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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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여! 왜 이 글을 읽고도 대성통곡하지 못하는가?

보현화 2006. 10. 14. 21:26

기독교, 허구와 진실 
약탈 테러, 음모와 배신의 제국주의 종교
 
-윤소암(시인, 종교사회평론가)-  
 
푸르른 늦봄답지 않게 낮 동안 뜨거운 태양이 내려쪼이다가 해지는 저녁이나 싱그러운

새벽녘이면 비단 같은 봄바람이 볼을 부드럽게 스치는 오월 하순이다.
낮에는 뻐꾸기 울고 줄장미와 아카시아가 향긋하다. 밤에는 소쩍새 울음이 어린 시절

고향생각을 나게 한다.

그래서 오월은 일 년 중 좋은 날이 많고 쉬는 날이 많아 행복한지 모른다.

 


(교황청 실력자 주교의 심복인 수도사복의 암살자 사일러스.

 그는 예수를 위해 살인을 하고나면 벌거벗고 십자가상앞에서

 사악한 무리를 정화했다고 고해한다.)

 

얼마 전 부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다빈치코드를 짬을 내어 감상하였다.

원작의 복잡하고 현란한 구도와 재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영화 한 편으로 압축하기에는 무리가 많고,

감동이 적었다. 다만 원작과 영화가 어떻게 다르고 대중들의 반응은 어떨 것인지 궁금해서 연중 한

두 편 볼까말까 하는 영화관을 찾았다. 참고로 나의 젊은 시절은 독서광, 영화광이라고 할 정도로

명작 소설이나 명작 영화는 빠짐없이 보아야 직성이 풀렸고, 영화에서도 깊은 인생철학과 교훈을

감동적으로 학습한 것이 적지 않다.

 

아무튼 경기지역의 작은 극장에서 매회 마다 표가 매진되었다고 한다.

9십 여 국가에서 동시 개봉된 다빈치 코드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고 막을 내렸다.

영화에 대한 언론과 평론가의 평가가 상반되는 모양이지만 다빈치 코드의 성공은 수 년 전

댄 브라운의원작소설이 세계적인 초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벌써부터 예견된 상황이다.

한국에서 이백만 부를 넘어선지 일 년 전이고 계속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총 사천만 부를 넘어 오천만 부에 육박하리라 한다.

영화를 상영하기 까지 우여곡절도 만만치 않았다.

 

바디칸의 고위 성직자들이 소설과 영화를 비난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고 항의하였다.

그리고 영화상영이 임박한 시점에 가톨릭 단체와 개신교 단체들이 영화내용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법에 호소하였다.

한국에는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의 한국기독교 총연합회가 법원에 상영금지의 소송을 넣었으나

이유 없다고 각하되었고, 이에 낙담한 많은 개신교 목사들은 신도들을 상대로 영화보이콧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어떤 과격한 기독교단체는 청년들을 동원하여서 주요 영화관을 점령하고,

관객이 못 들어가도록 방해할 것을 논의했다는 보도가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다빈치 코드의 무엇이 전 세계를 경악 속에 빠뜨리게 했는가. 무엇이 그토록 기독교 단체와 기독교인을 흥분시키고 충격에 휩싸이게 하는가.

그리고 말한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며, 영화는 그저 영화에 불과하다고.

소설과 영화는 허구의 산물이나 실제로 영향을 받는 것은 기독교 단체와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총력을 다해 저지하는지 모른다.

 

다빈치 코드는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는 빠른 속도로 박진감 있는 배경음악과 함께 진행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큐레이터 암살에 이어, 주인공과 경찰이 쫓기고 쫓는 007작전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가톨릭 주교의 지령을 받은 광신자가 주요 인물들을 테러 암살하는 장면이 포착된다.

사람을 하나씩 죽일 때마다 광신자는 신의 메신저로 자처하면서 스스로 극단적인 육체의 고문을

자행한다.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참회 및 기도의식이다.

 

이 영화는 원작에 따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주 무대로 생쉴피스 성당, 로슬린 예배당, 악소거리,

빌레트 성과 런던의 템플 교회, 웨스트민스트 대사원, 세인트페이스 예배당을 배경으로 삼은 가톨릭

역사의 비밀을 파헤친 영화이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죽음 직전 이집트로

박해를 피해 도피했으며, 예수의 자식을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는 프랑스로 망명해서 예수의 혈통을

잇게 되는데, 5세기 프랑스, 독일 왕국을 지배한 메로빙거 왕조라는 것이다.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 창립된 시온 수도회와 템플 기사단은 예수의 후손을 지키기 위한 비밀단체이며,

반대로 예수의 혈통을 부정하고 없애기 위해 바디칸의 가톨릭 폭력조직 오푸수데이와의 대립과 갈등,

은폐와 조작이 펼쳐진다.

소설을 몇 번 읽은 독자가 아니라면 영화 한 편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부분이 많고, 두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실체와 역사전개에 대하여 궁금증과 아울러 많은 의문점을 가졌고,

여러 가지 자료를 섭렵하였으며 다빈치 코드는 사실상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한

종교권력의 고발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허구 아닌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라고 본다.

 

조금씩 기원이 밝혀져 가는 기독교의 실체

기독교는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 하는데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마리아가 유일하다.
이상한 노릇이 아닌가.

이천 년 동안 마리아를 창녀로 규정한 이유는 바로 예수가 부활한 신이 아니라 결혼까지 한 예수의

수제자이자 부인이기 때문에 신성을 침해한 장본인을 죽이지 않으면 기독교의 음모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의 절대 권력이 힘을 잃은 탓인지 수 년 전부터 예수와 기독교의 왜곡된 역사를 다룬

저작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위성방송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들이 나와 종교역사의 진실을 다루고 있다.

 

다빈치 코드 역시 성배와 성혈,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등에서 주요 모티브를 따왔고, 작가의 역사학,

기하학, 수학, 종교학의 넓은 지식이 예수의 혈통과 기독교의 비밀을 파헤치며 정교한 구성이 더

한층 흥미를 불러일으킴으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본다.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부인으로 인정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모나리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예수의 딸 '사라'를 낳는다.)

 

모나리자와 막달라 마리아의 실체

다빈치의 최고걸작이라 알려진 모나리자는 알듯 말듯한 희미한 미소만큼이나 수백 년 동안

신비가 감추어져 왔다.
모나리자의 실존 모델이 누구라는 설이 분분했으나 정작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성스러운 모나리자는 대체 누구인가.

다빈치 코드에서 작가는, 모나리자는 예수와 마리아의 합성한 그림에 불과하며 모나리자는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단정 짓는다.

 

그 근거로 외형적으로 너무 닮았으며, 도마복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여섯 제자 중 한 명으로

되어있는데 예수의 사후 삭제되었고, 수제자 베드로의 질투 때문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591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강론했다.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1400년 동안 매춘부로서 기독교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쓰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사도중의 사도라 복권시키고, 천한 신분을 해방시켰다.

내 생각으로도 수녀들이 받드는 성모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가 맞다.

역사속의 수많은 지식인과 과학자들을 단 한 가지 이단이라는 이유로 처형한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과 인류지성의 진보로 더 이상 진실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의 원류는

이집트,그리스,로마,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도

인류의 진보는 절대 권력인 기독교에 저항하고 노예사상에서 해방된 순간부터 이루어졌다고 본다.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 전까지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성경을 볼 수 없었다.

만일 성경을 읽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위험천만한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기독교와 아무 관계없는 모세의 십계명을 기독교인들은 절대 윤리로 삼는다.

이스라엘인이 노예로 있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비롯 메소포타미아, 인도 등의

각종 신화와 원시 신앙을 끌어들여 성경의 토대와 사상체계를 만들었다.

 

4세기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당시 로마의 태양신 미투라교를 기독교에 접목,

예수 탄생일로 정하고, 유일신 사상을 공의회에 선포하였다.

(325년 니키아 공의회 밀라노 칙령)이후 인간예수는 신으로 만들어졌고, 이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면

모조리 이단으로 처형되었다.
기독교의 피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예수가 사랑과 구원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무서운 저주와 배타성을 지녀야 했는지

나는 오랫동안 종교적 진리가 아닌 정치적인 배경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기독교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학식과 인격, 사회적인 배경까지 가지고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왜 일그러지고 추악한 인물이 되는지 숙제가 풀렸다.

바로 기독교는 신과 인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종교적 권력의 실체인

창조주 하느님 신의 종속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을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노예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말하기를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그리스도 외에는 저주이다,

여호와를 모르면 선행을 해도 가시만 거둔다, 바르게 잘 사는 길은 진리의 말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오직 성령밖에는 진리도 구원도 없다는 등 요약하면 이런 말들을 절대 진리라고 맹신하여 어릴 때부터

혹은 사물을 분별할 능력을 가진 성인마저도 교회에 나가고 겨우 몇 개월 성경을 읽는 순간, 자신들이

구원자가 되어 비 기독교인을 핍박하게 되는 세뇌교육에 빠진다.

한 번 맹신과 광신에 빠지면 부모형제의 인륜도 친구의 의리도 인간과 자연의 이치와 과학의 합리주의

에도 눈감게 된다. 오직 예수천국이오 불신지옥이다.

대한민국을 전국방방곡곡 날마다 소음공해를 일으키며 외국인들이 이해 못할 행동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 사상의 근본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후세에 조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카나다의 진보적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4월 14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와 그의 저서들에서 성경에

쓰인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현재 유럽에서는 사라졌고, 미국에서 30% 있으나

한국은 90% 이상이라 하였다.

한국 기독교인이 불교 등 타종교를 박멸하자고 나서는 사람이 많은 것은 성격의 무오류성, 문자주의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인의 거짓과 정신질환

한국 기독교인이 성경구절만 가지고 순수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실일까.

불교학 박사를 받을 정도로 진지하고 순수한 입장의 기독교인 오 교수는 기독교의 왜곡을 문제

삼으면서 결국 한국 기독교를 옹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 신 구교 기독교는 유럽과 미국이 만들어준 외세 문화요, 권력 종교일

이다.지난 1세기 휘몰아치던 근대사의 파란만장한 질곡에서 세계 식민지 야욕의 전략 목적으로

기독교 선교를 앞세운 유럽, 미국이 한국에 와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에 불과하다.

광신적 기독교 성직자들이 툭하면 부르짖는 제 2 이스라엘이 한국이고 수많은 구세주가 탄생되고

꺼져가는 세계 기독교가 한국에서 부흥하는 것은 하느님의 역사이고 축복이며 섭리일까.

 

역사척결 0순위 기독교

만약, 한국에서 과거 역사 청산대상이 있다면, 나는 먼저 미국도 일본도 아니오,

좌우익의 정치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기독교의 척결이다.

철저한 사대주의이며 강자에 맹종하는 기독교인들의 청산이다.

철저한 친일, 철저한 친미, 독재 권력과 철저한 야합, 좌우 이념의 갈등, 민족의 분열, 사회적

가치관의 파괴는 어김없이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성경의 해석과 인간의 진리, 자연의 법칙에는 눈감고, 목사와 신부들이 시키는

대로 광고포스터 수준의 획일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은 기독교의 증오와 광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돈, 권력, 출세 등의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무엇을 고민하고 사색할 것이며, 타자와 대화, 토론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고, 구원 받고, 내세에 까지 천국을 보장 받지만 믿지 않으면 죄악이고

불지옥이며 불행이라고 저주와 협박을 가르치는 종교, 그것이 기독교의 실체가 아닌가.

 

기독교의 신은 태양신으로 인간의 삶을 좌우할 수 있으며, 그리스 제우스신처럼 인간과 세상을

마음대로 만들고, 파괴하며 한국의 기독교 힘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처럼 돈과 여자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신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내세워 인류역사에 정복과 탐욕의 도살극을 벌이는 제국주의 십자군들.

 그들은 선신(善神)의 군대가 아닌 악마(惡魔)의 군대이다.

 인류는 각성하고 단결하여 십자군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악마보다 악다귀한 악귀 여호와

예수가 아닌 이스라엘 부족신 여호와를 빌려서 우주만물의 창조신으로 각색하고, 이 신 역시

시기와 질투가 많아서 세상을 사랑하다가 기분 나쁘면 하루아침에 쑥밭으로 만들고 인류를 몇

번이나 몰살시키는 무서운 악귀의 신이다.

 

기독교가 이처럼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처럼 오직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저주와 죽음의 신까지

합해서 수십 수백의 신(창조신화)을 용광로에 넣어 한 개의 신을 만드니 그것이 유일신이다.

말하자면 수 천 수 만의 권능을 지닌 괴물이다.

 

다빈치 코드나 앞서 나온 수많은 저술들은 인류 역사를 좌지우지 하면서 인간을 지배했던 절대

종교를 상징하는 기독교 유일신의 악령과 저주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휴머니즘의 발로에 다름이

아니다. 아마 이런 종류의 기독교 바로 알기, 내지 종교 비판 서적은 수십 년 전만해도 출판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인이 종교 집단 권력을 상대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며, 단일화 된 유럽사회에서

다원화의 진보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필자 개인의 체험으로 12년 전 어느 종교 심포지움의 기독교 역사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개신교 목사와 필자의 말에 반발과 증오감을 보이는 가톨릭 간부 신부와 언쟁을 벌인 적이

있고, 수백 명이 꽉 찬 강당에서 독일 대학의 민중 신학을 전공했다는 가톨릭 대학 교수에게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반공과 친일, 권력과 전통문화의 억압에서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기독교의

힘만이 아닌 독재 권력의 비호 때문이 아닌가 하고 신랄한 질문을 던졌으나, 민중 신학자라는 그

신부는 방청객이 거의 기독교인 탓인지 모르나 필자에게 냉소와 부정으로 답변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방청객들이 야유의 폭소를 터뜨렸다.

진지한 강연의 진실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지성적인 자리에서 획일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만

있을 뿐, 다른 견해는 용납할 수 없는 집단적인 광기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회가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종교권력과 정치이념은 같다

종교가 정치이념처럼 권력의 우상이 되면 좌파든 우파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나의 체험에서

오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몇 해가 흐른 후,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범죄와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작년에는 한국 개신교 원로 목사들이 기독교의 친일과 반공, 독재 권력에 야합하고 불교 등

타 이웃 종교에 침해를 가한 사실 등에 사과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번에 다빈치 코드와 기존의 역사서를 한낱

소설과 영화의 허구일 뿐이라 주장하면서 수백 년 동안 선구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과 이념을

무시해버리며 여전히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는 유아적인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른 바 자각이 없고, 맹신적이다 보니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는 탓이다.

 

16세기의 진보적 사상가 스피노자는 우주를 창조한 신은 없다고 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종교 권력을 부정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때 1%의 가톨릭 사제가 10분의 1의 방대한 땅을 소유하면서 권력과 결탁한

끝에 혁명이 일어나자 1천여 명의 신부가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교회가 무너지며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피살되었는지 역사적인 성찰이 전무한 형편이다.

 

니체,쇼펜하우워,하이데거, 그리고 러셀

20세기 세계적인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라고 선포했으며 쇼펜하우워, 하이데커 등은 신이 아닌 인간의 실존에 대해 왜 고민했는가.
영국의 대석학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에서 ‘내가 바라는 세계는 집단적 적대감에서

해방된 세계 만인의 행복이 투쟁이 아닌 협력에서 나올 수 있는 깨달음 있는 세계이며 그런 뜻에서

유일신 신앙의 기독교는 갈등과 대립을 초래함으로써 인간의 정의와 평화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토인비
토인비 역시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이라고 했으며

‘21세기에 맞는 종교가 있다면 독선, 배타의 자기중심적 종교가 아니라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난

(무아, 무집착의 객관적 관용주의) 불교가 될 것’이라 설파하였고,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현대과학의 결여된 부분을 메꾸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이다’라고 지적했다.

(박광서 서강대 물리학 교수의 저서와 하바드대 출신의 현각의 법문)

 

슈바이처

21세기의 성자라 일컫는 슈바이처 박사는 생명외경을 말했다.

백인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노예로 삼아 수천만 명을 학살

(유대인들이 이집트와 로마에 노예로 있었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거나 또는

미국과 남미에서 원주민을 일억 만 명을 죽이고 땅을 빼앗은 사람들이 유색인종보다 더 무가치한

동식물 곤충까지도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불교의 생명사상을 펼치게 되었을까.

1차 대전과 2차 대전은 과연 국가 간의 분쟁이 원인이었을까.

절대 권력 기독교가 개입되지 않았을까.

그것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다빈치 코드에서 언급한 가톨릭 극우 조직 오푸스데이는 나치스 당원이며 정신병력이 있는

에스크리바 신부가 1세기 전에 창립하였다.

엄격한 규율과 극단적인 금욕주의, 철저한 비밀과 세뇌교육이 특징이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게 복자시성을 내리고 추기경급이 아닌 주교급인 그에게 이례적으로

묘소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생전 히틀러를 찬양하였다.

히틀러 자신이 지독하고 광신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2천만 명을 죽인 나치스의 만행은 가톨릭의

음모와 교황의 지원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소설이 아닌 역사적 진실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극우 보수 세력의 뿌리는 가톨릭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다빈치 코드에서 초보수적

이라 말한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이교도와 타민족을 침략 살해하고 사실을 은폐하며,

앞서가는 여성을 마녀사냥한 광기의 역사,

인간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온갖 잔인한 방법과 고문 장치를 만드는데  선구적인 그들,

성직자가 전쟁에 나가 피를 묻히고,

재판관이 되어 인간의 생사를 가름한 종교 권력의 만행,

강자에게는 굴종하고 약자에게는 가혹한 피의 역사,

여성 장애자 유대인, 유색인종을 학대하고 말살하려한 기독교의 어두운 과거는

히틀러의 세계 지배와 신의 심판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산더미 같은 역사적 범죄들

개신교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단죄한 후, 새 지배 권력으로서 인류 역사에 씻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루터와 칼빈은 청교도의 기치를 들고 반대 세력을 수없이 처형하였으며,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지배 억압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유럽이 남미를, 미국이 북미를 차지하고 200년 후 2차 대전의

최강자가 됨으로써 기독교는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세계적인 지배자로 부활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밤낮 외우는 주문처럼 하느님의 은총이나 섭리, 성령의 가호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사실은 막강한 군사력과 침략의 야만, 사탄과 하느님보다 무서운 핵무기의 보유 및 사용 때문이다.

수많은 양심적인 지식인, 선구적인 사상가, 평화주의자, 진보적인 과학자들처럼 다빈치 코드는

21세기 인류의 지향점을 밝힌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 21세기인류와 지구의 공존을 위해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 인류가 걸어온 길, 어두운 기독교 지배의 역사를 태양 앞에 드러내어

음습한 광기를 없애는 것이라 제시한다.

다빈치 코드가 단순한 소설이나 허구가 아닌 역사의 진실과 사실에 입각한 역사기록이요,

천년 왕국 기독교 고발 작품이라는 의미가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다만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이해하고 소화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건 몰락하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일 수 있으며

(맹신도 및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데 불편이 별로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교의 인연, 인과론에 의하면 이 세상은 수직과 수평으로 자신과 그물처럼 엮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태평양 건너에서의 나비 날개 짓이 수만리 밖에서 태풍이 되고 황사와 오염물질이 수 천 수 만

킬로를 뒤덮으며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재앙이 되는 세상이다.

기독교의 우주 정복자이며 절대 우상인 여호와 하느님, 천주님은 이 세계의 수호자가 아니며,

파괴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짜 예수를 진짜 예수로, 가짜 하느님을 진짜 하느님으로 둔갑시켜

인류역사를 왜곡하고, 지배하는 것이 생명과학과 우주과학, 위성통신과 컴퓨터라는 첨단과학

문명 앞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기독교의 종말 예고,

'예수 후 예수'

다빈치 코드에 이어 최근 출간된 ‘예수 후 예수’는 기독교의 기원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인간의

아들이 어떻게 신의 아들이 되었는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기술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종말을 예고한다.
미국 우파와 바디칸, 중국, 러시아 등의 좌우파 세력으로 분열되어 마치 조선조 말이나 해방 정국을

닮아있는 한국은 표면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이고 부강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태풍의 눈을 안고 있다.

 

분열적이고 소모적인 좌파세력도 걱정이지만, 미국의 직간접 영향을 받고 있는, 특히 기독교의 역할은

절대적인 상황이다.

선악이나 인권과 진실, 신과 악마와 아무 관계없이 한국 기독교인은 대다수가 종교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최대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미국이 로마제국처럼 멸망하거나 미국을 추월하는 강대국이 나타난다면

한국 기독교인은 틀림없이 기독교를 버릴 것이다.

말하자면 오강남 교수의 말처럼 한국 기독교인이 믿는 것은 성경이나 하느님 말씀이 아니고,

초강대국 미국의 돈과 힘인 것이다.

 

기독교의 종말과 그 대안

수많은 세계적인 지성인들, 종교 지도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대안은 무엇인가.

나는 단연코 불교의 중도 사상의 가치관이라 본다.

이 세계는 신과 악마의 흑백논리가 아니며, 좌우 선악이념의 대립으로 평화가 오지 않고,

세계 지배의 종교 권력은 환상이며, 오직 신과 인간, 자연이 하나인 평등 세계, 생명 공동체인

화엄 사상이 그 해답이다.

 

천주교가 진보주의 개신교 목사들보다 파렴치

중도 화엄사상은 이 세계를 커다란 원으로서 감싸는 원융무애 정신으로 지배, 대립, 차별, 분열,

증오, 갈등을 치유할 인류의 마지막 구원 사상이라 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엄숙하고 경건하며 고상해 보이는 가톨릭을 좋아하고, 한 때 동경하였으나,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고민하며 때로는 이름난 성직자들과 교류하였으나 허상을 보았고,

인류 역사에 해를 끼친 종교 권력 집단임을 깨달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순수하고, 인격이 높으며 양심적인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사회적 범죄를 밥 먹듯이 하고 이기주의와 위선적인 천박한 개신교인들이 대다수인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 더 부정적으로 비치지만 극소수이나 기독교의 잘못을 반성하고 심지어 성경과

기독교 역사 자체에 낱낱이 근거를 대어 정직한 비판을 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훨씬

인간적이며 탈권위적이라 느낀다.

 

개신교에도 양심과 희망이 있어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라고 했다가 추방당한 변선환 전 감리대 신학대학장.

평생 동안 이화여대 교목으로 신학을 가르치며 불교와 도교의 교재를 가르친 김용호 목사,

불교와 다도문화를 전공하여 목사라고 내세우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전 연세대 교목이며 박물관장

윤병상 목사, 신학 교수이며 동시에 불제자라 자랑하는 정선경 교수, 개신교단의 양심적인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목사, 불경을 번역하고 가르치는 이현주 목사, 기독교인이면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불교학 박사 오강남 교수,

수십 년 간 기독교 교리와 역사에 날카로운 분석을 한 ‘기독교 대 조작사’의 심상용 목사,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의 한용상 장로,

수십 년간의 불교학 연구에 몸 바쳐 ‘보살 예수’를 펴낸 하바드 종교학 박사 길희성 교수,

칠십 평생 기독교인으로 종교철학과 여성학을 대중화하는데 앞장서다가 작년 말 달라이라마

만나 감화를 받은 황필호 박사,

종교의 자유를 위해 맞서 싸운 제자를 감싸다가 사직한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의 저자

유상태 목사,

무교회 민중 기독교 사상을 위해 한평생 투쟁한 함석헌 선생,

인간과 벌레의 DNA 가 98% 일치한다며 불교의 윤회사상을 입증한 열린 사고의 기독교 최고

과학자 김용준 박사,

민족 분단과 독재 권력에 항거한 문익환 목사

등은 내가 직간접으로 만나본 한국 개신교의 양심이며 희망이다.

 

배타.독선를 고집할 수록 기독교는 멸망의 길로

다수 기독교인들이 맹신하듯이 기독교 자체와 성경을 비판하면 사탄이요 징벌을 받을 것으로

믿는데 바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 아닌 기독교의 종말과 멸망을 가져올 이유 된다.

스스로 정화하고 개혁이 없는 집단은 발전은 커녕 정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냉엄한 인과법칙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세계를 뒤바꿀 것이다.

현재 유럽, 미국에서 불고 있는 불교명상문화, 동양문화의 열풍이 아닌 정착 내지 접목 단계

이 세상 어느 것도 상대가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것으로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문화로서 생명을 이어가고자 함이다.

그것의 선두에 불교가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과거 유럽, 미국인들과 조선조 말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은 항상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신과 하늘의 성령과 계시를 받는 특별한 존재라고 자만하며 착각한다.

이 점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비현실적인 몽상가나 종교적 절대주의의 오류를 깨닫지 못한다.

 

로마황제가 만든 하나님 우상을 버려야

인간의 운명은 어떤 절대자나 숙명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며 인간은 또한

다른 인간과 똑같은 존재로서 자연법칙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인격신이 아닌)의 일부인 것이다.

다만 세상과 인간을 인식하고 초월하는 정신적인 능력이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남으로서 영장류라

생물학에서 부르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만물의 주인(인간) 세상의 주인(창조주,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신)을 정복하는 것은 종교적인 개념과는 반대로 정치 권력적인

개념인 것이다.

 

진정한 우상숭배는 기독교

역사적인 정통보수 기독교와 한국, 미국의 기독교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탐욕과 지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돈과 권력, 무력의 우상숭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은 거짓 예수요, 사탄의 기독교임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반성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와 미국 개신교, 바디칸 등이 과연 말로서가 아닌 실천으로서 세계역사를 창조적으로

바꿀만한 예지의 능력과 순수한 양심이 남아있을까.

21세기 초, 최대의 화두일 것이다.

세계는 전쟁인가 평화인가 그것을 보면 그들의 앞날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바꾼다면 공산주의 권력도 호전적인 이슬람 세력도 평화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호전적인

막강한 기독교가 바뀌지 않으면 적그리스도 세력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신이 있으면 악마도 있지만 신이 없다면 악마도 없다.

이 세상은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무유정법無有定法) 상대적인 가치만 존재한다.

 

악마(악) 때문에 신(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궤변이며 세뇌교육의 결과이다.

나는 기독교인을 볼 때마다 예전에는 불쾌하고 탐욕스럽게 느껴졌으나 이제는 불쌍하게까지 보인다.

인생의 진리에 눈감고 사는 이들,

교조주의에 빠져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

현실적인 욕망을 신의 은총이라 착각하는 이기주의자들,

부모조상의 전통을 모르는 사람들,

인간의 가치를 모르는 냉혈적인 사람들,

정신병자 같은 환상을 쫓는 사람들
(다빈치 코드의 주교와 오푸스데이의 광신자, 암살자 같은),

지구와 태양계, 우주와 자연은 자연법칙에 따라 인과율에 의해 움직일 뿐인데 마치

인간을 닮은 거대한 신(수퍼맨, 사실상 괴물, 드라큘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이 있어

조종한다는 유아 정신병적 착각이다.

 

서구인들이 불교와 명상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역사적인 기독교의 위대한 착각을 현실의

인간으로 인도하는 이유에서다.

눈 감은 인간에서 눈 뜬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인간이(또는 예수) 영원하고 전능한 신이 아니라 자연계의 고등생명체라는 자각이 아닐까.
www.jabg.net  

출처 : 개종
글쓴이 : gottam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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