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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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것을 일러 행불10선(行佛10選) 이라 한다 [월호스님초청 53선지식 대법회]

보현화 2009. 2. 16. 20:51

우리절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의 회주이신 무일우학 스님만큼이나 큰 불국토 건설의 대원을 품고

아침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향기로운 법음을 전하시며 모두가 다함께 법륜을 굴려 나가기를 서원하시는 분이 계신다.

쌍계사 승가대학의 교수로 계시며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로 법음을 전하여 불자들은 물론 타 종교인에게까지

불심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계신, BBS 불교방송의 아침 프로그램 [당신이 주인공입니다]의 주인공이신 월호스님이시다.

 

1월 지장재일(2009년 2월 12일)을 맞아 우리절에서 매달 열고 있는 [53선지식 특별법회]의 법주로 월호스님께서 초청되셨다.

평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월호스님의 가르침을 좇아 불법을 배우면서 친목을 다져온 Daum카페의 수많은 사부대중이

월호스님과 함께 우리절을 찾아오셔서 옥불보전 대법당의 법석을 분반좌하였다.

 

지장재일 기도를 끝내고 교무스님께서 주보 공지를 하신 후 법회를 열고 청법가를 올려 월호스님을 사자좌로 모셨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법상에 자리하신 월호스님께서 이 한마디만 던졌을 뿐인데 법석에서는 환호성에 박수가 겹쳐 터져 순식간에 야단법석이 되었다.

월호스님께서는 이런 반응이 싫지 않으신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시고 하하하 큰 웃음을 보이시고 말씀을 이어 가셨다.

 

법문을 시작도 안했는데 환호성이 나온 것을 보니 여러분이 화엄의 소식에 정통한 분들 같아요. 화엄의 소식이 무엇입니까?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

웃자. 웃을 일이 생길 것이다.

봄에 피는 매화나 벚꽃을 보면 거의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다음에 잎이 피죠.

그게 뭐냐? 법문도 하기 전에 박수하고 환호성부터 해 놓고서 이 정도에 맞추어서 법문을 내려 달라 그 말씀이죠.

 

한국(영남)불교대학의 덕화가 고령의 포장마차까지......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 선방에서 몇 년을 지낸 적이 있어서 대구에 대해 친근감이 있고

해인사 강원의 강주로 있을 때 볼일이 있어서 아는 스님과 함께 고령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한 겨울이라 포장마차에서 파는 우동과 오뎅(어묵) 국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는 걸 보고

‘우동 한 그릇 먹고 가자’해서 그 스님과 포장마차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포장마차의 주인이 스님들이 왔다고 무척 반겨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영남불교대학출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하하

그래서 제가 ‘영남불교대학의 덕화가 고령(에 있는) 포장마차까지 미쳤구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불교대학이지만 그때는 영남불교대학이었죠?

 

여기에서 많은 분들이 공부하는 걸로 알고는 있지만 고령에서 포장마차하시는 뿐까지 오셔서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그 때 들었습니다. 우동 값도 받지 않고 우동을 대접해 주셔서 지금까지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때 우동 값

안 드린 생각도 나고 해서 빚도 갚을 겸 흔쾌히 대구에 오게 되었습니다.”

 

대구와의 인연에 대해 설하여 주신 월호스님께서는 방송에서 늘 하시는 것처럼 ‘마하반야바라밀’을 다 같이 염하자 하시어

사부대중이 함께 마하반야바라밀을 열 번 합송하고 나자 ,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잘 따라 하시네요. 역시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라서 잘 따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곳 뿐 아니라 칠곡도량 , 구미도량, 경산도량 그리고 이곳의 다른 법당에서도 (법문을) 경청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굉장히 반갑습니다. 이곳에 오니 아주 많은 분들이 열성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준비가 되어있고, 그 동안에 많은 공부를 해 오신 것 같습니다.“고 하시며 멀리서 스크린을 통해 법문을 경청하는

우리절 각 도량의 불자님과 대구큰절의 옥불보전대법당을 비롯한 각 법당의 법석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이 같은 인사를

전하신 후 법문의  주제, [행불 10선]에 대한 본론 법문을 내려주셨다.

                            월호스님의 법문 : [행불 10選]에 대하여

 

행불 10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불 10선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현대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10가지 항목으로 풀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 해 보실까요?

성불은 행불로부터!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하자.

이게 성불이죠.

우리 불자들이 ‘성불 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많이 하죠?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삶의 최후의 목표가 성불이 되어야겠죠.

성불은 언젠가 되는 일도 아니고, 재수가 좋아서 되는 일이 아니죠.

행불을 해야 하는 것이죠.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푸는 것이 행불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노력하지 않고는 미래가 보장 될 수 없는 것이죠.

행불이라는 것은 수행불행이라 해서 육조단경에도 나오고 조사어록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부처의 행을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행불 하나 :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따라 해 볼까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저는 이 말을 합니다.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내년 수능 시험에 나올지도 모르니까 잘 기억해 두셨다가 아이들에게도 가르쳐 줘야 해요.

1.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2. 콩을 심건 팥을 심건 무엇이 날 지는 신에게 달려 있다.

3. 콩을 심건 팥을 심건 무엇이 날 지는 이미 결정 되어 있다.

4. 콩을 심건 팥을 심건 무엇이 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지선다형이에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다음 중 불교의 인연설에 합당한 표현은? 답이 몇 번이에요? (1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인연설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불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가령, 여러분의 집에 텃밭이 있다고 합시다.

텃밭에다 콩을 심어 놓고 대관음사에 와서 이렇게 100일 기도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 텃밭에 팥이 나게 해 주세요”

“제발 팥이 나게 해 주세요”

이러면 팥이 납니까? 안 납니다. 그런 것과 똑같아요.

팥을 심어놓고, ‘신이시여, 제발 콩이 나게 해 주소서.’하면 콩이 납니까? 안 납니다.

팥을 수확하고 싶으면 먼저 본인이 팥을 심어야 됩니다.

콩을 수확하고 싶으면 먼저 본인이 콩을 심어야 됩니다.

이게 우선인 겁니다.

콩을 먼저 심고, ‘제가 콩을 심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가꾸겠습니다. 그러니 지켜봐 주시고

튼튼한 콩이 날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라고 한다면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팥을 심어놓고 콩이 나게 해 주세요 하고서 나중에 콩이 안 나면 ‘절에 가 봐도 소용없더라.

아무리 기도 해봐도 안 되더라.’그러거든요.

콩을 심건 팥을 심건 무엇이 날지는 오직 신에게 달려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신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기 때문에 내가 콩을 심든 팥을 심건 상관없이 신께서 녹두가 나게 할 수도 있고

보리를 나게 할 수도 있어요. 무엇이 나게 하는 것은 내 영역이 아니야. 이게 바로 신을 주님으로 섬기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일이에요.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살아서도 종이고 죽어 천상에서도 당신의 종으로 사는 것이죠.

 

종노릇하는 마음을 연습하는 종교가 있고 주인노릇 하는 마음을 연습하는 종교가 있어요,

불교는 무엇을 연습하는 종교에요? (주인)

이것만 봐도 불교와 다른 종교의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무속신앙도 마찬가지죠.

그런 점에서 무속신앙과 기독교가 서로 사촌지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가 무속신앙과 사촌지간인줄 알아요.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신을 섬기고 자신이 신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와 무속신앙의 공통점입니다.

불교와는 천지 차이죠.

‘오늘 (대)관음사에 월호스님이 오신다는데 내가 바빠요. 그러니까 신이시여 저 대신 좀 다녀오소서.’

아니면, ‘저는 오늘 여기 법회에 와야 하니까 부처님께서 제 볼일을 대신 봐 주소서.’ 라고 한다고 해서 이게 됩니까?

안 되는 거에요. 신이라 해도 부처님이라 해도 나 대신 밥 먹어 줄 수 없고, 나대신 잠 자 줄 수 없고,

나대신 돈 벌어 줄 수도 없고, 나대신 운동 해 줄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 겁니다.

 

불교에 있어서 주인은 나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옹호해 주고 도와 줄 뿐입니다.

스스로 주인 됨을 찾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밖에서 주인 됨을 찾는 것은 미신입니다.

정신적 존재든 물질적 존재든 밖에서 주인을 찾는 것은 신본주의입니다.

신이 근본이고 나는 종이 되는 겁니다.

요새는 자본주의라 돈이 근본이고 나는 종이 되기 쉬워요.

신을 주님으로 섬기거나 돈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 , 이게 다 미신입니다.

자기가 주인이고 신이나 돈은 우리를 도와주는 연입니다. 연!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이 불교의 결정적인 진리입니다.

 이게 연기설입니다.

 

 

행불 둘 :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바로 지금 여기서의 나의 행위가 ‘나’다.

이게 불교의 무아설입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의 나의 행위가 ‘나’다.

내가 보살행을 하면 뭐가 됩니까? 보살이 됩니다. 부처행을 하면 부처가 되고, 중생행을 하면 중생이 됩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규정된다는 말입니다.

대구가 옛날부터 미인이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하더니 오늘 와서 보니 미인이 진짜로 많네요.

부처님 당시 케바라고 하는 최고의 미인이 있었어요. 빔비사라왕의 왕비였어요.

 케바왕비는 최고의 미인이었기 때문에 자만심이 대단했어요.

빔비사라왕이 불교 교단에 귀의했기 때문에 케바왕비가 부처님을 찾아뵙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몇 번이나 권장 했어요.

그래도 왕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느냐 하니 소문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미인을 경멸할 뿐더러 우습게 안다고했기

때문에 괜히 갔다가 엉뚱한 얘기를 듣고 마음 상할까 봐그런다고 했어요,

그래서 왕이 꾀를 내어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에게 부처님 계신 동산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어요,

그러자 왕비가 그 노래를 듣고, ‘아, 이렇게 아름다운 동산이 도대체 어디냐?“해서 부처님 계신 곳이라고 했더니

’아, 그러면 내가 한 번 가 봐야겠다.‘마음을 내게 되었어요. 원래 노래가 사람 마음을 잘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부처님을 만나 뵈리라 하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케바 왕비가 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케바 왕비보다 훨씬 얼짱, 몸짱인 아리따운 젊은 여인 둘을 부처님 곁에서

부채질 하게 만들었어요. 케바왕비가 도착해서 자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인이 부처님 좌우에서 시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미인을 경멸한다고 하더니 그것도 아니구나. 저렇게 대단한 미인들이 시봉하고 계시는구나. ’ 생각하는데

부처님께서 그 마음을 이미 읽으시고 그 미인들을 점점 나이가 들게 만드셨어요.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점점 나이가 들게 하여

나중에는 해골바가지로 변하게 해 버렸어요.

그걸 보고 있던 케바 왕비가 ‘내 몸뚱이 내 얼굴에 큰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모두 덧없는 것이었구나.’ 생각하고

부처님과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수다원과를 증득했어요. 그리고 다시 사다함과를 증득하여 결국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비구니중에 최고의 비구니가 되었어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는 겁니다.

몸뚱이나 마음이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니다.

이 자리에 와서 행불 10선을 공부하기 전의 나와 공부하고 난 다음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닙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나입니다.

만약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미 고정되어 있으니까 내가 지금 어떤 짓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되죠.

그런데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중요한 거에요.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어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중요한 겁니다.

 

 

 

월호스님께서는 법문의 핵심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준비해서 법회가 시작 되기전에 법석의 신도님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스님을 따라 유인물에 담긴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무엇이 행불行佛인지 새겨 나갔다.

 

행불 셋 :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내 작품이다.

이게 바로 불교의 공空사상입니다.

“스님. 사업하는 사람들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하고 물어요.

그게 뭔 소리냐고 했더니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은 공사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걸 자꾸 하게 되면 창고가 텅 비어 진다는 겁니다.

이것은 공사상을 반쪽만 이해해서 그런 것입니다.

공은 텅 빈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데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진공묘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유, 집착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을 끊기 위해서 공을 스님들과 부처님께서 공을 강조합니다.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비워야 채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공간도 비워져 있었기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죠?

무엇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면 여러분이 들어 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법회를 할 수도 없었겠지요.

공이라 해서 텅 빈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되고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내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바로 내 작품이 되는 겁니다.

 

행불 넷 :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하자.

이게 바로 행불의 첩경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만 있을 뿐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를 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과거에 머무르고 미래에 머무르고 지나간 현재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서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서 삽니다.

신이나 부처님의 종이 되어서 살지는 않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까, 여러분이 돈을 위해 존재합니까?

너무 쉬운 문제죠. 돈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내가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돈을 위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까지 죽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객이 전도 되어 그러는 겁니다.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서 돈을 주님으로 섬기고 자신이 돈의 종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니르바나를 적멸이라고 하는데 저에게 표현해 보라고 그러면 완전연소라고 할 겁니다.

타고나서 찌꺼기가 남지 않는 것이 니르바나에요.

살면서 좋고 나쁜 이런 저런 일들을 겪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모두 몸에 배게 됩니다.

죽고 몇 십 년이 지나 해골만 남게 되어도 그 해골에도 업장이 배어 있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 해골을 똑똑 두드려보고 거기에서 나는 소리만 듣고도 이 해골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떻게 죽었고 지금은 어디에 태어나 살고 있는지를 다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해골하나를 주면서 이 해골이 누구의 해골인지 알아맞춰 보라고 해서

해골을 두드려봤는데 도무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의 해골인지 여쭈어 봤더니 이 해골은 해탈한 아라한의 해골이라고 하신 겁니다.

해탈한 아라한은 완전 연소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완전 연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밥 먹을 땐 밥 먹을 뿐이고

잠 잘 때는 잠만 잘 뿐이고

강의 들을 땐 강의 들을 뿐

일할 땐 일할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

이것이 바로 완전연소하는 거에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자기가 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겁니다.

이게 바로 프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난존자라는 분은 부처님께서 법문하실 때는 오직 법문 듣는 데만 몰입을 했다고 그래요.

심지어는 등창이 나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법문을 듣고 있는 동안에 하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중에 수술을 하니 칼로 등을 찢고 고름을 빼내는 데도 아픔은커녕 수술하는지조차 모르고 법문을 듣더라는 겁니다.

 

 

촛점이 어느 한 곳으로 가면 나머지는 흐려지게 됩니다.

오른손을 내밀어 보세요, 그리고 엄지손톱을 쳐다보세요.

초점을 엄지손톱에 맞춰서 쳐다보면 손톱 뒤의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입니까, 부옇게 보입니까? 부옇게 보이죠.

이번에 손톱 뒤의 벽이라든가 기둥에 초점을 맞춰서 보세요. 그러면 손톱이 부옇게 보이죠.

 

마음의 초점도 그렇습니다.

어느 한 군데 초점을 맞추면 나머지는 부옇게 흐려지게 되는 겁니다.

마음공부에는 삼 단계가 있습니다. 따라 해 보세요.

첫째, 일심공부

둘째, 무심공부

셋째, 발심공부

불교공부 처음 시작할 때 한 마음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게 좋아요.

처음에는 한 마음으로 모아 나가고 그 다음엔 한 마음조차 뛰어넘어 무심해 지고,

그 다음에는 한발 더 나아가 발심을 해서 중생제도에 나서야 합니다.

 

 

행불 다섯 : 인因도 충실하고 연緣도 충실해야 과果가 충실하다.

이 대목에서는 우리가 손뼉을 한 번 치고 넘어가야 합니다.

(스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법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옴)

그런데 그런 박수가 아닙니다. 하하하

여러분 , 왼손을 들어보세요. 이것이 인因입니다. 인은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원인입니다.

이제 오른손을 들어 보세요. 이것은 간접적, 객관적 원인이 되는 緣연입니다.

인도 충실하고 연도 충실하면 결과가 충실합니다.

인이 충실해도 연이 부실하면 결과가 부실합니다.

연이 중실해도 인이 부실하면 결과가 부실합니다.

이게 불교의 인연설입니다.

보통 인과 연을 한 데 뭉뚱그려 같이 이야기합니다만 인과 연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나, 내 마음, 내 노력, 내 마음가짐입니다.

연은 부처님 가피, 가족, 친구 같은 간접 원인입니다. 내 노력과 불보살님의 가피가 함께 충실 할 때

결과가 충실해지는 겁니다. 죽어라 노력을 하는데도 하는 일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연이 부실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 아무것도 안하면서 부처님께 와서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하며 구걸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도 하는 일이 잘 안돼요. 왜냐? 인이 부실하기 때문이에요.

 

 

기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구걸형 기도와 발원형 기도에요.

~~해 주세요로 끝나는 것은 구걸형 기도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가족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세요.

세계가 평화롭게 해 주세요.

이게 모두 구걸형 기도입니다.

발원형 기도는 뭐로 끝납니까? ‘하겠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해주세요.’ 하지 말고 자기마음부터 평화롭게 하고

주변 사람부터 마음 편하게 해 줘야 평화롭게 되는 것이죠.

평소에는 자기마음을 드글드글(덜덜) 볶고, 그것도 모자라 옆 사람까지 볶으면서

절에 와서는 세계가 평화롭게 해 주세요하면 안 되는 거죠.

“하겠습니다. 그러니 지켜 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인연법에 합당한 것입니다.

인因은 내가 지을 테니 緣연을 좀 보태 주세요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있는 지리산 쌍계사의 산내 암자인 국사암에 오시는 신도님들이 불전을 넣을 때 항상

 “부처님 용돈 쓰십시오.“라고 말씀드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면 그 마음이 비굴 하겠어요 떳떳하겠어요? 떳떳하죠,

그런데 천원이든 만원이든 불전함에 한 장 넣고 ‘가족이 다 건강하게 해 주시고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 주시고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시고...주시고.... 주시고.....” 자꾸만 뭐 해 달라고 하고 돌아서면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주는 마음 연습하면 부자주인이 되고 구걸하는 마음 연습하면 거지종이 된다.

여러분은 뭐가 되고 싶으세요? 부자주인 되고 싶죠?

 

불교는 구걸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 주인됨을 찾아서 주인노릇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 또는 아주 힘들 때는 잠시 구걸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평생 구걸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용돈 쓰세요.’하는 것은 주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발원할 깨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법륜을 굴리겠습니다. 행불 하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누구나 다 찾아 와서 ‘부처님 이거 좀 해 주세요, 저거 좀 해 주세요.’하는데

‘부처님, 감사합니다. 법륜을 굴리겠습니다.’하면부처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런 사람이 훨씬 더 예쁘게 보이겠죠?

바로 거기서부터 가피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행불 여섯 :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절에서는 삼천배도 잘하고 오백배도 잘 하면서 집에서는 삼배도 안 해요.

여러분이 절에 와서 수행하는 것은 생활, 실전에서 잘 하기 위해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체험학습의 교재입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체험학습 교재를 이용해서 소중한 공부를 해 볼 그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박탈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건 나쁜 이링 생기건 이 몸뚱이가 있어야 실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밥먹는 것도 실감하고, 노는 것도 실감하고, 잘 사는 것도 실감나고, 공부하는 것도 실감나고,...

몸뚱이가 있어야 하는 일을 실감 할 수 있습니다. 몸뚱이가 체험학습의 교재입니다.

그래서 내 몸뚱이라고 해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교재를 잘 사용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은 자그마치 3억대 1의 경쟁을 뚫고 받은 것입니다.

한 개의 난자를 향해 3억 개의 정자가 달려가는데 그 중 하나가 도킹을 해서 여러분이 탄생된 것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나는 3억대 1의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왔다.”

이것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지 않나요? 하하하

3억대 1의 경쟁, 2억 9천9백9십9명을 제치고 이 세상에 온 거에요.

그래서 체험학습의 교재인 이 소중한 몸뚱이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행불 일곱 ; 웃자! 웃을 일이 생길 것이다.

이건 법문 시작에 말씀 드린 화엄의 이치입니다.

조금 있으면 쌍계사 섬진강변에 매화가 피어 날 겁니다.

매향, 기가 막히죠.

매화는 꽃부터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잎사귀가 나옵니다.

벚꽃도, 배꽃도 마찬가지에요. 봄에 피는 꽃들 대부분이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게 바로 화엄의 이치입니다.

꽃 중의 꽃은?? (웃음꽃)

사시사철 지지 않는 꽃이 웃음꽃입니다.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감사하다보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짜증내다보면 짜증낼 일이 생깁니다.

내 마음의 주파수가 거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구불교장송의 주파수가 몇 번이에요? (94.5)

94.5에 맞춰 놓으면 불교방송이 딱 나오게 되는 것이지 주파수를 다른 데 맞춰 놓고

불교방송 나와라, 나와라 해도 절대 안 나옵니다.

 

내 마음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우주의 기운들이 모이게 되는 겁니다.

 감사할 일이 생기게 하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자꾸 감사하다보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심지어 몸이 아파도 감사해야 합니다.

병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위궤양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감사해야 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위암은 안 걸렸습니다.’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낫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씨), 남들은 괜찮은데 왜 내가 위궤양에 걸려 가지고... 왜 나만 이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마음을 가져 봐요. 병도 더 안 낫게 돼요.

오른쪽 다리 아프면, ‘왼쪽 다리는 멀쩡하니 감사합니다.’하면 더 빨리 나아요.

빨리 낫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내고 그러면 더 낫지 않아요.

주파수가 원망하고 짜쯩내는 데 맞춰지면 매사에 짜증내는 일, 원망하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요새 어렵다고 다들 ‘어렵다, 어렵다.’ 그러면 더 어렵게 돼요.

그럴수록 ‘이 정도라도 사니 이나마 다행입니다 부처님 덕입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하고 생각해야 돼요.

‘저기 아프리카 기아로 허덕이는 난민촌에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 그나마 대한민국에 태어나 하루 끼니는 먹고 사니까

정말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점점 발전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행불 여덟 : 나도 방생放生하고 남도 방생放生하자.

방생은 생명해방의 약자입니다.

물고기나 새를 놓아주는 것도 방생이지만 사람의 위축된 마음, 자신 없는 마음을 풀어 주는 것도 방생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묶여 자승자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방생입니다.

저는 방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불교방송을 통해서 ‘당신이 초고입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하면서 .....

(이때, 와~하는 함성과 박수가 울호스님의 웃음과 한데 어우러져 법석이 웃음꽃으로 화엄을 이룸)

 

그렇게 사니 기분이 좋아지고 저 자신도 방생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이 저를 보고 스님은 작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다고 그래요.

아, 그게 [당신이 주인공입니다]를 통해서 긍정적이고 밝은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제 자신이 긍정적이고 밝아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되도록 남에게 생기를 주는 말, 희망을 전하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방생하여 스스로 자신의 장점을 봐 줄줄 알아야 희망이 쏟아 남에게도 희망을 줄수 있습니다.

내가 우울하면 남을 즐겁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충전해 나가야 합니다.

 

불교신문에 매주 -선어록의 향기-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것을 모아 [세어본 소만 존재한다]는 제목의 책을

하나 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원고를 쓰고  출력하여 읽고 나서 ‘잘~~썼다. 이거 내가 쓴 거 맞아?“하면서 스스로에게

칭찬을 합니다.

그러니 글이 점점 나아져요. 그런데 ’아, 이걸 글이라고 썼나.”하면 자기 자신이 위축되어서 글이 더 안 쓰이게 돼요.

자꾸 장점을 봐 주고 칭찬해 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못쓰고 갑니다.

그것을 다 쓰게끔 칭찬을 많이 해줘야 합니다. 남편도 칭찬해주고 부인도 칭찬해 주고, 아이도 칭찬해 주고...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으면 그것도 칭찬거리가 됩니다.

칭찬할 거리를 찾으면 칭찬거리는 끝도 없이 자꾸 생기게 됩니다.

자꾸자꾸 칭찬해 줘야 합니다.

 

 

행불 아홉 : 부처님 덕 보려 말고 부처님께서 내 덕 보게 하자.

이거 읽으면서 반성하는 분들 많을 겁니다.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하는 것들이 모두 부처님 덕을 보려는 것입니다.

부처님 덕에 이정도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만약 부처님을,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옥이나 축생계에 가 있지 않을까?’

그마나 부처님 법을 만나서 부처님의 제자로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이 정도로 사는 것을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부처님께서 베풀어 주신 덕을 갚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원래 은덕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러분이 누굴 좀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그걸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면서 나중에라도 상황이 호전되면

갚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많이 도와주고 싶겠죠?

그런데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꾸 도와 달라고 하면 얄미워집니다.

 

부처님 덕 갚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덕 갚는 것이 뭡니까? 법륜을 굴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덕을 갚는 일입니다.

 

행불 열 :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자.

한국불교대학에서,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배운 가르침이 소중한 것이니까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가지고 있어야지 하면서

숨겨놓지 말고 주변으로 자꾸 전파를 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법륜을 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첫 번째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만큼 남에게 전하고 내가 가진 만큼 베풀어야 합니다.

 

고령에 사는 포장마차 보살님도 법륜을 굴리고 계시는데 많은 분들이 한국불교대학에 등록해서 불교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불교!

다른 종교인들은 맨 날 책 한권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지하철에서도 보고 그러거든요.

사실 그 속에는 그렇게 볼 것도 없는데 평생 끼고 다니면서 보잖아요.

그런데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해야 할 우리 불자님들은 공부를 안 합니다.

공부는 누가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여기가 관음사인데 제가 관세음보살님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를 개사한 것입니다. 같이 불러 볼까요?

앉으나 서나 관세음보살

오나 가나 관세음보살

자나 깨나 관세음보살

죽으나 사나 관세음보살

(“아, 잘 하시네요.” 칭찬을 듬뿍 해주시는 월호스님^^)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는 동정일여입니다

자나 깨나는 몽매일여입니다.

죽으나 사나는 생사일여입니다.

이게 연습이 잘 되면 죽을 때도 관세음보살 하면서 웃으며 죽을 수 있어요.

이것이 웰빙(Well-Being)이고 웰다잉(Well-Dying)입니다.

 

한 곡으로 끝내면 좀 서운하겠죠?

그래서 한 곡 더 하겠습니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행불로 바꾸어서 부르면 됩니다.

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행불

꿈에도 소원은 행불

이 정성 다해서 행불

행불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행불

이 나라 살리는 행불

행불이여 어서 오라

행불이여 오라

 

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행불하세요()

 

 

이것으로 행불 10선에 대한 주제 법문을 마치신 월호스님께서는 점심공양 마저 거르시고

기축년 소의 해를 맞아 십우도(심우도)에 대한 풀이를 해 놓은 [세어 본 소만 존재한다] 출판 사인회를 열고

평소 방송을 통해 법음만을 접하고 살아온 불자님들이 스님을 가까이 친견할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 주셨다.

 

 

월호스님 초청 53선지식 대법회는 수많은 불자님들의 가슴속에 법륜을 굴리겠다는

발심을 내도록 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출처 : 불교인드라망
글쓴이 : 부루나/원더우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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