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 (2016)The Bacchus Lady
줄거리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65세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입 소문을 얻으며 박카스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트랜스젠더인 집주인 티나, 장애를 가진 가난한 성인 피규어 작가 도훈, 성병 치료 차 들른 병원에서 만나 무작정 데려온 코피노 소년 민호 등 이웃들과 함께 힘들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한 때 자신의 단골 고객이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송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를 진짜 '죽여주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사는 게 힘 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의 부탁이 이어지고, 소영은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노인 성매매를 암시하는 예고편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의 성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품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 포괄적인 문제를 향해 다가선다. 바로 대한민국 사회가 알면서도 외면한 빈곤층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시선을 빌려 보 다 냉철한 시각이 반영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죽여주는 여자]의 배경이 되는 서울은 분명 익숙한 곳이지만,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생소함을 부각해 주는 대목은 주인공 소영이 관여하게 되는 암암리에 진행되는 노인 성매매 현장이다.
노인들이 모여있는 공원에서 이뤄지는 매매 장면과 행위가 이뤄지는 모텔촌의 모습이 장소에 따라 디테일하게 그려지는 장면, 성구매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형태의 행위를 소영이 직접 하게 되는 대목은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 보통 영화에 등장하는 베드신과 달리 영화 속 노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방식이 일반 성행위와 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사랑 또는 욕망을 통해 이뤄지는 남녀 간의 행위라기보다는 자신의 남아있는 젊음과 욕구를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처절한 탐욕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이후 소영이 관여하게 되는 노인들의 안락사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더는 자신들의 욕구마저 마음껏 풀 수 없게 된 노인들은 결국 죽음을 택하게 되고, '쾌락'을 선사했던 그녀에게 죽음을 부탁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블랙 유머지만, 이재용 감독은 이를 흥미적 관점에서 다루기보다는 씁쓸하고 어두운 현실 반영적 측면으로 담담하게 완성한다. 이를 통해 그려진 [죽여주는 여자]의 노인의 성(性 )은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의 방황으로 해석된다.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반영은 영화와 함께 묘사되는 대한민국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비춘 사회적 소외계층을 향한 시각으로도 연결된다. 제한된 일을 해야만 하는 장애인 청년, 보수적 사회와 종교 논리에 의해 죄인 취급당하는 트랜스젠더 그리고 이기적인 한국 남성에 의해 버림받은 코피노 소년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극 중 캐릭터로 등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하나둘씩 부각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산만할 수도 있는 골칫거리로 묘사하기보다는 가족과 같은 따뜻한 정서를 만드는 요인으로 사용한다. 어둡고 씁쓸한 현실이지만, 모성애의 마음으로 품으려 하는 소영을 통해 긍정과 부정의 현실 모두를 반영하려 한다.
여기에는 또 한 번의 씁쓸한 한국 현 대사가 외면한 아픔의 역사가 담겨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성장 중심의 한국 사회가 외면했던 인권적인 문제로 "저 사람에게도 말 못한 사연이 있다."라는 극 중 대사가 말해주듯이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상처로 연계되기까지를 의미심장하게 그려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씁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특유의 담담한 대사 톤과 연기로 정서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윤여정과 배우들의 연기가 씁쓸한 현실 속에 인간적인 정서를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을 불러온다. 담담한 시각 속에서 따뜻한 드라마와 사회적 풍자를 적절하게 담아낸 이재용 감독의 연출력도 돋보인다.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죽여주는 여자] 리뷰 : 노인 성매매, 코피노, 트랜스젠더…우리가 외면한 현실들 ★★★☆
윤여정에 의해 꽃피운 설익은 꽃봉오리,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09.28
제목: <죽여주는 여자>
감독: 이재용
출연: 윤여정, 윤계상, 전무송
이력: 제 6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제 20회 판타지아 영화제/ 여우주연상, 각본상 수상
윤여정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인생작 - 미국 버라이어티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화제작으로 떠오른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개봉에 앞서 CGV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된 <윤여정 특별전> 시네마톡을 통하여 미리 관람하였다. 영화를 보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날것 그대로의 감상과 시네마톡에서 들은 이재용감독과 윤여정 배우의 대담을 중심으로 글을 이어가겠다.
주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 관람하신 분들에 한해서 읽어보시길 권장합니다.
1) 트랜스 아이덴티티: 생명을 불어 넣는 성(姓)녀에서 죽음의 전령사로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잘 해 드릴게"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늙은이들을 상대로 성(姓)을 파는, 일명 박하스 할머니를 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의 타이트롤이자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제목처럼 죽여주게 서비스(성행위)를 잘하는 여자로, 외로움에 종로로 모인 노인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한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하여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소영이 노인들에게 박하스(성)를 파는 일은 노인들에게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행위이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살아가는 독거 노인들, 더구나 섹스는 커녕 성욕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죽여주는 서비스로 성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는 생명을 불어넣는일 다름아니다.
영화의 핵심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노인들에게 생명을 안겨주던 소영이 과거 손님의 부탁으로 인해 실제로 죽여주는 즉, 살인을 실행하게 되면서 소영의 내적 갈등은 시작된다. 저마다의 이유로 사는 것이 힘들어 죽여달라는 손님들은 늘어나고, 소영의 낯빛에도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죽여주는 서비스로 생명을 불어넣던 여자가 생명을 죽이게 되는 일대의 정체성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트랜스 아이덴티티로 명명한다. 그것도 생명의 상징에서 죽음의 상징으로 정체성 전환의 폭이 상당히 넓다. 그만큼 소영의 내면은 복잡해지고, 영화의 서사에는 긴장감이 살아난다.
성(姓)녀에서 죽음의 전령사라는 간극이 큰 트랜스 아이덴티티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영화는 효과적인 이미지 대비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먼저 소영이 등장하는 배경의 색감이 밝음에서 어둠으로 치환된다. 소영의 일터가 되는 공원의 나무들의 색을 보면, 영화 초반부 소영이 노인들에게 생명을 안겨줄 때에는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어있지만, 첫 죽음을 안겨준 이후부터는 갈색 빛으로 변해있다. 이는 계절의 차이, 즉 시간의 경과로도 읽힐 수 있다. 소영이 한참 일할 때에는 봄이고, 살인을 저지르게 될 때에는 가을께가 되었기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영이 성을 팔 때는 생명이 잉태되는 계절인 봄이고, 소영이 살인을 할 때에는 죽음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가을이다. 계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역시 소영의 트랜스 아이덴티티를 간접적으로 나타낸준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소영의 화장(화려한 화장에서 점점 옅어지는), 소영의 옷차림(푸른계열에서 갈색으로), 산에 피어있는 흰색 들꽃(프롤로그에선 활짝 피어있지만 첫 살인 이후에는 시들어있는) 등 여러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 대비를 통해 소영의 정체성이 극명하게 변하였음을 알려준다.
2) 사회 소외계층의 삶: 비루하지만 희망이 있는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이다. 박하스 할머니, 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독거노인까지. 여자고, 약자고, 소수자 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사연이 진득하수록 비루하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 우선 주인공 소영부터가 생계를 위하여 박하스를 팔고, 그 드럽게 번 돈은 고스란히 일수로 갖다바치고 있다. 열심히 일하여도 달라질 것 없는 우리내 가여운 삶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다. 영화는 죽고싶은 상황에 처한 세 명의 노인을 보여주는데, 각각 죽음의 원인과 유형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말을 빌리면, 독립생활 붕괴로 인한 자존감 파괴(중풍환자), 자아 상실의 공포(치매환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오는 절대고독(처와 자식을 잃은 아버지) 등 세 가지 유형의 죽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이들은 간절하게 죽음을 원하지만, 자기 스스로조차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사회제도권 밖에 밀려나 있고, 가족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독거노인들은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연명한다.
이러한 불쌍한 인생들을 위하여 소영이 나선다. 사회제도권도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사회 소외계층인 박하스할머니가 해결하는 것이다. 이제 소영은 자신이 생명을 불어 넣었던 자식같은 노인들의 죽음을 제 손으로 직접 거둬들인다. 자식같은 노인이라, 어쩐지 어폐가 느껴질 수 있으나,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소영을 꼭 독거노인들의 마더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스스로 섹스도 못하여 소영의 서비스에 기대 성욕을 풀던 노인들이 이제는 죽음마저도 소영에게 기댄다. 노인들은 투정부리는 아이와 같으며, 넓은 이해심으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소영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던 테레사와 같은 엄마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 행위는 끔찍하다기 보다는 따뜻하고, 어딘가 성(聖)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오버 조금 보테면 성(性)녀가 진정한 성(聖)녀로 변화하는 것이다.
소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은 비록 삶의 모습은 비루할지라도, 척박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싹틔우는 존재들이다. 사회 주류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고 터부시하는데 반하여, 소외계층은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한다. 한국인 의사 아버지가 외면한 코피노를 데려다가 밥먹이고 보살핀 것도 소영이고, 자식도 외면한 중풍환자 노인을 거두어준 것도 소영이다. 의사, 미국에사는 자식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주류층이 터부시한 존재들을 소영이 품는 것이다. 또 그녀와 함께 사는 트랜스젠더, 장애인이 돕는다. 법과 돈으로 문제를 처리하려는 사회주류층보다 인간애와 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소외계층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3) 아쉬운 연출력, 그것을 보완하는 배우 윤여정의 절대적 연기력
"아무도 진짜 속 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참신한 소재, 흥미로운 캐릭터, 사회적 메시지, 인상적인 이미지 등 상당한 영화적인 재미와 강점을 지닌 영화임은 분명하다. 트랜스 아이덴티티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그를 인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며,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얹는, 영리한 연출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연출력이라 꼬집는 것은 아주 초보적인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바로 개연성의 부족이다.
필자는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드라마, 소설 등 매체를 막론하고 모든 작품에 가장 기본시 되어야하는 것은 개연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영상이 돋보이고, 기승전결의 완벽한 서사구조를 가졌다 하더라도, 개연성이 떨어지면 고개가 갸웃하게 된다. 도대체 왜 소영이 독거노인을 죽이는가? 영화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물음에 영화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소영이 첫번째 살인을 하게 되는 시점은 영화에 있어서 핵심 포인트다. 생명을 넣는 여자에서 생명을 죽이는 여자로 정체성 변화의 변곡점이 되는 지점인데, 소영의 내면 갈등이나 심경의 변화 과정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급작스럽게 변하는 그녀의 정체성에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죽음을 부탁하는 노인이 과거 소영에게 잘해줬던 성매매 손님이고, 노인이 처한 상황이 중풍환자로 고통스럽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고는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정과 연민의 요소이지 살인의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이웃이 불쌍하다고 해서, 정말로 죽여주는 이는 극히 드물것이다. 이는 분명한 개연성의 결여다. 아니나 다를까 시네마톡 현장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소영의 심경 변화에 있어서 개연성 부족을 지적하는 질문이 많았다. 이같은 지적에 감독은 자신의 약점이라고 쿨하게 인정하며 영화적인 것으로 이해해달라며 양해를 구한다.
요인즉, 이 영화는 박하스 할머니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여자가 죽음을 불러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캐릭터의 정체성 변화에 따라 소영은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로 변화해야했고, 그렇기에 소영에게 세 가지 죽음을 끼워 맞춰야 했던 것이다. 캐릭터 설정이 먼저였고, 그에 맞춰 스토리가 짜여졌기에 서사의 흐름에 개연성이 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소영의 결심이 현실에선 이해되기 어렵겠지만, 영화 속이니까 가능할 수 있는, 그런 영화적인 것으로 이해해달라는 감독의 변.. 어딘가 조금 비겁한 변명 같기는 하다.
그러나 개연성 결여라는 연출력의 부재를 매워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배우 윤여정이다. 그녀는 독보적인 캐릭터성과 섬세한 연기력으로 개연성 부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 준다. 사실 소영이라는 캐릭터는 극단적인 상황을 오고 가는 인물로 양 극단의 특징들을 잘 표현해야하는데, 윤여정은 탁월한 표현력으로 매끄럽게 소화하고 있다.
윤여정은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나 접해봤던 박하스 아줌마를 생생한 인물로 스크린으로 끌어들여온다. 먼저 앞머리를 내린 뽀글한 파마머리에 약간 촌스러운 청자켓, 화려한 색조 화장으로 소영의 외형을 적절하게 만들어냈다. 또한 종로 노인들을 유혹하는 소영의 모습을 새초롬한 표정과 눈빛, 그녀 특유의 쇳소리나는 음성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삶의 밑바닥에서 먹고 살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소영의 천박한 삶을 그리 비굴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게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윤여정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연기이다.
감독은 실존하는 박하스 할머니를 모델로 삼거나 자료조사 등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박하스 할머니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한다. 소영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이 일정부분 배우 윤여정에게 기대어져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소영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는 배우 윤여정과 화학적 반응을 통하여 완성된 것이다. 윤여정은 보란 듯이 영화 전체를 이끌며 다변화하는 소영의 내면을 표현해 낸다.
개연성이 떨어졌던 첫 살인의 장면도 윤여정의 연기로 인하여 공감이 가는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중풍환자에게 농약을 먹여 죽이는 장면, 처음으로 살인을 하게 되는 소영의 갈등하는 내면과정을 윤여정은 얼굴표정에 그대로 담는다. 첫살인을 하게되는 소영의 두려움, 죄책감, 허탈함, 그리고 찰나에 스치는 광기까지 풍부한 감정을 한 숏안에 펼쳐낸다. 그 어떤 개연성보다도 소영의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시네마톡에서 윤여정은 이 장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소영은 누구보다 사연 많고, 미래도 불투명한 비루한 삶을 사는 여자이기에, 일찍 전 부터 죽음을 결심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여자가 죽여달라고 소원하는 독거노인들 먼저 보내주자고 결심한 것은 의외로 쉬울 수 있을거라 해석했고, 연기했다고한다. 어차피 죽을 인생, 그대들 사연 모르는 것도 아니니 먼저 보내주고 나도 따라가리라..이런 서브텍스트 인것이데,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이었다.)
첫살인 이후 이어지는 손님과 섹스하는 장면, 신음하는 남자 밑에 깔려서 하늘을 바라보는 윤여정의 얼굴은 또 어떠한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긋이 하늘을 노려보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은, 살인자의 죄책감과 더불어 죽음의 전령사가 된 소영의 섬짓함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윤여정은 소영이 박하스를 팔고, 살인을 하고,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들쭉날쭉한 감정의 변곡점들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마지막 죄수복을 입고 초연하게 생애를 받아드리는 소영의 얼굴도 뇌리에 남는다.
4) 윤여정이 꽃피운 설익은 꽃봉오리,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소문듣고 왔으니까 잘 부탁해"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의, 윤여정에 의한, 윤여정을 위한 영화이다. 미국 버라이어티의 평가처럼 윤여정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작품이다. 사실 영화의 완성도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연기만큼은 실로 완벽하다. 영화의 결점을 보완해줄 만큼 차고 넘친다. 개연성 부족의 문제는 그녀의 연기 앞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개연성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하고, 시나리오가 조금 더 퇴고되었다면 정말 완벽한 영화가 탄생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개연성 말고도 개인적으로는 몇 가지 더 거론할 것이 있지만 삼가하겠다) 인고의 시간을 더 기다려 꽃을 피워야할 작품이 윤여정에 의하여 꽃을 피우게 된 셈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죽녀주는 여자>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연기인생 50년 여배우의 연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재미는 충분하다.(한국영화에서는 김혜자가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마더>이후로 처음이지 싶다) 배우의 연기뿐만아니라 <죽여주는 여자>가 담고 있는 사회 참여적인 메시지, 따뜻한 분위기, 서정적인 이미지 등, 심도있는 주제 안에 영화적 요소를 잘 녹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신한 소재와 매력적인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스토리라인 역시, 상업영화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영화적 재미도 충만하다.
무엇보다 무릇 좋은 영화는 영화를 보고나서 이야기 할 '거리'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죽여주는 여자> 참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삶과 죽음, 한국사회의 단면, 인간간의 관계 등 여러 주제에 걸쳐서 다양하게 대담할 수 있는 영화이다. 단순히 즐기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10월,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죽어가는 이들의 고독한 진짜 이야기를 들으러 영화관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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