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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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에 대한 개념 外

보현화 2020. 12. 13. 19:01

www.jungto.org/pomnyun/view/82976

 

명상을 잠시 한 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불교사상서팀을 이끌고 있는 여광 법사님이 오늘 회의 주제를 말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저희가 오온에 대해서 공부를 해봤습니다. 각자 공부해 온 내용을 발표하고, 새롭게 알게 된 점과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과 차이가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역할 분담한 순서대로 발표를 했습니다. 오온의 전체 개념에 대한 발표, 오온(五蘊)의 요소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 대해 연이어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공부해 온 내용을 다 읽느라고 수고하셨어요.” (웃음)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면서 꺼져가는 난로에 다시 나무를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묘당 법사님은 장갑을 끼니까 꼭 군밤 장수 같네요.” (웃음)

다시 훈훈한 온기를 느끼며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설명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했습니다. 법사님들이 공부해 온 내용을 다 듣고 나서 이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난 거구나

“색온(色蘊)이 정신작용의 일부라고 해석한 것은 아주 정확하게 본 것 같네요. ‘색(色)’은 정신작용과 분리된 육체를 의미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색온’은 바깥 경계가 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색, 색온, 색취온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면 근본 교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여러분의 발표를 듣고 나서 전체적인 느낌은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났구나’ 하는 겁니다.” (모두 웃음)

법사님들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다들 어려운 교리를 공부하느라 머리가 아팠는데, 스님의 한 마디에 너무 공감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 스님이 되면 이런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니까 20년을 공부해도 끝이 안 납니다. 아무리 오온을 다 이해했다고 해도 그건 학자이지 수행자는 아니에요. 이 어려운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해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복잡한 교리 내용을 자세히 공부해 보니까 왜 대승불교가 ‘법공’이라는 표현을 했는지 더 실감이 나네요.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직관적으로 보기에는 소승불교의 교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오늘 우리도 소승 불교의 교리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지 고민하다 보니까 이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복잡한 교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곧바로 수행을 이야기하고 체험할 수 있다면 사실은 우리가 이것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어요. 교리는 학자마다 그 해석이 다 달라서 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발표한 ‘5온’에 대해 제가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기분이 좋다 나쁘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이런 표현을 자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느낌이 좋을 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이 정말로 나쁘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과 감정, 생각은 수많은 경험에 의해 형성된 업식의 반응일 뿐입니다.

일체의 세계란 결국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을 의미할 뿐

이런 인간의 인식 작용을 설명한 것이 5온 12처입니다. 눈이 빛깔과 모양을 보고 인지한다, 귀가 소리를 듣고 인지한다, 코가 냄새를 맡고 인지한다, 혀가 맛을 보고 인지한다, 피부가 접촉을 통해 인지한다는 겁니다. 일체가 어떤지는 다 우리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일체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인지되는 것을 갖고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이 ‘일체는 5온 12처이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12처만 갖고 설명하면 ‘왜 사람마다 인지가 다르고 느낌이 다른가?’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식(識)’이라는 개념이 나온 겁니다. ‘식’이란 과거의 경험이 축적된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찰나찰나 한 마음 일어나고 사라지고, 찰나찰나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고 한 것이 몇 번쯤 거듭했을 것 같아요? 아마 수 억 번도 더 거듭했을 겁니다. 그렇게 축적된 것의 총체적인 결과물이 ‘식’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지할 때는 이 ‘식’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12처는 본다, 듣는다 하는 기계적인 관점이라면 18계는 여기에 식을 더 추가한 거예요. 어떤 것을 봤을 때 인지되는 느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 그때 일어나는 욕구, 머릿속에 일어나는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인 ‘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또 같은 사물을 인지하더라도 지금 인지하는 것과 다음에 인지하는 것이 미세하게 다른 이유 역시 ‘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화상회의가 어떤 원리에 의해 가능한지 이해하려면 컴퓨터나 앱에 대해 1년 동안 공부해도 부족할 겁니다. 그것처럼 5온 12처 18계는 인간의 인식 작용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학문을 하는 데는 이런 원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는 이런 지식을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기본적인 원리만 이해하면 됩니다. 마치 컴퓨터 사용법만 알면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저에게 욕을 했다고 합시다. 욕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죠. 그런데 이때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욕을 듣고 나서도 기분이 안 나쁠 수가 있고, 기분이 나쁘지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기분 나빴던 것이 다음에 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할 때 다시 작용합니다. ‘지난번에도 욕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하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게 되면 욕을 들을 때 새소리처럼 들어서 기분이 안 나쁠 수도 있고, 불쾌한 반응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을 감정으로 전이시키지 않아서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음에 또 욕을 해도 과거의 경험과 겹쳐서 기분 나쁨이 확대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업식이 소멸된 상태 또는 윤회가 끊어진 상태예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 그 경험이 축적되어서 확대 재생산을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축적이 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기분이 나쁘면 옛날 경험이 다 떠올라서 ‘도대체 몇 번 째야’ 하고 터집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것은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상태를 말해요. 설령 불쾌한 반응이 일어났더라도 그 흔적이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도 과거의 감정이 현재에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근본 교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공부하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책을 읽을 때는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쉽게 이해가 되네요.” (웃음)

대화는 자연스럽게 인간이 왜 집착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스님은 불교사상서를 만들 때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그 핵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집착을 하게 되는 이유는 집착을 하고 싶어서 집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사실이잖아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이게 집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집착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소승불교가 이 내용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설명해 놓다 보니 그에 반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대승불교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대승 불교도 나중에는 이 내용을 점점 장황하게 설명하다 보니 공(空) 사상에서 18공이라는 게 나오고 되어 다시 복잡해져서 이에 반대해서 선불교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나온 겁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 집착할 게 없는 이유

결국 이 가르침은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집착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인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여섯 가지 감각 기관, 여섯 가지 대상을 설명하게 되고, 그것으로 미진하니까 과거의 경험인 ‘식’과 연결해서 18계를 설명하고, 그래도 미진하니까 다시 5온과 연결해서 설명하게 된 겁니다. 이런 설명도 결국 법이라는 상에 집착해서 그것을 해설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대승불교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소승을 설명하지 않고 대승을 설명할 수는 없어요. 소승에서 관념화된 것을 비판한 것이 대승이고, 대승에서 관념화된 것을 비판한 것이 선불교입니다.

일단 불교사상서를 만들려면 연기, 중도, 12연기, 삼법인, 5온, 12처, 18계, 팔정도, 사성제에 대해 개념 정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5온, 12처, 18계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부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안 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분석적으로 설명한 게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서 자각할 수 있게 설명했어요. 그게 사성제 방식입니다. 사성제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설명한 게 12연기라고 볼 수 있어요. 5온, 12처, 18계설은 부처님 이후 훨씬 더 후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요약정리하면서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부처님은 5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꾸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하니까 실체가 없고 연기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죠. 5온, 즉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설명은 결국 연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연기되어 있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 핵심적인 뜻이에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5온설이 우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면 이 용어를 우리가 사용해야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중도’는 확실하게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사성제’도 논리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고, ‘삼법인’도 무상과 무아에 대한 해설에 이견이 좀 있지만 채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팔정도’도 ‘정사’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이견이 좀 있지만 큰 문제가 없고, 12연기도 의식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 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남은 과제는 5온설이 해탈로 나아가는 과정에 경험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5온설이 대중이 들었을 때도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요소이겠는가 하는 거예요. 5온, 12처, 18계가 무엇인지 이해를 해도 그것이 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면 굳이 우리가 대중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잖아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법사님들도 이에 대해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래도 이 5온설은 무지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되는 것 같아요.”

다시 스님은 왜 무지가 발생하는지 설명했습니다.

무지(無知)가 발생하는 이유

“무지(無知)는 첫째, 인식의 한계로 인해 생깁니다. 인간은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볼 수 없고,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인식상의 한계로 인해서 둥근 지구를 평평하다고 보는 식으로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이용해서 이런 오류들이 점점 시정되고 있죠. 하나님이 벌을 줘서 전염병이 도는 줄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아 알지 못했던 병원균에 의해서 전염된다는 걸 알게 되었듯이요.

둘째, 경험의 한계로 인해서 무지가 생깁니다. 자기 경험에 사로잡히게 되면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경험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무지가 발생합니다.

셋째, 감정이 앞서서 제대로 상황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가 생깁니다. 감정이 앞서면 상대는 그냥 말하는 건데 마치 나를 욕하는 것처럼 들어서 화를 내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무지가 언제 처음 발생했는지를 자꾸 찾아서 들어가게 되면 그건 과학자처럼 되는 겁니다. 수행자는 항상 ‘지금’ 무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자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전은 다 과거입니다. 과거 경험의 총합에 의해서 지금 인식의 오류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는 것이 오류 투성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항상 인지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거나 사물을 바라볼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업식이 반응하는 것일 뿐이지 내가 옳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지는 아무런 확인을 안 했잖아요.

이 컵을 어릴 때부터 계속 ‘북’이라고 알고 있는 업식이 형성되어 있으면, 누군가가 ‘그건 컵이야’라고 말할 때 ‘그건 북이야. 틀렸어!’ 하면서 자동으로 비판의식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때 시비하는 마음은 실제로 그 컵이 북인지 아닌지 사실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머릿속에 업식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의 문제이지 실제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빨갛게 인지가 되는구나

이런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 색깔이 실제로 빨갛다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노랗다고 주장할 때 다투게 되는데, ‘나에게는 빨갛게 인지가 되는구나’ 이렇게 알고 있으면 누군가가 노랗다고 주장해도 ‘너 틀렸어!’ 하며 다투지 않게 됩니다. 서로 주장이 달라도 시비 분별이 안 일어나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이럴 때는 다툼이 아니라 탐구가 되는 겁니다.

진짜 색깔이 어떤지는 어쩌면 우리가 알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객관적인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진리를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지금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 거짓의 나라고 말하면, ‘참나가 따로 있구나’ 하고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주관을 객관화했구나’ 이것만 인정해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조금 더 사실을 알고 싶으면 대화를 해보거나 규명을 해보면 되는 거예요.

과거의 언어를 빌려서 불교 사상을 설명하고자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는데, 연기와 중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기와 중도는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와 중도는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무아와 무상은 이미 과학에서 다 밝혀진 내용이잖아요.”

12연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중의 괴로움을 실제로 없앨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는 선적인 방법

“12연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과연 대중이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히려 대승적인 방법이나 선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게 대중이 실제로 체험하기에는 더 쉬울 수 있거든요.”

“대승적인 방법이나 선적인 방법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대승적인 방법이란 ‘괴로울 일이 없다’ 하고 자각하는 겁니다. 선적인 방법은 어떤 것이든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관심을 오직 ‘이뭣고’에 두는 거예요. 위빠사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관심을 호흡에 두지 나머지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겁니다. 대승적인 방법만 해도 벌써 사유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선적인 방법이나 위빠사나의 원리는 거기에 대한 생각을 아예 두지 않는 겁니다. 생각을 두니까 번뇌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 이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이 말은 문제 자체를 안 삼는다는 뜻이에요.”

마칠 시간이 되었을 때 한 법사님이 다시 의문이 남는다며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사성제가 불교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스님께서 연기와 중도를 제외하고는 부차적인 용어라고 말씀하시니까 그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돼요.”

“사성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에요. 사성제란 원인의 원인을 규명해 나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그냥 ‘원인을 규명해간다’라고 표현하면 되지 굳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성제’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그러나 연기와 중도는 꼭 사용해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사성제는 더 쉬운 말로 바꿔서 쓸 수가 있으니까요.

12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 애, 취, 유,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왜 괴로움이 발생하는지 설명이 가능하잖아요. 그 용어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을 다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계속 질문하게 되거든요.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정토불교대학에서 근본 교설에 대한 강의를 하고 나서 질문을 받아보면 저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 불교를 이미 알고 있던 대중이 와서 그 용어의 뜻을 물었을 때는 제 설명을 듣고 나서 의문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졌는데, 지금은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대중이 와서 공부를 하는데 처음 들어보는 불교 용어를 가르쳐주고 해설을 하니까 대중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질문을 들어보면 법문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거든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내가 왜 저런 강의를 해서 저 사람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웃음)

그래서 이제는 불교의 가르침을 조금 더 새롭게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무리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일지라도 ‘연기’와 ‘중도’라는 용어는 설명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나머지 용어들은 굳이 그 용어들을 갖고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우리들의 언행, 그 언행을 일으키는 마음, 마음의 무지를 깨우치는 지혜, 이렇게만 설명하면 되지 팔정도를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수행의 요지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알아차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결국 알아차림이 수행의 요지입니다. 현재의 내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고집멸도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알아차림이 중요해요. 현재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각하면 자동으로 그것을 시정하려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개선이 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그러나 각오하고 결심하는 것은 오류를 정확하게 발견하지 않고 주위에서 하는 얘기만 듣고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제 말은 연기와 중도를 제외하고 다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 내용은 다 포함시키되 굳이 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5온, 12처, 18계 말고도 얼마나 용어가 많습니까. 사무량심, 37조도품인 사념처, 사정단,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 여러분이 잘 모르는 용어도 정말 많거든요.

법이란 것은 심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이 상황이 우리들의 학습 부족에서 생기는 문제인지, 이 용어들 자체가 관념적이기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지, 한번 살펴보면 좋겠어요.

기존에 있는 용어들을 어떻게든 잘 해석해서 문제를 풀어보려는 것이 혁신안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대승불교나 선불교가 나올 때는 기존의 설명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새롭게 혁명적인 안을 제시했습니다. 혁명을 하는 과정에서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다시 오류가 발생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출발할 때의 문제의식만큼은 붓다가 가진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어요.”

겨울이 깊어가면서 법사님들의 공부도 스님의 방향 제시와 함께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팔정도와 12연기에 대해 공부해 와서 토론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