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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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인도성지순례

보현화 2007. 10. 29. 11:40
불기2551년10월12일~26일까지 경산,칠곡에서는 주지스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길에 올랐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8시간의 비행 끝에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메케한 인도의 독특한 향이 순례자들의 코를 자극한다.

뭄바이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인도문,세계문화유산인 빅토리아 기차역,집단 빨래터(도비가트),자이나교 사원등을 관광한뒤 비행기로 1시간을 달려 오랑가바드에 도착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빅토리아 기차역,집단 빨래터-남자들이 빨래터에 모여 빨래를 하는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도 별로 깨끗해보이지 않았는데 널어놓은 하얀 빨래는 인도의 강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자이나교 사원의 기도모습

먼저 불교미술의 진수라고 알려진,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을 시작으로, 순례의 첫 발걸음을 옮겼다.오랑가바드에서 서쪽으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엘로라 석굴,호텔에서 엘로라 석굴로 가는 길에는 500여년이나 되었다는 가로수 고목들이 장관이다.


옐로라석굴


옐로라석굴 가는길의 고목아래에서-제16석굴 가장 규모가 웅대한 힌두교 사원


제10석굴-불교석굴에서 예불을 올리다.

엘로라석굴은 불교,힌두교 자이나교의 유적이 함께 공존하는곳이다.
전부 34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는데,1굴~12굴 까지는 불교석굴로 4~8세기에 만들어졌으며,13~29굴은 힌두교 석굴로 8~9세기에 만들어졌으며,30~34굴은 자이나교 석굴로 9~13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 16굴은 힌두교 석굴로 그 규모와 장엄함이 대단했다. 거대한 하나의 돌덩어리에 새겨진 힌두교신들의 조각들이 가득한 건축물이다.
우리는 불교석굴인 제 10석굴에서 칠정례와 반야심경으로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예불을 올렸다.

다음은 아잔타 석굴이다.




석굴내부의 벽화
아잔타 석굴은 순수하게 불교석굴로만 이루어져 있다.
강렬한 태양을 마주하며 산길을 오르니 거대한 말발굽형의 동굴이 서서히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각 굴마다 벽화와 조각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는 26번 석굴에서의 예불


우리의 예불을 지켜보고 있는 현지인들-아잔타 석굴을 오르내리는 가마-우리가 도착하자 상감마마를 외치며 가마를 타라고 한다.우린 무수리라서 못탄단다는 농담을 그들은 알아들었을까??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는 26번 동굴이 가장 유명한가보다.
겨우겨우 한국말을 하는 인도 현지 소년이 열심히 뒤따라 오며 사진도 찍어주고 안내를 해준다.
26번 석굴에서 천수경,칠정례, 반야심경으로 예불을 올렸다.
그날이 마침 인도의 공휴일이란다.그래서 많은 현지인들이 그곳에 왔다.
우리의 예불을 신기한듯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아잔타석굴에 소풍이라도 왔나보다 교복을 입은 어린아이들에게 스님은 인기만점이었다.청년들마저도 사진 찍히기를 무척 즐기는것 같다.

침대열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불교조각의 진수인 산치대탑을 보기위해 보팔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지구별에 평화로움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산치의 모습일 것이다.산치에 들어섰을때 우리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평화롭게 정지한 어느 특별한 장소,불국정토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아주 평화로운 느낌이다.
아쇼카대왕이 사랑하는 여인 데비를 위해 부처님 사리를 모신 스투파와 수십개에 이르는 승원터,법당터가 남아있다.




예불을 드리기 위해 부처님앞에 서니 부처님의 목이 날아가고 없다.누가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불교 유적지 가는 곳곳마다 힌두교인들에 의해 유적지가 관리되고 있음을 보는게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인도 인구의 80%가 힌두교도들이라니 어쩔수없는 일인지....
머리가 없다고,팔이 잘려나갔다고 어느곳에든 부처님이 아니 계실까??
목이 없는 부처님전에 정성껏 예불을 올리고 탑돌이를 했다.

다시 특급열차로 8시간을 달려 세계7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지마할 무굴과 이슬람 건축요새 아그라성을 보기 위해 아그라에 도착했다.


아그라에선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워 자전거릭샤로 시내관광에 나섰다.
타고 보니 연세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가 힘겹게 자전거를 끄시는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들의 하루수입은 인도돈으로 100루피에 불과하다.1달러가 38루피였으니 고작 3달라도 안되는 돈이다.그것도 외국인을 한번 태우는데 100루피를 받는다고 하니 오늘 이 할아버지는 하루 일을 마친 셈인가??스쿨버스인셈인가?열명쯤은 되어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가득타고 있다.



타지마할은 무굴왕조의 샤자한이 17년의 결혼기간동안 13명의 아이를 낳고 14번째 아이를 낳으려다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
뭄타즈 마할은 그 이름이 말하듯 아름다움이 하늘의 빛과 비교되었다고 한다.그녀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샤자한은 밤새 머리가 회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샤자한은 건축을 무척 즐겼던 왕으로서 엄청난 공사들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여 국가가 흔들릴정도로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들었고,결국은 그의 막내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타지마할이 마주 보이는 아그라 포트의 8각형 탑과 같은 형식의 구조물인 무삼만 버즈에 갇혀 그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죽을때까지 지내야 했으며 죽은뒤에 부인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말년에는 아우랑제브가 아그라 포트의 물 공급마저 막아버려서 빗물에 의존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그라 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아그라성에 관광온 사람들이 스님을 모시고 온 우리가 신기한가보다.
말도 걸어보고 사진을 찍기도하고 .....우리는 저들을 보러 왔건만....
.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가기위해 다시 침대열차를 타야했다.
기차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예측할수 없는게 인도 도로 사정인지라 아주 여유를 두고 출발을 서둘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는 도중 트럭들이 길을 막아버리자 속이 타 들어가기 시작한다.
계속 염주를 돌리며 길이 뚫려주기를 기도한다.
막히는 길을 빠져나오자 자동차는 어둠속을 화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기차역에 겨우 도착하니 다행히도 기차가 10분연착이다. 겨우겨우 기차에 몸을 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불과 몇분차이로 하루 일정이 그대로 날아가버릴뻔 했다.


기차역 풍경-의자가 없으니 아예 바닥에 드러누운채 기차를 기다린다.







바라나시 시장거리에서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 풍경-인도인들의 아침식사

인도사람들은 갠지즈강을 강가(ganga)라고 부르며 그곳에서 목욕을 하면 그들의 죄가 씻긴다는 믿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강가로 몰려나와 양치질에 세수에다 목욕까지 하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않은 화장터에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화장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시체를 화장한 재는 갠지즈 강으로 버려지고 소의 시체도 둥둥 떠다니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신이 내려준 성지로 여기며 계속해서 이렇게 목욕을 하고 있다.
누가 이들의 믿음을 바꿀수 있을것인가??
부처님께서도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맑히는 수행은 하지 않으면서 여기서 목욕을 하면 그들의 업이 없어진다는 그들의 주장을 크게 꾸짖어셨다한다.
목욕을 해서 죄가 없어진다면 갠지즈 강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해탈을 이루었을텐데...




갠지즈강의 일출을 맞으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바라나시 가트에 나온 걸인-나무막대기 같이 생긴 물건의 용도는 칫솔이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녹야원
붓다가야의 커다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뒤 처음으로 자신이 증득한 법을 같이 수행을 했던 다섯비구에게 법을 펼치신 곳이 바로 이 사르나트의 녹야원이다.
다메크 스투파라고 불리는 불탑과 큰 수도원의 흔적,고고학 박물관등이 있다.


초전법륜지


다메크 스투파


보드가야 마하보디대탑

단식과 고행 끝에 이곳까지 온 석가모니가 마을 처녀가 바치는 우유죽을 먹고 난 다음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곳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리에는 B.C3세기경에 아쇼카 왕이 세운 마하보디 대탑이 서있다.
사원 안에는 오른손을 늘어뜨린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금색불상이 모셔져있다.



우리는 천수경,칠정례,108참회,반야심경으로 예불을 올린뒤 탑돌이를 했다.
스리랑카에서 순례를 온 신도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모습도 볼수 있다.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자 가부좌를 틀고 여기저기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수있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한달쯤 이곳에 앉아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너무도 성스럽게 느껴졌다.


깨달음을 얻으신후 법을 펼치시기 위해 내디딘 첫 발자욱


스리랑카에서 온 순례객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네란자라강가의 수자타마을


수자타 스투파

네란자라 강에서 몸을 씻고 강둑에 쓰러져 계신 부처님께 유미죽 공양을 올려 기력을 회복하게 한 아름다운 마음씨의 수자타는 부처님과 어떤 인연이었을까??
건기때는 거의 비가 오지 않아 흰 강바닥을 드러낸다는 네란자라강,우리가 갔을땐 다행히 며칠전 비가 내려 강물이 유유히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강둑에 자라 있는 길상초는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 깔개로 쓰시던 풀이었다지
수자타 마을 입구에도 길상초 한무리가 인도의 강렬한 태양빛아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저멀리 보이는 산이 전정각산이다.



수자타마을로 들어서니 수자타의 모습이라도 상상하게 해줄 아가씨들은 보이지 않고 한무리의 남자아이들이 뛰어나와 작은 언덕을 가리키며 수자타 스투파를 연신 외친다.
여래학교라고 씌어진 건물이 한국어 학교이며 자기들은 거기서 한국어를 공부한다며 학교를 위해 기부를 해달라고 하면서 한국스님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이드 한테 물어보니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이란다.
수자타 스투파위에 올라서서 보니 저멀리 큰산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거기가 바로 전정각산(前正覺山)이란다.부처님이 금강보좌에 앉아 용맹정진하시기전에 잠시 들렀던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이곳에 있는 유영굴(留影窟)은 당시 용이 자기 석실에서 깨달음을 이루기를 간청하자 용의 소망을 들어주는 의미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다고 한다.

인도 최초의 불교대학 나란다 대학


나란다는 길이 11km,폭5km로,1만명의 학인스님과 1천 5백명의 교수스님이 살았다고 하며 불교학 이외에도 인문학,천문학등 다방면의 학문이 폭넓게 탐구되었다고 한다.
무슬림의 침공으로 나란다의 거대한 사원과 승원은 무려 6개월간이 불에 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곳에 있던 스님들마저도 고스란히 불길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니 그 처참함이란....
아직도 유적지 곳곳에 불에탄 시커먼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너무도 가슴 아픈일이다.

법화경의 설법지,염화미소의 영축산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위해 이산을 올라갔으리라
오르는 길엔 말을 타고 오르다 말에서 내린 하마터,신하들을 기다리게 하고 홀로 걷기 시작하던곳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부처님이 법문을 하실 때 한번은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었더니 제자 마하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일화가 있는곳도 바로 이곳 영축산 제3봉이란다.



독수리를 닮은 바위를 지나 여래향실에 서서 칠정례와 반야심경으로 예불을 올렸다

영축산에서 내려오는길에 빔비사라왕이 아들 아사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를 당했던 감옥터를 들렀다.
부처님께 죽림정사를 지어 바치고 그렇게 열심히 법문을 들으러 다녔던 빔비사라왕은 아들과는 어떤 악연으로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했을까???

불교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
산자야에게 출가했던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곳이기도 하다.

대나무만 이렇게 무성할뿐 사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죽림정사 앞에서 스님께서 사탕을 나눠주시자 아이들이 벌떼같이 모여든다.
어른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세웠다.
인도 순례지 어디서나 보아야하는 풍경이다.

유마경의 무대인 바이샬리


대림정사-아쇼카왕의 석주가 가장 잘 보존된곳이기도 하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픕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의 병이없어지면 내병도 없어질 것입니다”라는 법문을 남긴 유마거사의 고향 바이샬리
바이샬리에 들어서니 부처님께서 보경을 외우시며 질병을 물리치신 이야기도 떠오른다.
또한 부처님께서 최초로 자신의 열반을 예견한 장소이기도 하며,유녀 암바팔리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땅이다.암바팔리는 암라나무 아래 버려진것을 동산지기가 주워다 길렀다고 한다.그런데 커가면서 뛰어난 미인이 되었으므로 나라 안팎에서 청혼이 쏟아져 들어오자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 기생으로 만들었다.기생이 된 여자는 재산과 지위도 있어 호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수 있었다.
뒤에 암바팔리도 자신의 재산을 불교교단에 바치고 출가하여 모범적인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바이샬리의 대림정사엔 온전하게 보존된 아쇼카 석주를 만날 수 있었다.
원숭이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원앙봉밀터,그 먼 카필라성에서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찾아왔던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가 결국 이곳에서 출가를 허락받고 최초의 비구니승단이 결성되었다.

부처님의 열반지 쿠시나가라




이른 아침,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열반당에 이르니 마치 어제 부처님께서 우리곁을 떠나신듯하여 목이 메어온다.
너무도 편안하게 누워 계신 부처님앞에 예불을 올린다.
제자 아난다의 슬픔이,하늘이 무너지는듯했을 그 슬픔이 250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내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다비장터

이 두사람은 다비장터 앞에서 무슨 생각에 잠긴것일까???

부처님께서 24회 여름안거를 지내신 기원정사



같은 기원정사를 찾았지만 저들과 우리의 의식은 너무나 다르다.

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한 금강경이 설해진곳, 석양이 물들어가는 기원정사에 앉아 금강경독송을 하노라니 마치 수보리가 편단우견 우슬착지하고 부처님께 법을 청하던 그 장면속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아니다.그때는 탁발을 끝내고 난 시점이니까 오전이었겠다.

기원정사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지어 바친 수닷타 장자의 집터가 있다.


석가족의 고향 카필라바스티

숫도다나왕의 무덤


불교신자들이라며 무슨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삭발하는 의식이었는데 가이드 말로는 부모들이 어린아이의 머리를 삭발해줌으로 아이의 복을 빌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축하해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하고 아이의 부모는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단다.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룸비니 동산의 아쇼카석주


룸비니 동산의 내부-아기 부처님께서 첫발을 내디디신 발자국
출처 : 불교 인드라망
글쓴이 : 자인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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