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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김삿갓으로 산 40년 풍류시인

보현화 2017. 9. 2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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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김삿갓으로 산 40년 풍류시인

  • 곽종규 발행인
  • 승인 2011.10.27 17:02



저널초대석/현대판 ‘김삿갓’ 김만희씨

도포에 짚신, 흰 수염 휘날리며 죽장에 삿갓 쓴 현대판 김삿갓이 김포시민이 되어 돌아왔다. 풍속화와 시조, 음악으로 세상을 향해 쓴 소리, 단 소리를 풀어내며 바람처럼 60년을 살아온 풍류객 김만희 선생(67). 지난 14일부터 3일간 사우문화광장에서 열린 중봉문화예술제 기간 중 김포사랑운동본부 홍보부스에서 시민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주며 김포사랑과 중봉 조헌선생의 역사를 알렸다.

故 신동우화백의 제자인 김삿갓 김만희선생(67)은 하루 7시간 동안 찾아온 시민들에게 캐리커처 그려주며 시민과 마음을 나눴다. 김포사랑운동본부의 化, 愛, 用 정신이 좋아 함께 참여한 김만희 선생은 조헌선생이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는 칠백의총의 그림을 기증하기도 했다.
21일 김포사랑운동본부가 개최한 한마당축제에도 참여해 짚신을 싣고 계주에 참여한 김만희 선생은 이달 초 김포시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바람처럼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여장을 미래의 통일도시 김포에 풀었다.

한국문화예술대상 수상
현대판 김삿갓이라 불리는 김만희선생은 올해 나이 예순 일곱이다.
조선조 말엽,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이 2백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처럼 모든 것이 닮았다.

김삿갓과 같은 복장으로 전국을 떠돌며 글과 그림, 시조와 타령으로 불의에 맞서기도 하고 서민의 애환을 풀어놓으면서 자신은 원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속에서 그는 한때는 목사였으며 화가였다.

김삿갓이 묻혀있는 강원도 영월에서는 문화 해설사였으며 여성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였으며 모방송국에서 1년여 동안 라디오 고정프로그램을 맡기도 한 방송인이었다. 그리고 (사)한국예술진흥원은 지난 2007년 한국문화를 새롭게 조명한 공로를 인정해 한국문화예술대상을 수여한 한국문화지킴이였다.

김삿갓 김병연이 22살 때 장원급제한 자신의 글이 조부를 비판한 것을 뒤늦게 알고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자책과 통한으로 방랑의 길을 택한 것처럼 한때 기독교목회자였던 그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삿갓을 쓰기 시작했다.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기엔 부끄러운 자신이지만 불의를 보고 불의라 말하는 것도 복음이라 말한다.

‘不義를 不義하는 것도 복음’
40년 전국 곳곳을 다니며 세상의 부조리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일은 싸워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지만 이 같은 의협심은 가정사만큼은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김만희 선생은 젊은 시절 이혼의 아픔을 겪으며 가족과 헤어져 바람 속에 인생을 맡기고 홀로 지내고 있다.
김삿갓 김만희의 방랑벽은 유년시절 운명처럼 다가왔다.
초등학교시절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군 천막극장에서 우연히 본 김삿갓 영화에 감동을 받아 추운 겨울 날 가출을 결행했으나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집으로 돌아 왔다.
그 후 중학교 때 만화가 그리고 싶어 자퇴하고 상경해 지금은 고인이 된 신동우 화백 문하로 들어가 김삿갓을 소재로 만화 수업을 받았다.

20대엔 미아리 희망청년회를 이끌며 구두닦이 소년 등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불량청소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활동하며 기독교에 심취해 애니마투스 선교회에서 목사생활을 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결혼했으나 그의 주변을 맴도는 방랑벽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김만희 선생이 김삿갓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87년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보은에서 청주역까지 80리길을 단숨에 달려간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청주역전 파출소 직원들의 고스톱 현장이었다.
그 광경을 본 김삿갓은 발길을 돌려 청주경찰서를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그때부터 삿갓을 쓰고 시와 그림 때로는 멋진 우리 가락으로 세상을 풍자하며 쓴 소리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움막에 만족하는 예술가
그 후로 김삿갓은 각종시국 사건과 공무원, 기업인들의 부정부패, 대구지하철 참사 등 굵직한 사건과 여수엑스포 유치성공 기원 마라톤 대회, 세계평화 기원 한강 마라톤대회, 고향에서 열리는 동학정신계승 마라톤 대회 등에는 빠짐없이 참여해 올곧은 소리와 시, 서화, 창을 토해내곤 했다.

그는 지난 30년 이상을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산자락에 겨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막이 유일한 집이었지만 지난해 겨울 출타한 사이 그의 움막은 화재로 소실됐다. 선생의 상징복장이라 할 수 있는 삿갓과 도포, 지팡이는 물론 사진, 그림, 글, 도서 등 세계 각국의 자료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소실된 흔적을 옆에 두고 며칠을 마을회관에서 머물다 흔적 없이 떠나 버렸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춘천시 백양리 산자락에서 김포시로 바람 같은 삶의 여장을 옮겼다.

40년 가까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김삿갓이지만 그의 가슴에는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예술적 재능이 넘쳐흐른다.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고 멋들어진 창으로 풀며 세상을 벗어나 세상 깊숙한 곳으로 매일 바람같이 드나든다.
2백년을 초월해 우리 곁에 다가온 김삿갓의 후예다.
< 곽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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