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불교&자료&관심사●/법륜스님·법문 外

불교를 공부하면 경쟁사회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까요?

보현화 2020. 12. 31. 00:32

www.jungto.org/pomnyun/view/82982

 

 

불교를 공부하면 경쟁사회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까요?

“중도, 사성제, 팔정도 등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을 챙기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삶의 지표이자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복잡한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고, 특히나 경쟁을 해야 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담마를 지키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면서 담마를 실천하면서 마음을 챙길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쟁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경쟁에서 이기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것과 관계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질문한 내용 속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공부해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좀 써먹는 방법이 없겠나?’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질문자가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유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에요. 싫을 때 싫음을 탁 놓아버리고 해 버리고, 하고 싶을 때도 그게 해롭다면 탁 놓아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쓰는 자유와 용어가 똑같지만, 불교에서는 나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진짜 자유라고 봅니다.

수행과 경쟁의 상관관계

경쟁에서 이기는 것, 경쟁을 포기하는 것, 경쟁을 부정하는 것, 이런 것들과 담마는 관점 자체가 다른 별도의 문제입니다. 담마를 공부하고 보니 ‘경쟁은 무익하다’ 하고 깨달아서 세상 일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집을 떠날 수 없으니까 일정한 기간까지는 담마와 세상살이를 병행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을 버리지도 않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쓰지도 않고, 그냥 중간만 가는 길을 선택해서 좀 편하게 사는 방법도 있어요.

질문자의 경우 과거에는 막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경쟁을 했는데, 수행을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는 길을 찾아냈단 말이에요. 스트레스를 안 받는 상태로 가게를 운영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니까 오히려 업무 효율이 더 나서 결과적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하는 게 경쟁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죠.

이때 ‘수행이 경쟁에서 이기도록 했다’, ‘수행이 경쟁에서 지도록 했다’ 이렇게 평가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은 이 부분 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수행은 돈을 더 벌고 덜 벌고, 건강하고 안 하고, 승진하고 안 하고, 결혼하고 안 하고,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수행자가 되어서 자기 고집을 안 하니까 결혼하기가 쉬워졌다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수행을 하니까 자기 고집이 없으니까 상사가 보기에 인화를 잘해서 승진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 자체는 이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경쟁에서 이기려고 수행을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이미 수행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욕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괴로움은 욕구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애려면 욕구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구로부터 자유롭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욕구가 나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금욕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르칩니다. 욕구를 따라갔을 때 손실이 생긴다면 딱 멈출 줄 알아야 되고, 욕구를 따라갔을 때 나도 이익이고 남도 이익이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욕구를 따라가도 되는 겁니다. 배가 고플 때 밥 한 그릇 먹는 것은 나한테, 남한테, 세상한테 아무런 손실이 없잖아요. 그럴 때는 먹어도 돼요. 욕구를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얘기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중소기업 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법륜스님 법문 듣고 수행하면서 사업하는 게 정말로 쉬워졌어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종업원들이 내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나도 종업원들이 필요로 하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항상 연구합니다.’

여기서 준다는 말이 물질적인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항상 마음으로도 종업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종업원들을 적대적으로 보지 않고 항상 친구로 보는 관점을 가지니까 종업원들도 항상 나를 좋아하고,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성과가 나면 더 많이 종업원들에게 베풀게 된다는 거예요. 요즘은 돈 버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서 같이 웃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업에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어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나니 종업원들을 미워하지도 못하겠고, 옛날에는 면박도 주고 확 잘라버렸는데 그렇게도 못 하니까 오히려 회사 운영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쟁은 별개라는 겁니다.

수행의 목표

수행의 목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회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이런 개념하고 수행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수행은 이혼을 해도 괴롭지 않고, 이혼을 안 해도 괴롭지 않고, 혼자 살아도 괴롭지 않고, 결혼해도 괴롭지 않고, 애가 있어도 괴롭지 않고, 애가 시험에 떨어져도 괴롭지 않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나의 중심을 딱 잡고 인생을 사는 것이 수행입니다.

‘앞으로 제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 자체가 벌써 수행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운명을 점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계율에도 나와 있습니다. 손금을 보거나 관상을 보거나 사주를 보는 걸 일절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좋은 일이 생길까? 나쁜 일이 생길까?’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수행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행자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인데, 그런 수행자가 왜 점을 보나요?

그리고 부처님은 신통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되거나 어리석어지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이런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종교로써의 불교, 철학으로써의 불교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그리고 ‘법륜스님 훌륭하다’, ‘부처님 훌륭하다’ 이런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법륜스님은 괜찮게 사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 이렇게 모델이 되거나 참고는 되지만 결국은 자기가 그렇게 해야 돼요. 남이 훌륭하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뭐해요? 아무개가 야구선수로 유명하다, 아무개가 축구선수로 유명하다, 아무개가 골프선수로 유명하다, 이렇게 백 명 또는 천 명을 안다고 해서 내가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보다는 운동장 한 바퀴라도 직접 뛰는 게 나의 건강에 좋죠.

중도와 사성제를 일상생활 속에 적용하는 방법

우선 질문자와 저와의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믿음이 형성된 다음에는 법에 대한 원리를 이해해야 돼요. 원리를 이해한 다음에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늘 실천해야 됩니다. 물론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중도를 실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일을 잘하게 하려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니까 화합이 깨지고, 화합에 자꾸 초점을 두다 보니까 일이 제대로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도란 이런 것들의 모순 관계가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니까 손실이 따르고, 그렇다고 화를 참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것은 모두 양 극단입니다. 그래서 중도란 늘 현실 속에서 연습을 해봐야 합니다. 중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본인이 직접 연습해서 증득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이쪽으로 치우쳤구나’
‘이번에는 저쪽으로 치우쳤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연습을 하다 보면 지그재그로 나아가는 길의 폭이 점점 좁아집니다. 그래서 나중에 멀리까지 가서 다시 되돌아보면 일직선으로 딱 보이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똑바른 길은 없어요. 수행이란 이런 중도의 길을 계속 연습하는 겁니다.

사성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성제란 어떤 문제의 원인, 그 원인의 원인을 계속 규명해 나가서 괴로움을 소멸시켜나가는 겁니다. 그 연습이 바로 수행입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든, 가정에 무슨 일이 있든, 그냥 괴로워만 하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이렇게 규명해보는 사유체계를 가진 사람이 수행자라는 겁니다. ‘노력해도 소용없네!’ 하면서 포기해 버리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일상 속에서 늘 적용해야 합니다. 조금씩 적용되기 시작하면 법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지고, 이해도 더 깊어집니다.

여러분이 희망을 가져도 되는 이유

세상에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하버드 나왔다’, ‘서울대 나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어요. 고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불교에서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학을 가거나 특별한 교육을 받아서 성공을 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어릴 때 승려가 됐고, 다른 무슨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게 없기 때문에 부처님 법에서 지혜를 얻었거나 제가 스스로 탐구해서 지혜를 얻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의 법문이 가진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제가 탐구해서 얻었기 때문에 경험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둘째, 밖에서 특별한 공부를 한 게 아니라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었기 때문에 다른 유명한 사람들보다 여러분들에게 자신감을 더 많이 줄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은 대학도 못 나왔는데, 대학까지 나온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냐?’
‘나이가 68세나 되는 법륜 스님도 웃으면서 사는데 젊은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롭게 사는가?’

저를 보면 이렇게 여러분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잖아요. 저는 제가 살아온 삶이 여러분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요? (웃음)

여러분들도 자꾸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늘 일상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조금씩 키워나가면 좋겠어요. 수행이란 주어진 환경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