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그니타스(스위스의 안락사*존엄사 지원 단체)..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다발성경화증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던 앤드류 바클레이는 그의 삶을 마치겠다는 가슴 아픈 결심을 하였다. 그의 아내 산드라 바클레이는 그의 손을 붙잡고,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도 대답했다: "나도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요. 안녕."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20분 후, 앤드류의 가슴이 느리게 움직였고, 심장이 멈추었다. 그것은 65세의 앤드류를 안식으로 인도하는 죽음이었다. 그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에서 다발성경화증으로 인한 25년간의 고통을 끝내기로 하였다.
산드라는 남편이 안락사(존엄사)약물을 복용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 선데이 미러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앤드류가 원한 것이었고, 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가 계속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멋지고 행복한 49년을 함께 보냈기에 저는 삶의 마지막에도 그를 도우며 함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취리히에서 앤드류 바클레이와 그의 부인 산드라
목요일 오후 12시 경, 취리히 외곽의 산업단지에 위치한 집에서, 산드라는 그녀의 남편이 안락사약물(존엄사약물)을 복용할 때 맞은 편 하얀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는 그에게 울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그가 울면 저도 울었을 겁니다. 우리는 디그니타스에 도착하여 밖에 있는 작은 정원에 앉았고, 앤드류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아주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야기 하는 대신,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디그니타스의 스탭 두 명이 앤드류를 안으로 안내하여 그가 자살을 강요받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앤드류는 30분 후 안락사약물(존엄사약물)을 복용하기 위해 먼저 멀미약을 복용하였다. 산드라는 말했다: "스탭이 앤드류에게 침대에 누울 것인지 묻자, 앤드류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저는 그가 누워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가 휠체어에서 소파로 옮겨앉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제가 그와 함께 있어주어서 그를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모금의 안락사약물(존엄사약물)을 복용했다. 30초 정도 지난 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탭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고, 몇 분이 지나자 그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저는 그에게 언제나 그를 사랑했노라고 말했고, 그도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그는 평화롭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코를 조금 골다가 20분 정도 지나서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존엄했고, 모든 것이 계획했던 대로 편안함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시절의 앤드류 바클레이와 그의 부인 산드라
망연자실하여 우는 것도 잊어버린, 67세의 산드라는 차를 몰고 근처의 호수로 가서 앤드류를 생각하며 한 시간 가량을 걸었다. 취리히에 있는 그녀의 호텔로 돌아와서, 그녀는 우리와 인터뷰하는 내내 고요하고 놀랍도록 침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14개월 전 앤드류가 처음 디그니타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여름에 안락사를 실행하기로 최종합의 했을 때, 저는 몸에 병이 났습니다. 그러나 앤드류는 휠체어에서 뛰어올라 점프를 할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제가 윗층에서 제 며느리에게 위로를 받으며 울고 있을 때, 앤드류는 아래층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휠체어에 갇혀서, 대소변 실금에, 극심한 떨림증과 극도의 피로로 고통받으며, 침대에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손의 떨림으로 유리컵을 집어들지도 못했던 앤드류는 그의 삶을 끝마치고자 하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산드라는 남편이 온라인에서 죽을 방법을 찾고있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디그니타스에 단순히 방문만 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앤드류가 자신은 상황이 아주 안 좋아졌는데도 그대로 넋 놓고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제게 늘 말했지만 말입니다. 그때 저는 그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약을 찾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화가 났습니다. 저는 그가 또 그런 행동을 하면 더 이상 돌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를 속이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앤드류는 2차 진행형 다발성경화증으로 진단 받고서 그의 증상이 절대 나아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디그니타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그러나 저는 앤드류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자살에 실패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한 동안 저는 눈물 없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때때로는 샤워를 하다 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앤드류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1967년 길거리에서 만났다. 그는 18세, 그녀는 16세였다. 7년 후에 결혼하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영국해외항공사에서 비서로 일하던 그녀의 할인혜택을 이용하였다. 1980년, 그들은 첫 째 아이를 가졌다. 산드라는 말했다. "앤드류는 가장 멋진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을 정말 사랑한 그는 아들의 침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1992년, 신장 188cm의 공무원 앤드류가 다발성경화증으로 진단받았을 때 그들의 행복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증상은 315km의 영국북부트레킹코스를 갔다온 뒤 나타났다. 그는 그의 아킬레스건이 다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 그의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고, 급격히 다리의 모든 감각을 잃었다. 5개월 후 의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앤드류는 언제나 건장하고 건강한 남자였습니다. 신경전문의는 그가 1년 안에 휠체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앤드류는 거부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3년 전까지도 계속 걸었습니다. 그는 계속 걸으려 했습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그러나 점점 어려워졌습니다.그는 지팡이가 필요했습니다. 이어서 4족보행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다발성경화증이 그의 몸으로 올라오자 전동스쿠터가 필요했습니다."
산드라는 앤드류가 진단을 받은 후에도 자전거를 탔을 정도로 고집셌던 것을 회상한다. "한 친구가 제게 전화하여 앤드류가 가로등을 감싸안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보니 이미 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가 자전거를 다리로 멈출 수 없어서 가로등으로 향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20년이 넘는 동안에 앤드류의 다발성경화증은 재발하거나 차도를 보이거나 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나쁜 결말로 이어졌다.
앤드류 바클레이와 그의 아내 산드라가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 중 하나
그는 죽기 전, 우리 자매지 데일리미러에, 자신의 이야기가 영국에서 안락사가 합법화되는데 도움이 되기를 얼마나 소망했는지, 또 2009년 방광과 장에 배변주머니를 달 때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를 말했다. 당황스러운 사고들을 일으키는 수술 불가능한 탈장으로 인해 배변주머니를 그의 피부 가까이 둘 수 없게 되었다. 산드라는 말했다: "앤드류는 그런 모습들과 분투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어요. 그는 마침내 내가 더 이상 그를 침대로부터 들어올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체가 힘을 상실하자,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내가 일으켜주는 것을 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우리 집에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자신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쓸모 없는 덩어리"로 여기는 동안에도, 산드라는 절대 그를 짐으로 느끼지 않았다. "저는 그를 위해 어떤 것이든 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슬프게 말했다. 앤드류의 건강이 악화될 수록 그녀는 정서적으로 혼란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강하게 해야 했다. "저는 앤드류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며 앉아 울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앤드류 바클레이와 그의 아내 산드라
결정이 내려지자, 앤드류와 산드라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 토요일, 친구의 세례식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두 살, 네 살짜리 손녀와 가장 어려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앤드류는 늘 하던대로 그저 손녀들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습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남들에게는 그것이 차갑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다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에 다가오는 매우 사실적인 문제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앤드류가 자라는 손녀들을 보러 가지 않기로 한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으로서 우리에게는 그러한 그의 생각에 익숙해질 14개월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요일 밤, 산드라는 남편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목요일에 그녀는 그들의 렌트카로 디그니타스로 향했다.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 후 그녀는 영국의 켄트주 포크스톤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 901km를 여행했다. 앤드류는 종교인이 아니었고 부부는 그녀가 취리히에서 그의 화장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저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재를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정말 멋진 삶을 살았고, 저는 그에 관한 어떤 것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취리히 근교 Pfaeffikon에 위치한 디그니타스
금요일, 그녀가 빈 집에 도착했을 때, 옷장에는 여전히 앤드류의 옷들이 있었고, 그의 담배 종이가 부엌 쪽에 있었다. 부부는 거의 50년간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떨어져서 보낸 적이 없었다. "저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리울 것입니다," 산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앤드류는 제가 저의 삶을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의심없이 그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흐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존중할 것입니다. 스위스로 가기를 바랐던 그의 소원을 존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국의 안락사(존엄사)지지단체 디그니티 인 다잉의 최고책임자 사라 우튼은 말했다: "우리는 앤드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펐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앤드류와 같은 중환자들이 그들이 바라는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스위스로 여행하는데 그들의 마지막 날들을 보낼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은 비극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영국인들이 안락사 시술(존엄사 시술)을 받기 위해 2주에 한 명 꼴로 디그니타스로 여행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년 300여 명의 불치병 환자들이 집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겁에 질린채로 말입니다. 국민의 82%가 안락사(존엄사)를 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법제화에 실패했습니다. 올해 캐나다, 캘리포니아, 콜로라도에 있었던 법제화로 북아메리카에서 9천2백만여 명이 안락사법(존엄사법)의 테두리안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우리 나라의 불치병 환자들은 삶의 끝에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죽어가는 이들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고,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얼마나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야 할까요?"
▼ 원문 기사
Andrew Barclay made the heartbreaking decision to end his own life after battling multiple sclerosis
www.mirror.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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