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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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석장태재선생작품(펌)

보현화 2008. 4. 23. 17:23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말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청평산에 머물면서 우연히 짓다


십여년 동안 강호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江湖歷盡十餘年

갑자기 가슴속이 저절로 활짝 열렸네 驀得胸中自豁然

청평에서 이룬 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리 有問淸平成底事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피곤하면 잔다’ 飢飡喝飮困安眠

- 나옹선사(1320~76)의 ‘청평산에 머물면서 우연히 짓다’(住淸平山偶題)



 

강은 건넜으면 배를 버려라
( 懶翁語錄 )


스님은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평일의 수행을 날낱이 물은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모름지기 대장부의 마음을 내고 결정된 뜻을 세우시오. 그런 다음 평생에 깨치거나 알려고 한 모든 법과 문장과 언어들을 싹 쓸어 던져 버리고 다시는 집착하지 마시오. 한번 앉으면 그 자리에서 팔만 사천의 온갖 생각을 끊고 본래부터 공부하던 화두를 한번 듣고는 다시는 놓지 마시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것이 본래의 면목인가?' '어떤 것이 나의 성품인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이런 화두를 들되 마지막 한마디를 힘을 다해 드시오.

화두가 앞에 나타나면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 고요한 곳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한결같을 것이오. 이 경지에 이르면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 입을 때나 밥 먹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온몸은 하나의 의심 덩어리가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부딪치고 또 부딪쳐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똑똑히 꿰뚫어보시오. 화두 위에서 그 뜻을 헤아리거나 어록(語錄)이나 경전에서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박 깨뜨려야 비로소 집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만약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않아 냉담하고 아무 재미가 없으면 낮은 소리로 서너 번 외워 보시오.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여러분이 저마다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
서 용맹 정진하는 가운데에서도 더욱 용맹 정진하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20년이고 30년이고 묻지 말고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성인(聖人)의 씨앗을 기르도록 하시오. 그러면 그는 천하를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 하며, 가시덤불 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고 한 생각 사이에 시방 세계를 삼키고 삼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그대들은 비로소 법신불(法身佛)의 모자를 머리에 쓸 수 있고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의 머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다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방석 위에 우뚝 앉아 눈을 바로 하고
이것이 무엇인가(是甚 )의 도리를 참구하시오. "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려라
재(齋)를 올린 뒤 스님은 법상에 올라 한참 묵묵히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여러 불자들, 알겠소?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번 보시오.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등은 본지풍광(本地風光) 을 밟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한 가지 말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똑똑히 살피시오.

사대(四大)가 모일 때에도 이 한 점의 신령스러운 밝음은 생기지 않았고 사대가 흩어질 때에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소. 나고 죽음과 생기고 무너짐은 허공과 같은데 그것이 어디 있겠소. 이미 없어진 것이라 찾아도 자취가 없고 트이어 걸림 없음이 허공과 같소. 이 세계와 티끌이 바로 미묘한 본체요,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가 주인공이오. 소리와 모양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나고 모양과 소리가 없으면 그윽히 통하게 되오. 때를 따라 당당히 나타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묘하고 오묘하오. 자유로운 그 작용이 때를 따라 죽이고 살리고 하는데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그것의 힘 이 오. 여러 불자들, 알겠소? 만약 모른다면 이 산승(山僧)이 불자들을 위해 알도록 하겠소."
주장자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한 번 할(喝)을 한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서 단박 밝게 깨쳐 깊고 묘한 이치의 문을 뚫고 지나가면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들의 골수를 환히 보고 그분들과 손을 마주잡고 함께 다닐 것이오."
또 한 번 주장자로 탁자를 친 뒤 말을 이었다. "이로써 많은 생에 함부로 자식이 되어 부모를 해치고 친한 이를 원망한 일에서 벗어나시오. 이로써 저승과 이승에서의 온갖 업(業)에서 벗어나고 지옥의 갖가지 고통 받는 무리에서 벗어나시오. 이로써 괴로워하는 축생의 무리에서 벗어나고, 성내는 아수라의 무리에서 벗어나시오. 이로써 인간의 교만한 무리에서 벗어나고 천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무리에서 벗어나오."
죽비를 내던지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릴 일이지 무엇하러 다시 나루터 사람에게 길을 묻는가?"


공부 열 가지
세상 사랑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모양과 소리에서 벗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
공부가 익었으면 다시 거친 콧김을 없애야 한다. 거친 콧김을 없앤 때는 어떤가? 콧김이 없어지면 냉담하고 재미가 없으며, 기력도 없고 의식이 분명치 않으며 마음도 활동하지 않는다. 또 그때에는 그 허망한 몸이 인간에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그때
는 어떤가?
공부가 지극해지면 움직이거나 조용함에 틈이 없고, 자거나 깨거나 한결같아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때에는 어떻게 하
는가?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작용은 인연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작용에 따르는 것인가?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초월해야 하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그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병 문안
그대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다. 그것은 무슨 병인가? 몸의 병인가, 마음의 병인가? 몸의 병이라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이루어진 것, 그 네 가지는 저마다 주인이 있는데, 그 어느 것이 그 병자인가? 만약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 비록 거짓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는 실로 공(空)한 것이니 병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일어난 곳을 추궁해 본다면 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또 고통을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살피고 살펴보면 문득 크게 깨칠 것이다.
이것이 내 병 문안이다.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인가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했다.
"깨달음의 성품은 허공과 같은데 지옥. 천당이 어디 있으며 부처의 몸은 온 우주에 두루 있는데 아귀와 축생이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거나 속인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상생활에서 짓는 선과 악을 다 법이라 하오.
어떤 것이 마음인가? 마음은 여러분들에게 있으며, 이를 자신이라 부르기도 하고 주인공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언제나 그것의 부림을 받고 어디서나 그것이 계획하는 대로 따라다니오.
하늘을 덮어 쓰고 땅에 서는 것도 그것이요, 바다를 지고 산을 떠받치는 것도 그것이며, 그대에게 입을 열고 혀를 놀리게 하는 것도 그것이오.
이 마음은 항상 눈앞에 있지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며, 마음을 먹고 오래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오. 안자(顔子)가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며, 바라볼 때는 앞에 있더니 어느새 뒤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도리오.

한 생각도 생기기 전이나 망녕됨이 없을 때에는, 옛 거울의 광명이 물들거나 더러움이 없는 것과 같고, 고요한 못이 움직이거나 흔들림이 없는 것과 같아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나타내고, 중국 사람이 오면 중국 사람을 나타내며, 하늘과 땅을 비추고, 예와 지금을 비추되 털끝만큼도 숨김이 없고 털끝만큼의 장애도 없소. 그것은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경계이며 또 여러분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받아 써도 다하지 않고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물건이오.
스님은 주장자를 들고 "이것을 보는가?" 하고 다시 한 번 내리 치고는 말했다.
"이 소리를 들었는가? 보고 들은 그것은 무엇인가? 이 뜻을 분명히 알아 의심이 없고 또 부처님의 힘을 입으면 곧 고통이 없는 즐거움을 즐길 것이오. 그리하여 가벼우면 천당에 태어나고 무거우면 불국(佛國)에 날 것이오."


구슬을 노래함
신령한 이 구슬 지극히 영롱하네. 본체는 항하사(恒河沙)를 둘러쌌으나 안팎은 비었도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어 희롱하고 희롱해도 그 희롱 끝이 없네. 마니(摩尼)라고도 하고 영주(靈珠)라고도 하나니 이름과 모양은 많으나 본체는 다르지 않네. 세계마다 티끌마다 맑고 밝나니 마치 둥근 달이 가을 강에 가득한 듯하네. 배고파하는 것도 그것이요 목말라 하는 것도 그것이니, 목마름과 배고픔 아는 것, 별것 아니네. 때가 되면 밥 찾아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일, 조금도 어기지 않네. 그른 일도 그것이 하고 옳은 일도 그것이 하니 아미타불 염불하는 수고가 없네.
집착을 해도 집착이 없으니 세상에서 자유로운 그가 바로 보살이네. 이 마음의 구슬은 불잡기 어렵고 분명하고 영롱하나 얻기 어렵네. 형상이 없으면서 형상을 나타내고 가고 와도 자취가 없으니 헤아리기 어렵네. 쫓아 가도 못 따르는데 스스로 돌아오니 잠깐 사이 서천(西天)에 갔다가 순식간에 돌아오네, 놓으면 허공도 그 옷안에 들어가고 거두면 티끌보다 적어 쪼개기 어렵네. 불가사의한 그 본체는 굳고 단단한데 석가모니는 심왕(心,王)이라 불렀네. 그 작용이 끝도 한도 없으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잊고 사네. 정령(正令)의 행함이며 누가 그 앞에 서랴. 부처도 악마도 모조리 베어 없앴네.

이로부터 온 세상에 다른 물건은 없고 강에는 핏물만 가득하여 급히 흐르네. 눈은 보지않고 귀는 듣지 않나니 보고 듣지 않는 것이 참으로 보고 들음이네. 그 가운데 한 개의 밝은 구슬 있나니 토하거나 삼키거나 항상 새롭고 새롭네. 마음이라 성품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마음과 성품은 원래 반연 따라 생기는 그림자네. 누구든 이런 이치에 의심이 없으면 제 몸의 신령한 빛이 항상 빛나라, 도(道)라고도 하고 선정(禪定)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다 억지로 불인 말이네. 진실로 사고(師姑;비구니의 별칭)가 여인임을 알면 걷는 수고가없어도 저곳에 도착하리. 부처도 없고 악마도 없나니 악마도 부처도 뿌리 없는 눈(眼) 속의 꽃이라네. 언제나 쓰면서도 항상 무사하니 신령한 구슬이라 부르면 꾸지람을 받으리라.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으며 항상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를 밝고 다니네. 거두거나 놓거나 때를 따르고 마음대로 취급해도 골격이 빛나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면서 앉으나 서나 분명하여 떠나지 않네. 애써 좇아도 떠나지 않고 있는 곳을 찾아도 일 수가 없네. 아하하하, 이 어떤 물건인가? 1,2,3,4,5,6,7이로다. 세어 보고 뒤져 보아도 끝이 없나니 마하반야바라밀이네.

누더기 옷을 노래함이 누더기 옷이 나에게 가장 알맞으니 겨울. 여름 입어도 항상 편안하다. 누덕누덕 꿰매어 천만의 맺음이요, 겹겹이 기웠으니 선후(先後)가 없네. 자리도 되고 때론 옷도 되나니 철과 때를 따라 알맞게 쓰이네. 이로부터 상행(上行)에 만족할 줄 알았더니 가섭(迦葉)이 남긴 자취 여기에 있네. 한 잔의 차와 일곱 근의 장삼을 조주(趙州)는 부질없이 세 번 들기에 수고로웠네. 천만 가지의 현묘한 말 있어도 어찌 우리 집의 누더기 장삼만하랴. 이 누더기 옷 좋은 점 많으니 입고 다니기에 더 없이 편리하다.

취한 눈로 꽃을 보고 누가 거기에 집착하랴. 도에 묻혀 사는 이는 스스로를 지키네. 이 누더기 옷 몇 년을 입었는가? 반은 바람에 날아가고 반만 남았네. 서리 치는 달밤의 초암(草庵)에 았나니 안팎을 가릴 수 없어 모두가 몽두(蒙頭)네. 몸은 가난하고 도는 다함이 없어 천만 가지 묘한 작용 끝이 없네. 누더기 옷에 멍청한 이 사람을 비웃지 말라. 일찍 선지식 찾아 진풍(眞風)을 이어 받았네. 헤어진 옷 한 벌에 지팡이 하나, 천하를 활보해도 걸릴 데 없네. 강호(江胡)를 떠다니며 무엇을 얻었는가? 배운 것은 다만 빈궁뿐이네. 명리를 구하지 않고 산승의 가슴 비었거니 무슨 정(情)이 거기 있으랴.
발우 하나뿐인 이 생애가 어디 가나 족하나니, 그저 이 한맛으로 여생을 보내리라. 생애가 족하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분수 밖에서 탐욕 부리는 사람 참으로 우스워라. 전생에 복락을 모아 두지 못하고 천지를 원망하며 부질없이 허덕이네. 달도 기억하지 않고 해도 기억하지 않으며 경전도 아니 외고 좌선도 하지 않네. 누 런 얼굴에 잿빛 머리 이 천치 바보, 오직 한 벌 누더기로 여생을 보내리라.


해골을 노래함
이 마른 해골이여, 몇 생 동안 축생. 인간으로 허덕여 왔는가? 지금 진흙 구덩이에 떨어졌으니 반드시 전생에 마음 잘못 썼으리. 한없는 세월 동안 성왕(性王)에 어두워 이 몸 분주히 달렸으리. 탐욕에만 매달렸으니 어찌 머리 돌려 바른 광명 보호했으랴. 이 마른 해골은 둔하고 어리석으니 이로 인해 천만 가지 악을 지었으리.

만사가 다 무상함을 꿰뚫었더라면 한 걸음도 떼지 않고 해탈했으리라. 그 당시 좋은 시절 등지고 이리저리 바람 따라 다녔구나. 권하노니 빨리 머리 돌려 바른 길로 돌아가라. 모였다 흩어지고 떴다가 가라앉으니 이승이나 저승이나 마음 편치 않으리. 단지 한 생각에 빛을 돌이키면 생사 벗어나 뼛속 깊이 들어가리라.머리에 뿔이 있거나 없거나, 삼악도(三惡道)를 기어다니면 깨칠 날 없으리라. 문득 선각자들의 교훈을 되새겨 보면 당장 잘못을 깨달으리라. 탐내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그 마음이 곳곳에서 혼미하여 허망한 티끌 뒤집어 썼네. 머리뼈가 바람에 날려 남북에 흩어졌으니 어디서 참사람을 볼지 몰랐네. 생전에도 그르치고 죽어서도 그르쳤거니 세세 생생에 또 그르치리라. 만일 한 생각에 무생(無生)을 깨달으면 그르침이란 원래 그르침이 아니네.

추한 데 집착하고 고운 데도 집착하여, 집착하고 집착하여 깨닫지 못했네. 문득 한 소리에 몸을 돌렸더라면 눈에 가득 허공이 모두 떨어졌으리라. 옳다 그르다 따지면서 모두 옳고 그른 구덩이에 빠져 기뻐하고 슬퍼하네. 죽은 뒤의 백골 무더기 깨닫지 못했으니 당당한 데 이르러도 자재하지 못하도다. 이 마른 해골이여, 한번 깨달으면 두꺼운 무명도 금방 재가 되리라. 이때부터는 모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나 조사들도 시기하지 않으리라. 시기하지 않으면 무슨 허물이 있으랴만 생각하고 헤아림이 곧 허물이네. 만일 쟁반의 구슬처럼 잘 운용하면 수천 겁도 눈 깜짝 사이에 지나가리라. 법도 없고 부처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물건도 없다네. 이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추울 땐 나무를 태워 불을 쬐네.


 

 

나옹설화

나옹의 집은 가난해서 나라에 바쳐야할 세금을 바치지 못하여, 만삭의 어머니가 관가에 잡혀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잡혀가는 도중에 길가에서 나옹이 태어났다 한다. 그래도 무도한 관속들이 어머니를 끌고 가자 핏덩이인 채로 태어난 길가에 버림받았는데,  아이는 날짐승이 날라와 날개로 덮어 주어 살아났다고 한다.


나옹은 출가 후 열심히 공부를 해서 드디어 득도하였는데, 자기 고장을 떠나면서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고,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 가지가 무성하면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나무가 죽으면 자기도 죽은 줄 알라 하였다.

그러데 그 나무는 지금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서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으로 자라고 있는데, 최근에는 시들기 시작해서 나옹이 이제 죽었다고들 한다.


  


 

 

 懶翁禪師
*고려 시대의 고승. 20세에 승려가 되고, 중국 원나라 북경에 서 지공(指空)선사 아래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371년 왕 사가 되고 보제존자(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지공, 무학대사와 함께 고려말 3대 화상으로 불리는 나옹선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10년 넘게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깨달음을 얻은 것은 좌선 정진하던 그 때가 아니라 돌아와 청평산에 한가로이 머물 때였습니다. 깨달음의 요체는 다름 아닌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피곤하면 잔다’는 사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선방이나 토굴의 장좌불와나 용맹정신에서만 나오는 게 아닌가 봅니다. 선사들의 말을 빌리면 떠나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행주좌와(行住坐臥),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하는 어묵동정(語默動靜),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모두 수행처요,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일본 선(禪)의 대가 스즈키 순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끊없이 계속하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이 고요하고 일상적인 것이 될 때 깨달음이 얻어진다.”(‘선심초심’에서)

나옹과 스즈키는 모두 일상의 삶이 바로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밥을 먹거나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저 할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지요. 처처에 불상이요 사사가 불공이니 무시선이요 무처선이라 좌선과 일상이 둘이 아닌(禪活不二) 마당에 끝없이 정진해야할 뿐이겠지요. 일체중생 모두 성불되어지길......




 

무학대사와 나옹선사의 만남

무학대사는 원효대사 만큼이나 유명한 역사 인물이기 때문에 떠도는 설화도 많은 것이다.
고향인 합천에서는 무학이 어려서 읍내 제일가는 부잣집에 꼴머슴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때 벌써 축지법 같은 도술을 썼다는 것이다. 부모 없는 고아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학은 매우 가난하게 자라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머리는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알았다는 천재 소년이었다. 18세에 홀연히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무학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는데 이 산의 용문사에는 유명한 혜명국사가 계셨다.
무학은 혜명국사를 사사한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어느 날 무학은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깨닫는다는 것을 도에 통한다, 즉 도통이라 하 는데 강도 높은 수도 끝에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무학은 비범하여 20세 남짓에 일차로 도통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자기보다 더 높은 스승을 찾았다.

옛날 사람은 스승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무학이 만난 스님들은 젊은 무학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침내 중국에 유학가기로 결심했는데 그때 중국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 였다. 공민왕 2년(1353). 원나라에 들어간 26세의 무학은 뜻밖에 나옹선사를 만나 사사하게 되었다.
나옹은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었으니 이국에서 스승을 발견한 것이다.

그 는 무학을 한눈에 알아보고 장차 큰일을 할 인물로 점찍었다.
나옹은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전남 승주의 송광사에 자리 잡게 되고 무학은 경기도 여주 고달산에 들어가서 조그만 암자에 머물게 된다.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은 경기도 양주에 크게 회암사를 짓고 그 낙성식에 무학을 불러 고려의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청했으나 무학은 굳이 사양하였다.

고려의 멸망을 미리 알아차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앞서서 태조 이성계와를 만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무학은 고려의 국사 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가 되는 것이다.


 

 

  희망의 문학

 

말이 없는 것은 청산이요, 모양이 없는 것은 유수(흐르는 물)로다.

 

값 없는 것은 바람이요, 주인 없는 것은 밝은 달이로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병 없는 이 몸은 걱정 없이 늙으리라.

 

지은이 : 성혼(成渾)

성격 : 풍류적, 전원적, 달관적(達觀的), 한정가(閑情歌)

표현 : 대구법, 의인법, 초장과 중장에서 대구의 묘미를 살렸으며, '업슨'이라는 시어의 반복을 통해 운율적 효과를 높이고 있음.

제재 : 청산, 유수, 청풍, 명월

심상 : 시각적 심상

주제 : 자연을 벗삼는 즐거움

출전 : 화원악보

 

태(態) 업슨 : 모양이 없는

갑 업는 :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님자 업슨 : 임자가 없는. 주인이 없는

분별(分別) 업시 : 아무 걱정 없이

말 업슨 靑山(청산)이요, 態(태) 업슨 流水(유수)ㅣ로다. : 청산과 유수가 대구가 되어 자연의 의연함과 영원함을 노래하고 있다. 지은이는 지자(知者)와 인자(仁者)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갑 업슨 淸風(청풍)이요, 님자 업슨 明月(명월)이라. : 청풍과 명월이 대구가 되어 세속을 떠난 자연 친화를 노래하였다.

이 中(중)에 病(병) 업슨 이 몸이 分別(분별) 업시 늙으리라. : 자연 속에 몸을 맡겨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세속적인 근심 걱정 같은 것은 잊어버리겠다는 달관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사대부들은 자연 속에서 세파에 찌든 마음을 씻고 정신적 안식을 찾았었다. 따라서, 시조의 소재도 자연에서 즐겨 찾았다.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말 없는 청산(靑山)과 모양이 없는 유수(流水)를 벗하며 세 속의 명리(名利)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옛 선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없다'라는 말의 반복으로 표현의 묘를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산수 자연 속에 묻혀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소탈하게 읊고 있다. 초장에서는 청산과 유수가 짝을 이루어 자연의 의연함을 노래하고, 중장에서는 청풍과 명월이 대구를 이루어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 살고자 하는 화자의 지향을 드러내며, 종장에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룬 가운데 달관의 경지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시조가 특별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전체적으로 '업슨'이란 말을 각 장마다 되풀이해서 운율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각 장마다 두 번씩, 전부 여섯 번이나 반복되는 '업슨'이라는 시어는, 단지 율동감의 차원만이 아니라, 이러한 반복의 과정을 통하여 시적 대상인 자연물과 시적 화자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청산, 유수, 청풍, 명월이 보여주는 반복되는 '없음'에 화자는 어느덧 동화되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며, 그 속에서 시적 화자는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늙어 가는 인생조차 편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3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충달(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순(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서울 순화방(順和坊 :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그는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체(辭遞 ; 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예빈시판관·장흥고주부·종묘서령·광흥창주부·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 : 식량)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 :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蚊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율곡집 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魚)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 :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이정암(李廷目)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 :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黛)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牛溪集, 牛溪年譜, 谿谷集, 淸陰集, 月沙集, 愼獨齋遺稿, 牛溪先生年譜附錄, 牛溪先生年譜補遺, 牛溪先生年譜後錄, 燃藜室記述, 儒敎淵源(張志淵),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東國文廟十八賢年譜(韓國名賢遺蹟硏究所, 1966),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丹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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