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서 발행하는 [M+ 한국] 8월호의 지면에 우리절 회주큰스님이 등장하셨다.
표지와 목차를 넘기면 본기사 첫 페이지 'People, 나의 삶 나의 철학란'에 회주큰스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다.
방송사, 신문, 잡지 등 거의 모든 언론 매체를 망라해 우리절과 회주큰스님 관련 소식이 소개되는 터에 오히려 새삼스런 감도 들지만, 한국일보 이 철순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큰스님의 평소 지론을 잘 담아내고 있고,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우리절의 모습이 들어있어 지면 그대로를 소개해 올린다.
취재: 한국일보 이철순 기자, 사진: 한국일보 이항동기자
엘리트불자 양성에 앞장서는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스님
부처님 말씀은 제 삶의 거울이죠
전통과 첨단 어우러진 신개념 불교타운 건설, 교육 불사로 불교계 새 지평 열어
대구 영대네거리에 가면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도심 한 복판에 큰 기와집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이 우뚝 서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보살행을 수행하는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다.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우학스님은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선진 불교 포교를 개척, 전국 최대 규모의 불교 포교도량을 건립하여 불교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본인이다.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을 만나 삶과 수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스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허허, 혼자 사는 사람이 더 바쁘답니다. 절 생활이야 매일 똑 같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정진하며 불자들 교육시키는
일로 하루가 꽉 짜여져 있어요. 또 찾아오는 손님 맞는 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 스님, 불가에 입문하게 된 동기와 수행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불가에서는 출가 동기 같은 건 잘 들춰내지 않는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삼촌이 한 분 계셨는데 링거 주사를 잘못 맞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쇼크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님께는 진작 말 못하고 있다가 숙모께 뜻을 내비추니 장손이 그런 말하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진학했는데 생명의 무한성을 탐구할 요량으로 생명을 다루는 한의학을 공부하다 통도사로 출가를 하게 됐어요. 출가하여 삭발하고 절 생활을 시작했을 때 마치 오래 전부터 수행자였던 것처럼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나는 전생에 출가승이었을 거라 믿어요. 출가하여 절에 있는데 속가집 식구들이 자꾸 찾아오길래 은사 스님께 부탁하여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숨겨 달라고 부탁하며 공부했어요. 지금도 포교하느라 바쁘지만 일년에 한번씩은 꼭 안거 수행에 들어가지요. 저는 지금까지 수행과 포교는 둘이 아니라는 일념으로 공부해 왔어요.
# 스님, 대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또 시대의 흐름을 예견하고 늘 대중 포교에 앞장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그동안 포교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한번은 걸망을 지고 대구를 지나다 잠시 머물게 되었어요. 그 때가 1992년도였는데 포교당이 집세를 못 내서 교회로 넘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그것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리 저리 돈을 꾸어다 밀린 세를 치르고 포교당을 살렸던 게 그 길로 대구에 눌러 앉게 되었지요. 그 때 생각했던 게 바로 교육불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교육만이 불교 포교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두 팔 걷어 붙이고 교육불사를 시작했지요. 그 때만 해도 홍보에는 취약한 부분이 많아 내가 직접 나서서 밤새 현수막도 붙이고 전단지를 돌려가며 불교 공부를 가르치는 데 열을 올렸어요. 지금도 ‘교육만이 살길이다’라는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교육불사에요.
그렇게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한 포교당이 발전하여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대웅보전을 비롯해,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의 옥불보전과 노인전문병원까지 갖추게 됐어요. 또 감포선원과 칠곡․경산 자인․분원에 이어 미국 뉴욕에까지 분원을 개원해 불교 포교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어요. 본원 건물에는 다양한 기도실과 수행공간, 납골당을 비롯해 유치원, 불교서점, 백화점, 꽃집, 찻집, 전통문화체험장, 우리옷 단향, 출판사, 사진관, 방송스튜디오, 갤러리, 생태공원, 유치원수영장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에요. 사찰에 오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일들을 다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전국에서 우리절을 모델로 삼기 위해 견학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이 모두가 사부대중의 원력 덕분이라 생각해요.
# 스님, 이제는 누가 뭐래도 대구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로 자리매김하셨는데 스님께서 수행의 길잡이로 삼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부처님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요즘 불교계엔 불교 포교가 위기라고들 많이 걱정하는데 나는 그 원인을 부처님을 모델로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부처님 당시만 해도 중생이 있는 곳에 절을 세우고 그 나라의 언어로 법을 전하며 포교를 했어요. 그런데 이조 500년 동안 산중불교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에 있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대하다 보니 불교 발전이 더딘 것 같아요. 시대는 빠르게 변하는데 산중에서만 한가하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모든 가치 기준을 부처님을 표준 삼고 모델로 하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중생이 있는 곳에 불교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이제 도심 포교는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어요.
# 스님께서는 포교 활동 틈틈이 글쓰기, 사진, 서화 등 예술 활동에도 조예가 깊으신데 언제 그런 재능까지 갖추셨는지 궁금합니다.
-뭐 특별한 재능은 없어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상도 받고 한 걸 보면 문학적 소양은 좀 있은 것 같아요. 그 소질을 바탕으로 출가 후 첫 수필집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라는 책을 펴냈는데 30만부가 팔려 밀리언셀러 반열에 들기도 했어요. 그 책이 포교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어요. 또 절에 살다보니 자연히 서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어 작품을 하게 됐어요. 스님들의 선화는 단순한 그림이라기보다 수행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지요. 내가 승려다 보니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구속을 벗어나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쪽이에요. 그동안 책도 좀 펴냈고 전시회도 여러번 개최했어요.
#스님, 끝으로 이 시대 현대인에게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조언의 말씀과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흔히 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들 말하잖아요. 빈 몸으로 와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갈 때는 잘 회향하고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살아있을 때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나눔을 펼쳐야 인생을 잘 마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환원의 정신을 잘 이해하면 욕심도 버릴 수 있고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부처님을 따르는 불제자로서 한 말씀 덧붙인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잘 투영시킬 때 삶은 더욱 밝아지고 맑아질 거라 믿어요.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특별히 계획하는 것은 없어요. 다만 전통과 첨단이 잘 교류하는 도심 속 포교당을 더 많이 건립하여 불교 포교를 더욱 활성화시켰으면 좋겠다는 꿈은 늘 갖고 있지요.
-기사, 한국일보 [M+ 한국]에서 옮김-
표지와 목차를 넘기면 본기사 첫 페이지 'People, 나의 삶 나의 철학란'에 회주큰스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다.
방송사, 신문, 잡지 등 거의 모든 언론 매체를 망라해 우리절과 회주큰스님 관련 소식이 소개되는 터에 오히려 새삼스런 감도 들지만, 한국일보 이 철순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큰스님의 평소 지론을 잘 담아내고 있고,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우리절의 모습이 들어있어 지면 그대로를 소개해 올린다.
취재: 한국일보 이철순 기자, 사진: 한국일보 이항동기자
엘리트불자 양성에 앞장서는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스님
부처님 말씀은 제 삶의 거울이죠
전통과 첨단 어우러진 신개념 불교타운 건설, 교육 불사로 불교계 새 지평 열어
대구 영대네거리에 가면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도심 한 복판에 큰 기와집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이 우뚝 서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보살행을 수행하는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다.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우학스님은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선진 불교 포교를 개척, 전국 최대 규모의 불교 포교도량을 건립하여 불교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본인이다.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을 만나 삶과 수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스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허허, 혼자 사는 사람이 더 바쁘답니다. 절 생활이야 매일 똑 같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정진하며 불자들 교육시키는
일로 하루가 꽉 짜여져 있어요. 또 찾아오는 손님 맞는 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 스님, 불가에 입문하게 된 동기와 수행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불가에서는 출가 동기 같은 건 잘 들춰내지 않는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삼촌이 한 분 계셨는데 링거 주사를 잘못 맞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쇼크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님께는 진작 말 못하고 있다가 숙모께 뜻을 내비추니 장손이 그런 말하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진학했는데 생명의 무한성을 탐구할 요량으로 생명을 다루는 한의학을 공부하다 통도사로 출가를 하게 됐어요. 출가하여 삭발하고 절 생활을 시작했을 때 마치 오래 전부터 수행자였던 것처럼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나는 전생에 출가승이었을 거라 믿어요. 출가하여 절에 있는데 속가집 식구들이 자꾸 찾아오길래 은사 스님께 부탁하여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숨겨 달라고 부탁하며 공부했어요. 지금도 포교하느라 바쁘지만 일년에 한번씩은 꼭 안거 수행에 들어가지요. 저는 지금까지 수행과 포교는 둘이 아니라는 일념으로 공부해 왔어요.
# 스님, 대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또 시대의 흐름을 예견하고 늘 대중 포교에 앞장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그동안 포교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한번은 걸망을 지고 대구를 지나다 잠시 머물게 되었어요. 그 때가 1992년도였는데 포교당이 집세를 못 내서 교회로 넘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그것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리 저리 돈을 꾸어다 밀린 세를 치르고 포교당을 살렸던 게 그 길로 대구에 눌러 앉게 되었지요. 그 때 생각했던 게 바로 교육불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교육만이 불교 포교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두 팔 걷어 붙이고 교육불사를 시작했지요. 그 때만 해도 홍보에는 취약한 부분이 많아 내가 직접 나서서 밤새 현수막도 붙이고 전단지를 돌려가며 불교 공부를 가르치는 데 열을 올렸어요. 지금도 ‘교육만이 살길이다’라는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교육불사에요.
그렇게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한 포교당이 발전하여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대웅보전을 비롯해,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의 옥불보전과 노인전문병원까지 갖추게 됐어요. 또 감포선원과 칠곡․경산 자인․분원에 이어 미국 뉴욕에까지 분원을 개원해 불교 포교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어요. 본원 건물에는 다양한 기도실과 수행공간, 납골당을 비롯해 유치원, 불교서점, 백화점, 꽃집, 찻집, 전통문화체험장, 우리옷 단향, 출판사, 사진관, 방송스튜디오, 갤러리, 생태공원, 유치원수영장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에요. 사찰에 오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일들을 다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전국에서 우리절을 모델로 삼기 위해 견학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이 모두가 사부대중의 원력 덕분이라 생각해요.
# 스님, 이제는 누가 뭐래도 대구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로 자리매김하셨는데 스님께서 수행의 길잡이로 삼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부처님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요즘 불교계엔 불교 포교가 위기라고들 많이 걱정하는데 나는 그 원인을 부처님을 모델로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부처님 당시만 해도 중생이 있는 곳에 절을 세우고 그 나라의 언어로 법을 전하며 포교를 했어요. 그런데 이조 500년 동안 산중불교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에 있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대하다 보니 불교 발전이 더딘 것 같아요. 시대는 빠르게 변하는데 산중에서만 한가하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모든 가치 기준을 부처님을 표준 삼고 모델로 하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중생이 있는 곳에 불교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이제 도심 포교는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어요.
# 스님께서는 포교 활동 틈틈이 글쓰기, 사진, 서화 등 예술 활동에도 조예가 깊으신데 언제 그런 재능까지 갖추셨는지 궁금합니다.
-뭐 특별한 재능은 없어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상도 받고 한 걸 보면 문학적 소양은 좀 있은 것 같아요. 그 소질을 바탕으로 출가 후 첫 수필집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라는 책을 펴냈는데 30만부가 팔려 밀리언셀러 반열에 들기도 했어요. 그 책이 포교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어요. 또 절에 살다보니 자연히 서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어 작품을 하게 됐어요. 스님들의 선화는 단순한 그림이라기보다 수행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지요. 내가 승려다 보니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구속을 벗어나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쪽이에요. 그동안 책도 좀 펴냈고 전시회도 여러번 개최했어요.
#스님, 끝으로 이 시대 현대인에게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조언의 말씀과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흔히 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들 말하잖아요. 빈 몸으로 와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갈 때는 잘 회향하고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살아있을 때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나눔을 펼쳐야 인생을 잘 마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환원의 정신을 잘 이해하면 욕심도 버릴 수 있고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부처님을 따르는 불제자로서 한 말씀 덧붙인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잘 투영시킬 때 삶은 더욱 밝아지고 맑아질 거라 믿어요.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특별히 계획하는 것은 없어요. 다만 전통과 첨단이 잘 교류하는 도심 속 포교당을 더 많이 건립하여 불교 포교를 더욱 활성화시켰으면 좋겠다는 꿈은 늘 갖고 있지요.
-기사, 한국일보 [M+ 한국]에서 옮김-
출처 : 불교 인드라망
글쓴이 : nam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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