다.
ⓒ 이수지
 오래되고 아무런 효용이 없는 CD들
ⓒ 이수지
그래 필요 없지. 이 음반들이야말로 구멍 난 바지보다, 읽다 만 책들보다 더 쓸데없지. 소리에 담긴 예전의 기억들을 굳이 불러들이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검색해 들으면 그만이잖아. CD 플레이어도 고장나 버린 지 오래고. 노트북에 CD 넣는 구멍도 없고. 이 음반들은 지금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아무런 효용이 없지. 나는 음반 케이스의 얄따란 옆구리들을 집요하게 바라보다, 기어코 마음을 정했다.

음반은 책장에 꽂혀있던 순서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상자 안에 넣었다. 간직할 짐이다.

가장 어려운 건 서랍 정리였다. 서랍장은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기억의 무덤이었다. 심야 라디오 방송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다 찢어버리고 몇 장 남지도 않은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 개근상장. 잉크가 번져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알아볼 수 없는 성적표 코멘트.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 집으로 배달된 크리스마스 카드. 술에 취해 선배 손에서 빼앗은 헝겊 인형. 수업 시간 친구와 주고받은 쪽지. 머리가 다 헝클어져 구제불능인 작은 인형. 연락이 끊겨버린 친구들의 증명사진. 한쪽만 남은 귀걸이. 버리기 위해 들여다보기 전엔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 기억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효용도 없었던 물건들. 한때의 감정들을 소름 끼치게 뿜어내는 쪽지, 인형, 장신구, 편지….

또 졌다. 이번엔 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던 그때의 나를 버릴 순 없잖아. 첫 데이트를 했던 LA 식물원을 다시 찾아간 더스틴이 한 줌 담아다 준 모래. 이걸 버릴 수도 없고. 착한 수지야 안녕? 따위의 문장뿐이지만, 어설픈 글씨를 적어 편지를 보내준 친구의 얼굴을, 이 작은 카드가 아니라면 다시는 떠올리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일주일에 이레를 술 먹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의 한심했던, 그래도 어딘가 조금은 그리운, 그때의 나와 우리는 이 보잘것없는 인형이 아니라면 내 기억 뒤편으로 더 꼭꼭 숨어버릴지도 몰라.

시답잖은 기억이 담긴 물건들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시뻘건 감정을 수습하느라 일은 질척대기만 했다.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거였는데. 모레 한 줌, 카세트테이프 하나, 귀걸이 한 짝도 포기 못 하겠다니.

모르겠다. 못 버리겠다. 이 기억들은 나다. 시답잖은 기억들이 담긴 내 과거의 유물들은, 나다. 이 여행이 끝난다고 해도 난 여전히 자잘한 과거들을 꼭 끌어안고 사는 나인 채일 테다. 최종 목표는 모든 것의 합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제로가 될 수 없다. 제로는커녕 소수점 하나 떼어내지 못한 채, 무겁고 지저분한 과거를 질질 끄는 나인 채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거가 선별되었다. 추억할 과거는 살아남아 상자 안으로, 나머지는 쓰레기봉투로. 간직하고픈 과거를 꾹꾹 담은 상자 네 개가 완성되었다. 목표했던 상자 두 개에서 배가 넘치는 분량. 언젠가 이들도 떠나보내야겠지. 해가 갈수록 내 과거는 늘어날 테니. 흘러넘칠 때가 되면, 또다시 과거를 선별해야겠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되살아난 이런저런 기억, 처리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마구 뒤섞여 불어터진 스파게티 면발처럼 엉켜버렸다. 

 짐정리 전. 보기만 해도 고통스럽다.
ⓒ 이수지


 짐정리 후. 과거가 선별되었다. 추억할 과거는 살아남아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 이수지


돌아올 곳이 없어도,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집을 청소했다. 묵은 때를 닦고 또 닦다 새벽 4시에 잠이 들었다. 9시에 일어나 마지막으로 거실과 안방을 닦았다. 더스틴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 핸드폰으로 가스비와 전기료를 정산했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정리 다 됐어요. 이 집에서의 1년 반, 그리고 30년이란 시간이.

"미국으로 가는 거야?"
"아, 아니요."
"그럼 다른 데로 이사 가나 봐?

이사 가는 건 아니고요. 당분간 집 없이 살 거예요. 한국을 걸을 거예요. 그 다음의 계획이요? 그게 그러니까….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설명하기도 복잡하고, 말해봤자 이해도 못 하실 테니. '삼십 대 부부'만큼 명쾌한 명제도 없을 텐데. 그 틀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나왔음에도 우리 인생은 뭔가,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다.

"음…. 네. 뭐…. 네."

바보 같고 흐리멍덩한 소리를 내뱉어놓고는 황급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간단히 처리되었다. 스물 몇 해 간 나의 중심이 되어주었던 부모님 가게가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처럼, 아주 잠시였지만 서울 한구석 나의 중심이 되어주던 공간이 다시 한 번 소멸하였다. 이 여행이 끝나고 어느 낯선 소도시에, 혹은 한국이 아닌 공간에 나의 기반을 새로 다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돌아올 제자리라는 게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다.

아니, 사실 좀 겁이 난다.

괜한 짓을 한 걸까. 난 아직 젊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어리지는 않은데. 일직선으로 가는 그 길, 정말 벗어나도 되는 걸까. 이대로 떠나버리면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던 걸까. 나는 어쩌자고 집이고 직장이고 다 없애버린 걸까. 여행은 다시 돌아와 더 잘 살기 위해 떠나는 거라고 그러던데. 돌아올 곳이 없어도,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이제 우리에겐 집이 없다.

돌아올 곳이 없다. 그러니까, 이제 앞을 향해 걷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