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불교&자료&관심사●/불교이야기·불교뉴스

[스크랩] `바른 믿음`에 관한 성타스님의 법문(53선지식 고승 특별법문)

보현화 2008. 4. 5. 01:47

벚꽃,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걸으며, 경전에 나오는 ‘화엄동산’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끔 되는 봄철 및 신학기 입학 시기를 맞아 요즘 우리 절에서는 ‘53선지식 특별법문’이 이어지고 있다.

2008년 4월 2일 수요일 우리절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옥불보전에서는 청법가로 현재 불국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는 성타스님께 법문을 청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스님께서는 사자좌에 오르셔서 먼저 게송으로써 법문을 여셨다.

 


 “불력충만佛力充滿 어법계於法界하니

  유필원唯必願 정신지正信持하라

  나무아미타불“


우리 관음사 불교대학은 우리 한국 불교대학의 대표적인 포교도량이고,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 관음사 불교대학을 창설하시고 주재하고 계시는 우리 우학 큰스님을 비롯해서 많은 스님들과 신도님, 간부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제가 옛날 포교원에서도 2년 8개월간 포교 부분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포교에 대해서 현실적인 현안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관음사에 대해서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큰 시대에 큰 업적을 이룩하시면서 성과를 쌓아가고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 다시 한번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 전에 읊은 게송은 제가 법회 할 때마다 주로 많이 하는 게송입니다.

불심이라도 하고 불력이라고도 합니다만, 부처님의 법신 또 부처님의 가피력은 법계에 충만하다. 

어느 곳이든지, 우리가 사는 광소에 곳곳마다 충만하고 계신다.

유필원 정신지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통해서 가호를 받고자 하면 바른 믿음을 가지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초기불교(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불교를 크게 말할 때, 소승불교다, 대승불교다 이런 말씀 하시죠?

사실 소승불교가 불교의 근본불교입니다.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님을 수행하면서, 모시면서 부처님의 가르침(법문)을 듣고 그 법문을 기록하면서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온 불교가 근본불교인데, 그 불교를 소승불교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부처님을 모시면서 법문을 들어온 그 시대의 대중이랄까 살고 있던 그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 한 600년이 지나서 대승불교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나면서, 대승불교운동을 하는 분들이 ‘자기들 불교는 대승불교이고, 그동안의 불교는 소승불교다’ 이런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승, 대승이라는 것은 잘 아시죠?

소승이라는 것은 ‘자기 개인의 구원’에 한정된 그런 불교라고 하면, 대승불교는 ‘나와 여러사람이 더불어 함께 열반의 세계, 이상의 세계에 간다’는 그런 불교란 뜻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일어난 여러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 동기를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대승불교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모시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들면서 내려오는 그런 분들은 아니에요. 600년 후니까요.

그런 분들은 아니지만, 600년 후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최고의 가치에 다 함께 도달한 분들, 선각자들이에요.

부처님은 6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부처님의 그 깨달음의 세계를 함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선각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그동안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내려왔던 그 불교, 즉 근본불교를 재해석 한 거예요.

재해석, 즉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을 한 거예요.

업그레이드해서(한 차원 높여서 더 발전된 입장에서) 재해석을 한 거예요.

그럴 때 나오는 경전들이 대승경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이런 것이 전부다 그 때 재해석 하면서 우리 앞에 새로운 경전으로 가치를, 방향을 제시해준 경전들이 대승경전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순한 형식논리로써 본다고 하면,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대승(大乘)은 비불설(非佛設)’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게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과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함께 공유하고 교감하면서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 이 시대에 와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하면서 업그레이드해서 재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대승경전입니다.

그래서 설사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해서 재해석을 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초기경전, 소승경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아셔야 됩니다.

다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전의 경전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해 듣고 기억했다가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대승불교는 부처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님의 사상을 재해석 하면서 새롭게 대승경전으로써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 하면, 그럴 때 과거 불교는 소승불교, 재해석한 불교는 대승불교다.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중생을 구원할 수 있는 불교다, 이래서 대승불교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는 그런 소승불교다, 대승불교다 하는 것 보다는 그것은 구분을 지을 뿐만 아니라 근본불교를 폄하하는 이런 의미가 약간 있거든요.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서 지금은 대승불교다, 소승불교다 이런 말씀을 잘 하지 않고,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를 처음부터 내려온 불교라 해서 초기불교라 하고, 소승불교란 말은 잘 쓰질 않습니다.

우리가 관습화된 입장에서 소승불교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지금 와서는 금기시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초기불교, 대승불교 이렇게 하면서 경전을 구분하고, 사상도 초기불교사상, 대승불교사상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구분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 하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 금강경이라든지 법화경이라든지 화엄경 같은 것은 대승불교에 속합니다.


그런데 법화경이라고 아시죠?

법화경에는 무량수품이라는 품이 있어서 부처님의 법신의 모습, 부처님의 참 모습, 진신(眞身)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떻게 말했느냐?

초기에서는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80년 동안 사시다가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설법하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신 그 모습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와서 업그레이드 하면서(재해석 하면서)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게 아니고, 부처님의 참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하다 이겁니다.

2500년 전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 모습이 아니다.

그 모습은 외형적 모습이고, 진짜 부처님의 참모습은 그 모습은 아니고,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모습이다.

무량수라는 말은 영원하다는 뜻이거든요.

‘부처님은 무량수다, 영원하다’이거에요. 2500년 전에 태어났다가 돌아가신 그러한 육신을 가진 부처님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이 어디에 존재하느냐?

‘법신은 무량광(無量光)이다’

빛이 어디에 비치지 않는 데가 없지요?  해가 뜨면 모든 것이 밝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광명처럼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히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조금 전에 읊은 그 게송이 근거 없는 게 아닙니다. 이 대승불교 사상에 입각해서.

업그레이드한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수명은 영원하고 부처님의 계시는 곳은 우주 빛이 비치는 곳마다 어디든지 없는 데가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 법화경이고 대승불교에서 해석한 겁니다, 아시겠죠?

그렇게 보신다고 하면, 부처님의 참 법신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할 뿐 아니라, 우리들이 사는 어느 곳이든지 계신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렇죠?


그러나 이제 과연 우리가 부처님의 진신(眞身)을 만나 뵙고, 부처님으로부터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유구피(有求被 :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한다)는 참 믿음이 전제가 됐을 때 가능하다 이런 말을 씁니다.

즉,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하는데 거기에는 대전제가 있으며 그건 ‘바른 믿음’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시대 자장스님께서도 오대산 안에서 기도를 하시다가 문수보살 화현을 통해서 부처님 사리를 받아 나오신 것입니다.

또 보살님이란 말씀 있잖아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이런 보살님들이 다 부처님의 법신입니다. 법신에서 우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보살님이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장스님께 나타나서 사리를 주신 분이 문수보살의 형식을 빌렸을 뿐이지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부처님의 법신을 뵐 수 있고, 가호를 받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지요?


<<바른 믿음(正信)의 세 가지>>

그런 우리의 대승불교 사상에서 오늘날 불교를 봐야 옳게 보고 그러한 믿음이 오늘날 시대에 필요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바른 믿음’이 제일 중요하고 하나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세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믿음의 한 부분이에요.

바르게 받아들일 때 바른 믿음이 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원하시는 바’(우리 중생들에게)를 바로 이해하고 잘 수용해서 그 원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바른 믿음이 되는 겁니다.

바른 믿음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 이겁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부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읽을 줄 알아야 돼요.

부처님 마음을 읽고 부처님의 마음대로 우리가 몸소 실천하려고 할 때 그게 바로 바른 믿음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바른 믿음은 세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원하시는 바’ ‘부처님의 마음’ 이 세 가지를 바로 받을 때 정심(正心), 바른 믿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렵지 않죠?


#부처님의 가르침#

그렇다고 하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어떤 것이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는 중에서 아주 핵심적으로 우리들에게 강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다 받아들여서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신 바, 그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된다 이런 얘깁니다.


부처님께서 저희들에게 강조 하신 바 중의 중요한 하나가 ‘연기(緣起)사상’ 과 ‘중도(中道)사상’이라고 봅니다.

중도사상은 연기사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고(苦)라든지 낙(樂)이라든지 어느 한 군데 치우치지 않는 그러한 참 모습을 중도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고행을 통해서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 그 당시에 그렇게 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고행이 불교의 전부로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잘못 된 겁니다.

그렇다고 쾌락적인 것이 우리의 행복을 갖다 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벗어나서 중도 입장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연기’란 무엇이냐?

연기사상이라는 것은 ‘인과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인선과요 악인악과’다. 착한 원인을 지으면 착한 결과를 받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단순한 인과응보사상이라고 보는 것 보다는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모든 것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데 그러나 원인이 있고 조건이 있다 이겁니다.

인(因)은 원인이겠죠?  그리고 연(緣)이라는 것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원인도 중요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연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연’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씨앗이 있다고 할 때, 씨앗은 원인이 되겠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워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조건을 갖춰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토양도 있어야 되고, 수분도 있어야 되고, 거름, 햇빛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조건이 형성됐을 때, 그 씨앗이 터서 자라나서 결과를 맺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인보다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연’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인과 연이 조화됐을 때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인과응보라는 말보다도 ‘연기사상’이라는 말이 나와요.

인연(因緣)이라는 말에서 인을 생략하고 생기(生起)라는 말에서 생을 생략해서 ‘연기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원인보다도 연을 소중히 하고, 그 연을 통해서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전개가 된다,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그 연기의 중심은 누구냐?

각자 우리가 연기의 중심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기사상을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도사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른 원인과 바른 조건을 하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라는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중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팔정도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중도사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중도 사상은 팔정도이고, 팔정도로 생활했을 때 바른 원인, 바른 조건이 돼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은 중도요, 연기사상이요, 팔정도 사상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세상에 안 계신다 할 때, 무엇을 의지해 수행할 것인가를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기준으로 해서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율사상’ 이것이 또 기본이 됩니다.

계율사상 중에서 오계사상이 우리 불자들이 지켜야 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초사상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기 전에 저희들에게 하신 가르침이 있습니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시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와 각자에게 내재된 청정한 본래의 자기... 이걸 언젠가는 자기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번뇌 망상으로써 참된 자기의 청정한 자성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정한 자성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야 된다, 그것에 귀의하라는 겁니다.

중요한 말씀이시죠.

불교수행은 바로 청정한 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마지막 열반에 임해서 청정한 자기를 회복하라는 의미에서 ‘자등명법등명’이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직전에 하신 말씀은 바로 ‘세상은 무상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수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가르침 전체를 성취하기 위해서 ‘부지런한 정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진에 있어서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 정진 안하다가 갑자기 삼천배를 한다거나 불철주야정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하고나면 후유증이 많아요.

그것은 초보자가 몸을 조복하기 위해서 한 두 번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진의 기본이 될 순 없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경전에 보면 정진이라는 것은 적은 물이 항상 흘러가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바위도 그 물은 뚫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진을 일상생활을 통해서 평소에 늘 하셔야 되는 것이지, 사회생활 하고 일상생활 하면서 외면하고 있다가 갑자기 절에 와서 삼천배를 하고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것만이 정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정진의 기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정진하는 자세로써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사사불공 처처불상(事事佛供 處處佛像)’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곳곳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되고, 어느 일이든지 불공 하는 정성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님 법을 통해서 건전한 삶을 살고 더 열심히 살고 더 능동적,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철야정진 하느라 며칠씩 진통을 앓고 제대로 못산다면 이거 올바른 거 아니겠죠?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같은 원인을 지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원인을 통해서 죄과((죄의 결과)를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악인을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왜 그렇겠느냐?” 는 질문을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일상생활의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같은 죄업을 지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똑같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소금을 손바닥 위에 한 움큼 얹어놓고 찻잔에 넣었을 때 이건 소금물이 되어 짜서 못 먹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양의 소금이라 하더라도 금호강에 넣었을 때 그 강이 영향을 받습니까? 안 받죠?


이 말씀이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선한 일만 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방편대로 거짓말도 해야 되고, 없는 것도 있는 척 할 수 있고, 있는데도 없는 척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그렇지 않아요?

도둑이 왔을 때는 없다 하고, 남을 도와 줄 때는 설사 없더라도 나한테는 있으니까 가져가라고 하면서 도와줘야 해요.

이건 어떻게 보면 거짓말이에요. 그러나 이런 거짓말은 큰 문제 될 게 없다 이런 말씀이라.

하는 그 분의 평소의 업적(선한 일)이 얼마나 많으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선한 일을 낙동강이나 금호강처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손바닥에 얹힌 한 움큼의 소금이 큰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선한 공덕은 하지 않은 사람은 소금을 찻잔에 밖에 넣을 수 없거든요.

이럴 때는 그 찻잔 속의 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되는 게에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 이 말씀입니다.

죄의식보다도 선한 일을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도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가족이나 이웃,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해서 좋은 공덕을 많이 지어라 이거에요.

그러한 공덕을 짓는 과정에서 다소 잘못된 것은 소금과 같은 거다 이거에요.

소금을 큰 낙동강이나 한강에 넣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큰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말씀은 불교인들의 현실관을 잘 이야기해 주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는 어떻게 보면 은둔주의고 패배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잘못이라.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법문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아시겠어요?

그런 자질구레한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라, 이런 말씀이시라.

얼마나 용기를 주시는, 현실적인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네~(박수)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잘 알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됩니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바로 알 때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저는 봅니다.


#부처님의 (중생에 대해) 원하시는 바#

부처님의 원하는 바를 우리가 잘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심이라고 그랬거든요.

부처님께서는 큰 원을 가지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행사할 때마다 사홍서원 하지 않아요?

이 네 가지 서원은 통원(通願)이라, 승속과 남녀노소간이 없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불자라면 누구나 공유해야 할 원이라는 거예요.

이는 말 할 것 없고, 나머지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원하신 바를 우리 앞에서 보살의 모습으로서 가르쳐 주신 것이 보살의 여러 가지 원입니다.

지장보살님의 12원도 있고, 아미타불의 48원도 있고, 보현보살의 10대 원도 있습니다.

이 원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지라는 원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일상생활을 통해서 갖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될 그 원이 보현보살의 10대 대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 보살님은 보살님마다 특색이 있지 않아요?

그 중에서도 보현보살은 원의 실천의 보살이라 이렇게 보는 거예요.

보현보살의 10대 대원은 우리들의 원을 보현보살님을 통해 표출해 낸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보현보살의 10대 大願은 항상 생각하면서 실천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1)예경제불원(禮敬諸佛願)

  - 부처님께(보살님, 선지식 모두 포함) 예경하는 원을 세워라.

(2)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

  - 부처님의 공덕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그 공덕을 칭찬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공덕이 멈추고 말아버려요.

    그래서 포교의 중요성이 대단한 겁니다.

    사람이 있고 인연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 법이 펼쳐지는 겁니다.

    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포교사가 되어 열심히 해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겁니다. 원래 잘 달리는 양말을 채찍질을

    하는 겁니다. 못 가는 말은 채찍질을 해도 소용 없어요.

(3)광수공양원(廣修供養願)

    - 널리 공양을 베풀라. 불보살님에 대한 공양 뿐 아니라, 많은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하 

      라는 뜻입니다.

(4)참회업장원(懺悔業障願)

    - 항상 자신의 업장에 대해서는 참회를 하는 그런 마음, 생각을 가져야 한다.

      참회하는 마음을 가질 때, 종교인들이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인들이 어떻게 도도할 수가 있습니까?

      권위주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들보다 나을 것도 없고, 내가 권위를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법회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배움을 공유하자는 뜻에서 왔어

      요.  (박수)

(5)수희공덕원(隨喜功德願)

    - 공덕을 짓는 사람에게는 항상 함께 기뻐해주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시기질투 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줘야

      한다.

      우리 민족은 항상 넉넉하고 베푸는 민족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불자님, 민족이 될 때

      우리가 사는 나라가 살 맛 나는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극락세계는 시기질투 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나라입니다.

(6)청전법륜원(請轉法輪願)

    - 부처님의 법륜(진리의 수레바퀴)가 수레가 굴러가듯이 끊임없이 부처님의 전법이 흘

      러가도록 원하라는 말씀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포교를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경주에서 살다보니 세계 석학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 분들이 그래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계인류평화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많은 지성인들이 불

      교에 귀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개도국에서는 불교가 쇠퇴하고 있으나, 선진국에서는 점점 불교신자가

      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사실을 통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7)청불주세원(請佛住世願)

    - 부처님과 보살들, 선지식들이 많이 오래 머물러 모든 중생 이롭게 하기를 바라는 것

      입니다.

      얼마나 현실적인 말씀이십니까?

(8)상수불학원(常隨佛學願)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라.

      한국불교대학은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9)항순중생원(恒順衆生願)

    -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중생을 포용해야 한다.

(10)보개회향원(普皆廻向願)

    -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 공덕을 혼자 갖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라.


이것이 보현보살의 10대원인데 이는 바로 우리들의 願입니다.

보현보살님을 통해 우리들의 원이 표출됐을 뿐, 오늘날의 우리들이 실천해야 될 덕목이고 원이고 부처님께서 원하신 그 원이다.

이 보현보살 10대원을 항상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원을 갖도록 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을 가질 때 힘이 납니다.

원력(願力)이라는 말이 있죠?

원은 원으로써 멈추는 게 아닙니다.

원을 꿰차면 그 원이 신비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 행동을 변화시키고, 내 모습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원력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원은 모두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 원력이 되기까지는 항상 원을 자꾸 세우셔야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보현보살 10대원을 늘 염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어요?


#부처님의 마음#

그리고 세 번째 신심의 각도는 부처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겁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하지요?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 즉 끝없는 사랑하는 마음()이요,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끝없는 마음()이요, 여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마음()이요, 차별 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입니다.


세 가지의 바른 신심을 통해서 부처님을 항상 만나고 부처님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또 그 가르침을 현실화하는 데 참 불자님, 올바른 불자님이 되어주시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송 한 마디를 읽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此法會 功德으로 願四生 六道가 光弼 三寶力 하야 速得 大解脫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오늘 법회에 참여하신 공덕으로 해서 불보살님의 가호를 많이 받아서 모두가 이상세계, 열반의 세계에 완성하는 그런 원을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하면서 끝을 맺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주지스님을 지도자로서 잘 이해하시고, 그 가르침을 잘 받드는 불자님이 되어주십시오. 아시겠죠?

감사합니다()


스님께서는 감기에 걸리셨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편안한 음성으로, 바른 믿음의 중요성과 그 실천방법을 논리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설법해 주셨다.

법문 도중에 수차례 터져 나온 박수는 스님 법문이 우리 신도님들과 얼마나 큰 공감대를 형성 하였는지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오늘 모인 모든 분들로 하여금 우리 부처님 법에 대해, 우리 절에 대해, 우리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해 준 귀한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4월 29일 (화) 오전 11시  강부자보살님(탤런트) 특별법회가 있습니다.

 

<<법회 후 우리절 탐방에 나서신 모습>>

  - 회주큰스님의 소개로 성타스님께 절 올리는 우리절 대중스님들 -

 

  - 우리절 역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들여다 보시며 -

 

   - 삼보전 곳곳을 꼼꼼히 둘러 보시는 중 -

 

    - 하늘법당에서의  기념촬영 -

     - 도서관의 방대한 책들을 보시며 감탄하시는 모습 -

 

    - 우리절 유아원, 유치원에 큰 관심을 보이시며 -

 


출처 : 불교인드라망
글쓴이 : 관음안(칠곡)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