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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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란 무엇일까요?`

보현화 2008. 1. 24. 18:54

‘종교란 무엇일까?’

함께 사유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있는 아들의 손을 잡고 과자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르는지 가게 주인에게 민망할

정도로 신중하게 선택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쌓아놓은 사과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사려고 하는 주부는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되풀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린 애들이나 어른이든 잠시 입안에 머무는 먹을거리도 저렇게

신중하게 골라서 선택하는구나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잠시가 아니라 한 평생 동안 신행해야 하는데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지 그 중요성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지 않을까요?

수많은 갖가지 종교가 바른 가르침이라고 목청은 높이지만

실제는 종교가 개인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사회를 어둡게 하여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많은 현실에서 어느 종교가 옳고 그른지 찾기가 어려워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종교가 왜 필요하며 무엇일까요?

한번쯤은 깊은 생각에 잠겨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적인 어려운 분석과 종교적인 논리가 아니더라도

확신할 수 없는 내세의 논리나 확실한 증거도 없는 과거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눈앞의 현실에서 확신할 수 있는 논리가 어느 정도 있어야만

잠시도 아닌 평생을 신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宗敎)란 무슨 뜻일까요?

종교의 어원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 법화경을 해석한 중국의 천태산 지자스님의

법화현의(法華玄儀)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이 어원을 불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달리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어원에는 연연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요즈음의 논란에서 혼돈되지 않으려면

종교의 뜻은 분명히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여러 가지 시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요?

종교는 한문으로 ‘宗敎’이며 ‘宗’은 ‘마루종’이고 ‘敎’는 ‘가르칠 교’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흔히들 종교를 신앙의 종교와 수행의 종교로 나누어서는

상호 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비방을 합니다.

신앙의 종교는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자로 신앙하므로

   구원과 성취를 얻는다고 하는 종교로 기독교, 천주교, 등이 있으며

수행의 종교는 자신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으니 닦고 행해서 부처가 되라고

    가르치는 종교로 불교가 있습니다.

신앙의 종교에서는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지고 신이 예비(준비)하신 길을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것 밖에 없기에

‘최고의 가르침’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요?

수행의 종교에서는 단어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부지런히 닦고 행하여

이루기 위해서는 갖가지 방편(방법)의 가르침이 필요하기에

최고의 가르침이 있지 않을 까요?

분명 종교의 뜻은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아래의 글까지 읽으시면서 함께 깊이 사유하는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종교는 왜 필요할까요?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종교의 필요성은 개인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먼지 개인적인 면을 살펴보면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자주 인구의 회자처럼 오르내리는 말과 같이

사람이 자기를 주재(主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삶이 힘에 겨울 때에 의지처가 되어 주고

‘너에게 능력이 있어 마음먹기 달렸어 힘내’하고 축 늘어진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바르게 노력하여 대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과 하나님도 믿어서 의지만 하고 바른 행을 하도록 가르침이 없다면

골목입구에 서 있는 대장군과 다름이 없으며 종교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사회적으로 종교의 필요성

법으로 바로 잡을 수 없는 공동체 생활에서 무너진 질서와 도덕성을 회복시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죄를 법으로 만든다면 우린 모두 감옥에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 법이 없다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이 세상이

지옥이지 따로 없겠지요. 법에는 죄가 되지 않지만 종교에는 죄가 됩니다.

법에서 만들지 못하는 살기 좋은 사회를 종교가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종교는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맹신을 요구하면서 사회를 어둡게 만들어 가는데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신의 종교에서는 영혼의 아버지가 육신의 아버지보다 중요하다고

교리 우선주의만을 주장하여 가정의 윤리를 깨뜨리고 믿음만 종용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의 종이라 죽음을 불사하고 선교를 강조해서

온 나라를 어둡게 만든다면 그것이 진정 종교가 할 역할일까요?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바른생활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사회를 어둡게 만들어 가는 종교가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하지 않을까요?


종교는 대의를 이해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부활을 논하면서

문자가 없던 시대의 역사로 끝도 없는 시시비비를 언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설전에 불과합니다.

경전이든 성경이든 나쁜 말은 없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어느 한 구절로 논한다는 것은 눈 깜고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땅을 치고 울면서 할렐루야! 하고 외친다고, 부처님의 형상 앞에 절을 한다고

그 또한 방편(방법)이기에 시비를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교는 대의를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가 바른 종교일까요?

무엇이 ‘최고의 가르침’일까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싼타크로스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어린 시절 착한 일을 하면 굴뚝으로 싼타크로스가 오셔서

잠잘 때 선물을 두고 가신다고 믿고(信) 착한 일을 하게 됩니다.

점점 커 가면서 싼타크로스가 부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 착하게 자라도록 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이해(解)하게 됩니다.

철이 들면서 싼타크로스의 선물이 없더라도 선행(行)을 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들이 착한 일을 하도록 싼타크로스가

되어야(證)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 아시는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종교 또한 믿고(신) 가르침을 이해하고(해) 행하고(행) 행하므로

성취하는(증)것으로 방편을 삼지 않으면 최고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쉽다고 해서 믿는 것(信)에 머물러 있으면 될까요?

힘이 들지만 가르치고 배워서 종교의 대의를 이해(解)해야 합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실천을 함으로써 완성되기에 부지런히 행(行)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다 행하면 바로 그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證)지지요

신(信)→해(解)→행(行)→증(證)을 하지 않는 종교는 바른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나 어느 종교라도 이런 이정표가 없는

가르침은 그릇된 가르침이지 ‘최고의 가르침(종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럼 왜 그런지 생각해 볼까요

첫째 믿음(信)은 종교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다 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쉽고 편리한 방법입니까?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길이 진정 있다면 믿으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스님들은 머리 깎고 힘든 수행을 하며 우리들은 왜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합니까?

  영원 세세 믿더라도 믿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고(信) 이해(解)해서 행(行)해야만 이루어(證)집니다.

  오늘의 종교적 병폐가 믿음(信)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맹신으로 이어져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구하면 얻는다. 라는 말씀에 구하는 대로 받았습니까?

  여쭈었더니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구합니까? 못 받았으니까 또 구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제 구한 것을 못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라고 묻자 또 나쁜 일이 생기기 때문에 기도를 한다는 대답에

  다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신에게 구해서 생긴 일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아니라는 대답에 “나쁜 일을 신에게 구하지 않아도 생기는 것처럼

  좋은 일도 신에게 구하지 않아도 생깁니다. 받았다는 것은 님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믿고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을 믿고

  저의 선친은 고조부님의 묘 터를 믿었으며 장모님은 한얼교의 한님을

  믿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나님께서, 할아버지께서, 한님께서 돌봐 주신다고 믿는 믿음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푸라기를 잡고 믿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믿기만 하면 되지 무슨 ‘최고의 가르침(종교)’이 필요합니까?

  종교다, 종교가 아니다, 사이비다, 이런 말은 서로간의 비방일 뿐이지

  믿는다는 것에는 같은 것이기에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만끽할 뿐이지

  종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고 그 다음 진리를 이해시켜서 행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최고의 가르침(종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해(解) 입니다.

  절이나 교회나 바르게 사는 방법(진리)을 가르쳐야하는 곳입니다.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무엇이 진리일까요?

  신앙의 종교는 신이 진리의 당체라고 하면서 믿고 구하라고 합니다.

  이런 논리에서는 무엇을 이해해야 믿을까요?

  신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절대적 능력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믿게 되겠지요. 그래서 절대자, 창조자, 조물주, 유일신, 등등의

  여러 가지 단어로 신이 모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이해시키면서 모든 것을

  그 전능한 신을 무조건 믿음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데서 맹신을 강조하는

  종교가 생겨납니다.

  수행의 종교는 부처님은 진리를 가르키는 이정표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치는 방법을 이해하고 부지런히 닦고 행해서 성취하라고 하십니다.

  단어 뜻 그대로 닦아서 행하는 종교란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팔만사천이란 엄청난 방편으로 닦아서 행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으시면 경전뿐만 아니라 성경도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여러 가지 시비에 흔들리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중학교  한문시간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단어를 배웠습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며 얽매이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뜻을 알고서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암기하여 저의 집 가훈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있었던 일입니다.

  윤리 시간에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명언을 설명하면서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고

  귀에 딱지가 된 말로 침이 마르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하시던

  윤리선생님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이어지는 성경시간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인간은 살아가고 예수님을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목사님의 가르침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방황을

  했는지 모릅니다.

  사십 중반을 넘어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늘 바르게 힘써 노력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살아보니까 맞습니다!’하고 손뼉을 칩니다.

  어느 가르침이 진리일까요? 옳고 그름의 판단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절대적 권력과 부를 가지고 당신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면 아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달라고 해라 그러면 준다고 할 겁니까?

  줄때 주더라도 부지런히 노력해라고 가르치겠습니까?

  무엇이 최고의 가르침일까요?

  신의 가르침이 인간의 가르침보다 못하다면 누구를 믿어야 될까요?


셋째 행(行)은 ‘최고의 가르침’에 이해가 완전하면 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는 어렵기만 하지만 행은 고통까지 따르지요

  그렇다고 행을 하지 않는 해는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지요

  성경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의 실상이다”라고 행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수행의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면 어불성설이지요.

  최고의 가르침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무엇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넷째 증(證)은 최고의 가르침에 따라 완전한 행을 하면 곧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수행의 종교에서는 최고의 목표가 성불이므로

  ‘부처님이 되세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신앙의 종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신이 신을 믿는 일이 일어나지요, 유일신, 절대자 란 단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언제나 인간으로 머물러 믿고 구하기만 하라는

  것을 가르칠 수밖에 없지요.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다며

  중생이 열심히 수행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코로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곧 하나님이 아닐까요.

  바른 종교를 찾아서 열심히 믿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행하여 부처가 되고

  하나님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바꾸겠다는 희망을 갖고

  발심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불교를 신행하시다가 그만 두신 분이 계십니까?

수행하시는 스님들의 말씀은 깊은 사유가 따라야만 큰 공부가 됩니다.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일요일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기도하러 온 저에게

도량의 스님께서

“가게는 어떻게 하고 왔습니까? 일요일 날 문을 열어 놓으면 장사가 잘 될 텐데.”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데 1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많은 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휴가철이 한창인 무더운 여름날 저녁법회를 마치고 주지스님께서 계단을

내려가시면서 “덥다고 안 오고 춥다고 안 오고 도대체 어디에 가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스님처럼 똑 같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수행하시는 스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지 못하는 제가 하는 말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은 같은 말이라도 천양지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행하시는 스님이 하신 말씀은 부지런히 공부해서 성불해야

되는데 하시는 願(원)이지만 행하지 않는 제가 한 말은

‘자기들끼리만 휴가가고 비나 억수로 와라’라고 하는 怨(원)인 것입니다.

신(信)과 해(解)만으로 수행하시는 스님들의 행주좌와(行住坐臥)를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또한 도반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반들의 마음과 생각이 자신과 똑 같다면 배울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저렇게 해서 안 되겠구나’ 또는 ‘저렇게 해야 되겠구나’하는 살아있는

가르침을 도반은 줍니다. 앞을 막으면 비켜가고 듣기 싫으면 귀를 막고서라도

계속 가야만 저 언덕에 오를 수 있을 터인데 가는 것을 멈추면 끝내 오르지

못하겠죠? 속이 상해서 발길을 돌리고 싶어 질 때마다

‘삐쳐서 안 나오면 지만 손해지’ 하시는 큰스님의 음성을 가슴에 깊이 느끼면서

회초리로 삼아 봅니다.

부처님의 상호를 모셔 놓은 곳이 참 많습니다.

안방에 모셔 놓고 점을 보는 곳에서부터 법당에 모셔 놓고 부적을 쓰는 곳도

있습니다.

작년 정초에 주지스님께서 경전수업 법회를 하시면서

“법을 가르치는 사찰에는 한산하고 부적을 써 주는 사찰에는

북적거리는 것이 불교입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신행하는 모든 불자들이 깊이 가슴에 한번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에 머물러 있는 불자들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도량이 있다면 그 재물은 또 점치는 도량을 세울지 모를 일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이해해서 행하도록 하는 도량이

재물을 모은 다면 불국정토를 이루지 않을까요?

한번도 경전 수업시간을 빠뜨리지 않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이 행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갖가지의 방편으로 재촉하는 도량이

여기 있습니다.

신해행증으로 장엄한 한국불교대학(영남불교대학)을 소개합니다.

다시 한번 발심하는 계기의 좋은 인연을 갖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바르게 노력할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이 있는 불교가 있습니다.

뗏목처럼 강을 건너고 나면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면서

권위도 신앙도 바라지 않고 오직 여러분의 깨달음만을 원하시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믿고 오시면 가르치고 행하기를 부지런히 해서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도량이 있습니다.

한국불교대학  대 관음사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구큰절:(053)474-8228

  경산도량:(053)816-8228

  칠곡도량:(053)313-8228

  구미도량:(054)443-8228

  감포도량:(054)771-8350

  중국 청도도량: 86-532-8769-2282


만약 소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한다면 이런 글을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행을 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지요.

결국 서너 가지 아는 것으로  주제넘게 이 글을 올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여러분이 종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불교를 만나는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대화를 원하시면

ykys0214@hanmeil.net로 메일을 부탁드립니다.



한국불교대학  경산도량   18기  혜정 합장

출처 : 불교 인드라망
글쓴이 : 慧定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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