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본적은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춘성>(새싹)
불교연구자 김광식, 무애도인 삶 이야기 <춘성> 펴내 / 이종찬(2009.03.17)
걸망에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팬티 하나 달랑 남긴 채 이 세상을 헌 짚신짝 내던지듯이 툭 던져버린 스님이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 상좌로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던 백용성(1864~1940,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과 함께 <화엄경> 사상을 펼쳤던 화엄법사이기도 한 스님. 그가 바로 무애도인 춘성 스님이다.
춘성(1891~1977)은 근,현대불교가 자리를 뒤바꾸는 꼭지점에서 경찰이 출생지가 어디냐고 묻자 "내 출생지는 우리 어머니 *지야"라고 말 할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원색적으로 툭툭 내던지는 괴짜(?) 승려였다. 스님은 땡겨울에도 본인은 물론 수행자들에게 이불을 주지 않고 냉방에서 자게 하는 고집스런 승려로도 악명(?)이 높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던 우리시대 참 자유인 춘성 스님. 이미 입적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러 불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춘성 스님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또 있다. 다 아시다시피 춘성 스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건네준 분이다.
그때 만해 한용운 스님이 쓴 '조선독립의 서'가 <독립신문>에 실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춘성은 만해 옥바라지에 얽힌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만해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한 뒤 만세 삼창을 하다가 서대문 감옥에 갇히자 춘성은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망월사에 머문다.
춘성은 이때 망월사에서 추운 땡겨울인 데도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다. 그리고 차디 찬 방에서 참선을 하며 밤을 지새운 뒤 서대문을 들락거렸다. 그때 망월사를 들렀던 한 스님이 땔감이 절에 가득 쌓여 있는 데도 냉방에서 자는 것이 이상해 춘성에게 묻자 "스승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제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겠습니까"라고 내뱉었다.
지하 우물 속에 묻혀 있었던 춘성을 지상으로
"지금 불교계를 비롯한 세상은 허위의식, 엉터리 수행자가 횡행하고 있다. 직업 수좌, 벙어리 수좌, 법문이 사라진 선방, 선지식을 찾지 않는 간화선 수행이 불교를 대표하고 있다. 승려는 있으나 인간은 찾아볼 수 없는 불교가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이 시절에 춘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지성의 문제를, 이 시대 불교의 문제를 비추어 보길 기대한다" -'펴내는 말' 몇 토막
지금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불교 연구자 김광식(부천대) 교수가 만해 한용운 스님 제자인 춘성 스님 사상을 그려낸 무애도인 삶 이야기 <춘성>(새싹)을 펴냈다. 이 책에는 방석 두 개로 잠을 자고, 옷 두 벌도 없었고, 신도들 대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돈이 생기면 남을 다 줘 버리는 춘성 스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제1부 '춘성일대기'에 실린 '탑골공원에서 만난 무애도인' '만해를 만나 머리를 깎다' '달마는 왜 서쪽에서 왔는가' '돌장승이 아이 낳는 도리', 제2부 '내가 만난 춘성'에 실린 혜성, 우송, 혜광, 수경, 명진, 진관 스님 등이 쓴 이야기, 제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에 실린 '아이 똥이 부처님' '육영수 여사와의 인연' '종정이 될 뻔 했던 춘성' 등 50여 편이 그것.
김광식 교수는 "춘성은 깊숙한 선방의 지대방에서 이따금씩 단골메뉴로 나오는 큰스님, 도인에서도 이탈되었다"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다만 춘성문도회의 근거 사찰인 성남 봉국사(주지 효림)에 있는 단아한 비석과 부도만이 그의 존재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지상과 인터넷에서는 그가 남긴 정신, 사상, 일화, 비화 등이 정착할 주소도 모른 상태로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 책은 지금껏 지하의 우물 속에 묻혀 있었던 춘성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첫 번째 마중물"이라며 "수행자들의 명리탐닉을, 더 많이 가지려는 한없는 재산 축척을, 어디로 가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불건전한 지성의 탐험 등을 여기에서 중단케 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춘성이라는 강한 저울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만해에게서 자주 독립을, 만공에게서 선법을 배우다
"춘성은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온 산하가 그의 집이고 수행처였다. 그 무렵 춘성은 망월사에 들러 수행하였다. 춘성과 망월사와의 인연은 깊디깊은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춘성은 망월사에서 지독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망월사 뒤에 있는 바위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에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였다" -82쪽
춘성은 이때 얼마나 깊은 수행에 들었던지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는 줄도 몰랐다. 이 때문에 춘성은 인생 끝자락에 손톱과 발톱이 썩기도 했다. 이렇게 17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죽음을 코 앞에 둔 끝에 관음보살을 만났다고 하니, 그 수행이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춘성이 이렇게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두 스승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춘성은 두 스승을 두는데, 그중 한 분은 만해요, 다른 한 분은 만공이다. 춘성이 만해에게서 자주적인 독립의식을 배웠다면 만공에게는 선법을 배웠다. 춘성은 그 때문에 만공이 입적한 뒤 수법(受法) 제자로도 공인되었다.
1982년 만공문도회에서 펴낸 <만공 법어> 끝자락에는 수법제자 법명이 나온다. 모두 37명이 올라 있는 이 책에 춘성이란 이름이 당당하게 들어 있다. 하지만 춘성은 은상좌(恩上座)가 아니라 참회제자라고 썼다. 이를 볼 때 경허, 만공으로 이어진 참다운 선법을 누가 올곧게 계승, 실천하였느냐를 가름할 수 있다.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지 속이지" "본적이 어디입니까?"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신두(腎頭)이지" 경찰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본적을 말해요, 본적이 어디냐고요?"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경찰은 기가 차듯이 웃고 말았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남성의 상징을 자신의 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경찰은 애써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지 속이지" -112쪽
이 이야기는 춘성이 망월사 불사를 할 때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나눈 이야기다. 이때 하도 어이가 없었던 경찰은 더 이상 조사를 할 수가 없어 나무를 벤 까닭이라도 들어보기 위해 춘성에게 묻는다. "이 스님! 이상한 스님이구만. 그러나 저러나 스님 산에 있는 나무는 왜 베었습니까?"라고.
춘성은 경찰에게 "그거야 산에 널브러져 있는 죽은 나무를 절로 가져와서 절이 쓰러질 형편이니 요긴하게 쓸까 해서이지. 그건 그렇고 경찰 양반 내 말이나 들어보슈. 이 우주가 감옥이요 감옥! 우리들이 날마다 감옥 속에서 헤매고 있지 않나...나 같은 늙은이 잡아가는 것보다 이 순간에도 큰 도둑질 하는 놈들이나 잡지 뭐하고 있어!"라고, 오히려 호통을 친다.
이는 자비와 구원을 위해 나무를 절로 가져 온 것을 실정법으로 다스리면 모든 성자들이 전과자가 된다는 그 말이다. 춘성은 그렇게 경찰에서 풀려난 뒤 상좌와 수좌들이 별일이 없었느냐는 물음에도 "내가 망월사 주인이다. 주인이 내 나무를 베었는데, 뭐 벌 줄래? 그래 내가 베었다. 뭐 잘못되었느냐?"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춘성은 그 뒤부터 나무로 법당을 지으려 하지 않고 돌로 지으려 했다. 최신식을 좋아하는 멋쟁이 수좌였던 춘성은 법당을 돌로 지어야 불이 나더라도 돌로 된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여겼다. 상좌와 수좌, 신도들이 법당을 돌로 짓는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고 반대했지만 춘성은 기어이 돌로 된 법당을 지었다.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 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답을 하였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 목소리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후래쉬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397쪽)
춘성이 내뱉은 배꼽 잡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청와대로 들어가자 육영수 여사가 춘성을 청와대에서 열린 생일잔치에 초대했다. 육여사 자신의 생일잔치에 와서 좋은 법문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춘성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장차관과 그 부인네들, 국회의원 등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춘성에게 그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춘성은 설법할 차례가 되자 법상에 올랐다. 하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자 장차관과 그 부인네들, 국회의원들이 은근슬쩍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 춘성이 주장자로 법상을 쿵!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 하고 *지에서 나온 날이다"라고.
춘성이 내뱉은 재미 난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목사가 하나님은 무소부재라 하는 말에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아이 똥이 부처님), 전도사가 주님은 부활했다는 말에 "뭐? 죽었다 살아난다고? 나는 여태까지 죽었다 살아난 건 내 자지 밖에 못 봤어"(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혼수에는 좆이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진관사 대웅전 상량식장에서) 등 숱하게 많다.
춘성 스님 부도와 비석이 있는 성남 봉국사 주지 임효림 스님은 "노스님을 생전에 지근에서모시고 수행했던 선객들이나 신도들은 한결같이 천하제일의 도인이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라며 "불교사에서 이만큼 수행을 철저히 하시고 무애자재하신 도인인 춘성 노스님 같은 분이 현대사에서는 달리 없다고 하겠다"고 칭송했다.
글쓴이 김광식은 한국 근 · 현대 불교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부천대 겸임교수,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근대 불교사연구> <한국 현대 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용성> <한용운 평전> <아! 청담>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 <범어사와 불교정화운동> 등 15권이 있다. 법명은 만암(卍庵), 호는 지허(止虛).
춘성 -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 저자 김광식 | 출판사 새싹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 김광식의 『춘성 -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시 <님의 침묵>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만해 스님의 제자로서, 호탕한 법문으로 세상을 뒤흔든 진정한 선승 춘성 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열반에 든 춘성 스님의 삶을 문헌, 증언, 일화 등을 통해 복원해내고 있다. 그동안 소문, 전설, 신비 등으로만 여겨져온 춘성 스님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되어준다.
근ㆍ현대불교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자유인으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무수한 보살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끈 큰스님으로서의 모습도 생동감 있게 담고 있다.
또한 불교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도 실었다. 특히 서대문 감옥에 갇힌 만해 스님에게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 그것이 「독립신문」에 실리도록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보에 전달하게 한 사람이 바로 춘성 스님임을 밝힌다. .
| 소개 |
춘성(1891~1977)은 근대불교, 현대불교의 격랑의 중심지에서 승려로, 수행자로, 망월사 주지로 그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한용운의 상좌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경』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하였던 화엄법사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였던 고집스런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 회상에서 지독스럽게 참선 수행을 하였던 간화선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하였던 어른으로, 서울 시내의 저자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원색의 언어로 전하였던 스님으로, 수많은 보살들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끌었던 큰스님이었다.
춘성 스님의 걸망에는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빤스 하나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 무소유의 실천자 였다.
또한 서대문 감옥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케 한 장본인으로써, 「조선독립의 서」가 『독립신문』에 게제 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서평 |
만해 한용운의 제자 / 진정한 선승, 호탕한 법문으로 세상을 흔든 큰스님
춘성은 위와 같은 도인, 선지식, 큰스님이었지만, 그간 그의 유언,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는 분부로 인해 춘성에 대한 정리, 소묘 등은 지금껏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미답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춘성문도회는 춘성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어, 그의 입적 4주기가 되던 해인 1981년에 그가 마지막으로 주석하였던 봉국사(성남)에 부도와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최근 봉국사 주지로 효림 스님이 취임하면서, 춘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문도회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문도회에서는 춘성 스님을 다시 찾는 작업의 작가로 김광식을 지명하였다.
춘성 스님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의뢰받은 김광식(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부천대 겸임교수)은 한용운 평전, 백용성 평전을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 현대 불교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 작업을 한 이 분야의 최고 학자이다.
김광식은 지난 2년간 춘성에 대한 문헌자료 검토, 분석을 수행하면서 춘성과 인연이 있는 스님, 재가자 등을 찾아 춘성에 대한 증언을 채록하였다. 그리고 춘성에 대한 수많은 일화도 함께 채록하였다. 김광식은 이 같은 치열한 작업의 바탕에서 "1부 ; 춘성 일대기, 2부 ; 내가 만난 춘성, 3부 ;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대작불사를 완수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 이 책은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아무도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찾을 수도 없었고, 그렇지만 반드시 복원시켜야 하는 큰스님인 춘성에 대한 전모를 오롯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춘성 찾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춘성 당신이 자신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아 춘성의 실제 행적이 불균형한 것, 춘성 찾기가 늦음으로써 그에 대한 증언이 그의 후대에 머무른 것, 춘성의 수행과정에 대한 자료가 소략한 것 등을 말한다. 이런 문제는 후학, 문도회 등이 지속적으로 고민할 과제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춘성에 대한 종합적인 탐구는 이제부터 본격화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간 소문, 전설, 신비, 과장 등으로만 점철된 춘성의 생애를 문헌, 증언, 일화로 통해 복원시켰다는 의미에서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춘성의 진면목에 다가설 수 있는 토대를 굳건하게 마련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운수납자의 진정성, 불교 지성, 참선 수행, 수행자의 진면목, 불교 독립운동의 정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의 글 |
춘성 스님은 저희들에게 뚜렷하게 교육을 하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스님의 하나하나의 모든 행동 자체가 그냥 가르침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말로 하시는 것보다는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 혜성 스님 | 봉국사 회주
그 어른이 살았던 행적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어. 꺼지지 않는 불길이지. 춘성 스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거기에 뜻이 있어요. 내 평생 그런 인상을 받은 분이 없어요. 저는 금오 스님도 모셔 보았고, 그 밖에도 전강, 동산, 설봉, 향곡 스님도 모셔 보았지만, 그런 인상은 받지 못했어요. - 우송 스님 | 덕숭총림 수덕사 유나
큰스님들은 대부분 독방 쓰면서 잘 살고, 신도들 대접을 잘 받았지만, 춘성 스님처럼 큰방에서 살았고, 방석 두 개로 잠을 자고, 옷 두 벌도 없었고, 신도들의 대접에는 신경도 안 쓰고, 돈이 생기면 남을 다 줘버린 경우는 그 당시에 없었다고 한다. -수명 스님 | 용인 서광사 주지
망월사 춘성 스님 밑에서 제가 살았는데, 50년 동안 동산 스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봐 오면서 중 한사람을 꼽으라면 춘성 스님을 꼽겠어요. 아주 감동적이고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위대한 중이 있었어요. 봉국사에 가서 영정에라도 참배하세요. 그런 분입니다. -무비 스님 | 전 조계종 교육원장,『서장』 강의 중에서
베개를 갖고 잠을 자면,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납니다. 춘성 스님은 “이놈들아 목침 하나 갖고 자다가, 거기서 굴러 떨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정진을 해야지, 잠을 자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놈들아, 이 도둑놈아, 밥 도둑놈아!”라고 하셨어요. - 수경 스님 | 화계사 주지
제가 볼 때에 춘성 스님은 정진하는 수좌를 끔찍하게 아꼈습니다. 그리고 욕심도 없었고요. 다른 스님처럼 폼 잡고, 공부한 것도 없는데, 공부한 것이 있는 양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탈한 분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싸 갖고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 명진 스님 | 봉은사 주지
공부를 철저히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돈에 욕심이 없는, 아무것도 소유치 않는 것은 지금 스님들이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춘성 스님과 같은 그런 스님이 나올 수가 없어. 어쨌거나 돌아가신 큰스님들과 같은 그런 스님이 없어. - 진관 스님 | 진관사 회주
만해 용운께서는 // 산중 괴각(乖角)이시라 / 상좌도 딱 하나밖에 두지 않았다 / ……// 춘성 선사 // 만해 용운이 감옥에 갇혀 계실 때 / 만해의 독립이유서를 / 몰래 받아내어 /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에 / 보내었다 // …… - 고은 | 시인,『만인보』 25권(창비) 「춘성」중에서
춘성 스님이란 분은 신체도 걸출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의 공부 어디에 걸림이 없었어. 만약에 춘성 스님이 신라시대의 사람이라면 원효야. - 목정배 | 동국대 명예교수
엄홍길을 키워준 산은 바로 도봉산이다. 도봉산은 엄홍길에게는 또 하나의 어머니, 친구, 스승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도봉산을 제집 드나들 듯 오르내렸기에 그럴 만도 하다. - 이맹임 여사 | 산악인 엄홍길 모친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 447쪽. 1만5천원) [연합뉴스] 2009.03.09
=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맏상좌인 춘성(1891-1977) 스님의 일대기가 다양한 관련 사진을 덧붙이고 여러 인사의 회고담을 추가해 평전 형식으로 출간됐다.
'춘성-무애도인의 삶의 이야기'는 백담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 한용운 선생과 만나게 된 인연과 만해의 옥바라지를 위해 망월사로 절을 옮긴 일화, 이후 화계사에서 수행했던 춘성 스님의 일대기를 간략히 소개하고, 사회 저명인사들이 모인 법회에서 욕설을 섞어 법문하거나 걸핏하면 거지에게 양복을 벗어주는 등의 여러가지 기행을 통해 '활달자재(豁達自在)'한 그의 면모를 전한다.
아울러 명진ㆍ수경ㆍ진관 스님과 고은 시인 등 21명의 인사가 각각 한편씩 그를 회고해 쓴 글을 실었고 말미에는 춘성 스님의 일화로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를 모았다.
“걸출하고 막힘 없던 춘성스님, 신라때 태어났다면 딱 원효” [문화일보] 2009-03-09
“제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데 붙잡혀 지금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그 제자인 제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만해 한용운의 상좌이자 근·현대 불교사에서 ‘자유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춘성(1891~1977) 스님. 그는 스승이 감옥에 가자 그 뒷바라지를 하며 땔감이 절에 가득한데도 한겨울에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자며 수행을 했다.
전설처럼 그 행적이 전해지고 있는 ‘우리시대에 환생한 원효’ 무애도인(無碍道人) 춘성 스님의 일대기가 처음 정리돼 나왔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가 그것이다.
김 교수는 “불교와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이 시절에 춘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지성의 문제와 불교의 문제를 비추어보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냈다”고 말했다.
춘성 스님은 입적 전에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고 했다. 그로 인해 그에 대한 평전이나 삶의 기록물이 이제껏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가 워낙 크다보니 춘성 스님의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전설처럼 떠돌았다. 더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억조차 사라질 판이다. 김 교수는 “절박한 심정으로 춘성 스님의 자료를 모았다”며 “인터뷰에 응해준 춘성문도회 스님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춘성 스님은 갖가지 기행(奇行)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설법을 했던 ‘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행에 있어 만공 스님의 제자로서 뛰어난 선승이었다.
김 교수는 “한용운의 상좌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경’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하였던 화엄법사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였던 고집스러운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 회상에서 지독스럽게 참선 수행을 하였던 간화선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하였던 어른으로, 서울 시내의 저잣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원색의 언어로 전하였던 스님으로, 수많은 보살들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끌었던 큰스님”이라고 정리한다.
춘성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 때 당시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하니 춘성을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었다. 나중에 육 여사의 생일에 청와대로 초청을 받아 고관대작들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됐는데 춘성은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내리치며 일갈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XX에서 나온 날이다.”
어느날 통금시간이 넘어 밤길을 가던 춘성에게 순경이 “누구요?”라고 물었다. 춘성은 “중대장이다”라고 즉각 답했다. 순경이 다가와 “아니? 스님 아니시오!”라고 알아보자 춘성은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했다.
책은 1부에서 ‘춘성 일대기’, 2부에서 그를 회고하는 사람들의 ‘내가 만난 춘성’, 3부에선 ‘일화로 만나는 춘성’을 기록하고 있다. 진관사 회주인 진관 스님은 “공부를 철저히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돈에 욕심이 없는, 아무것도 소유치 않는 것은 지금 스님들이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춘성 스님과 같은 그런 스님이 나올 수가 없어”라고 춘성 스님을 회고한다.
춘성은 여든이 넘어서도 선방에서 제자들과 수행을 했다. 그는 이불을 덥지 않고 자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주석한 망월사에는 아예 이불이 없었다. 그는 이불을 ‘이불(離佛)’이라고 해서 부처와 이별하는 물건이라 불렀다. 잠을 잘 시간을 아껴 수행하라는 것이다.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은 “베개를 갖고 잠을 자면,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납니다. 춘성 스님은 ‘이놈들아 목침 하나 갖고 자다가, 거기서 굴러 떨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정진을 해야지, 잠을 자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놈들아, 이 도둑놈아, 밥 도둑놈아!’라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는 “그 분은 신체도 걸출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의 공부 어디에 걸림이 없었어. 만약에 춘성 스님이 신라시대의 사람이라면 원효야”라고 춘성을 평가했다.
춘성 스님 “나, 중(僧)대장 이다” [경향신문] 2009-03-11
ㆍ만해의 유일한 제자 ‘욕쟁이 스님’ 춘성 평전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붙잡았다. “누구요?” “중대장이다.” 경찰관이 플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니라 스님이었다.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근세에 가장 파격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스님을 꼽으라면 단연 춘성(春成·1891~1977) 스님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고 한 춘성의 생전 뜻 때문에 그의 생애는 소문과 전설로만 전해져 왔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의 삶의 이야기>(새싹)는 문헌, 증언, 일화를 통해 처음으로 춘성의 생애를 정리한 평전이다. 책은 1부 ‘일대기’와 2부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돼 있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인 춘성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만해 스님을 모시던 춘성은 스승이 1919년 3·1 운동으로 수감되자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 도봉산 망월사로 옮겼다. 그는 망월사에 땔감이 가득한데도 스승을 생각해 추운 겨울에 불을 때지 않은 냉골 방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자며 수행을 했다.
만해 스님이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의 서’를 세탁물 속에 숨겨 몰래 빼내 ‘독립신문’에 실릴 수 있게 한 이도 춘성이었다. 백용성 스님 밑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춘성은 <화엄경>을 거꾸로도 외울 정도로 해박했다. 그는 나이 49세에 수덕사 만공 스님을 찾아가 3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참선 정진한 선승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해, 용성, 만공의 가르침을 다 받은 셈이다.
그러나 춘성의 진면목은 갖가지 기행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행한 호탕한 설법,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춘성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 춘성은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었다. 육 여사는 자신의 생일에 청와대로 춘성을 초청했다. 고관대작들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된 춘성은 주장자로 법상을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XX에서 나온 날이다.”
춘성이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경찰이 주소를 묻자 “우리 엄마 XX다”라고 대답했다. “본적은?” “우리 아버지 XX다.” 이렇게 춘성은 원색적인 욕을 잘 해서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춘성의 그 욕은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 시대의 공안”이라고 평가했다.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는 “신체도 걸출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의 공부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다”며 “만약에 신라시대 사람이라면 원효”라고 말했다.
그는 시내에 갈 때는 양복을 입고 영화 관람도 즐겼다. 걸인을 만나면 입은 옷을 훌훌 벗어주고 팬티 바람으로 절까지 걸어오곤 했다. 춘성은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석한 망월사에는 아예 이불이 없었다. 그는 ‘걸망에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빤스 하나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등 후학들은 ‘자유인’으로 살다간 춘성의 다비식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을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불교와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이 시절에 춘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지성의 문제, 불교의 문제를 비추어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갈 때도 무(無)! 올 때도 무! 항상 무 하세요" [조선일보] 2009-03-11
만해의 제자 춘성 스님 일대기 정리한 평전 나와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 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중대장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경이 플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이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춘성(春城·1891~1977) 스님이다. 법문 때에도 거친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헐벗은 이를 보면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주는 등 기행(奇行)으로 잘 알려진 춘성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평전이 나왔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이다.
1부 〈일대기〉와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전하는 2부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책을 보며 만나는 춘성 스님은 스승인 만해 한용운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효심(孝心) 깊은 제자요, 이미 30대에 불교경전 공부의 경지에 이른 강사이자 당대의 선승(禪僧)이다. 그는 만해가 3·1운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에는 절에 땔감이 가득해도 "스승이 왜놈들한테 붙잡혀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시는데, 그 제자인 내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느냐"며 냉방(冷房) 생활을 자청하며 옥바라지했다. 옥중의 만해가 휴지에 적어 돌돌 말아 건넨 '조선독립의 서'를 감옥 밖으로 빼내 전국과 해외에까지 전파한 것도 춘성 스님이었다.
백용성 스님이 우리말로 번역한 《화엄경》을 설하는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30년대 들어서는 홀연히 서울을 떠나 수덕사를 찾는다. 당대의 선승 만공 스님을 찾아 투철한 참선 수행에 들었던 것이다. 이후 6·25 와중에도 도봉산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수행했던 그는 평소 목침을 베고 배에만 방석을 덮고 자면서 이불은 멀리했다. 일흔이 넘어서도 자신보다 스무살 젊은 성철 스님이 밤새 한번도 눕지 않고 좌선하는 것을 부러워했고, 만년에도 "갈 때도 무(無)! 올 때도 무! 똥 쌀 때도 무 하세요"라며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강조했다.
그는 입적을 앞두고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라고 묻는 후학에게 "필요 없다"고 했고, 다시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라고 묻자 "시X 놈의 자식! 신도 위해 사나?"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는 입적 후에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는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현 봉은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禪僧)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 자랑(?)을 벌였다고 한다.
불교와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아서 [강원일보] 2009-03-14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일한 상좌인 춘성스님은 은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 중 한 사람인 만해스님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은사가 차디찬 감방 생활을 하자, 춘성스님 또한 한겨울에도 자신이 기거하는 방에 불을 때지 않았다.
“스승이 왜놈들한테 붙잡혀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시는데, 그 제자인 내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느냐”며 냉방생활을 자청하며 옥바라지했다.
옥중의 만해가 휴지에 적어 돌돌 말아 건넨 ‘조선독립의 서’를 감옥 밖으로 빼내 전국과 해외에까지 전파한 것도 춘성 스님이었다.
법문 때에도 거친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헐벗은 이를 보면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주는 등 기행으로 잘 알려진 춘성(1871∼1977)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평전이 나왔다.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인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447쪽. 1만5천원)’는 다양한 관련 사진을 덧붙이고 명진 수경 진관 스님과 고은 시인 등 21명의 인사가 각각 한 편씩 그를 회고해 쓴 글을 실었고 말미에는 춘성 스님의 일화로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를 모았다.
인제 용대리 백담사 인근에서 태어난 춘성스님이 만해 한용운 선생과 만나게 된 인연과 만해의 옥바라지를 위해 망월사로 옮긴 일화, 이후 화계사에서 수행했던 춘성 스님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다.
1부 ‘일대기’와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전하는 2부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책을 보며 만나는 춘성 스님은 스승인 만해 한용운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효심 깊은 제자요, 이미 30대에 불교경전의 경지에 이른 강사이자 당대의 선승으로 활달자재한 그의 면모를 전한다.
춘성 스님은 11세 때 백담사에서 출가를 했고, 한때 설악산 신흥사 주지도 역임했다.
김광식 교수는 “불교와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이 시절에 춘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지성의 문제, 불교의 문제를 비추어 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애 선승 춘성 ‘거침없는 무소유’ [한겨레] 2009-03-17
알몸 드러낸 선지식의 삶 / 지인들 증언 담아 오롯이
춘성(1891~1977)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춘성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춘성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물었다. “부처님도 없는 데가 없느냐?” “없는 데가 없지!” “그러면 부처님도 똥통 속에 있겠네?” “똥이 부처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
<춘성>(새싹 펴냄)에 나오는 일화다. 일화 그대로 거칠 것이 없는 무애도인으로 선승들의 지대방에서 늘 회자되던 <춘성>의 삶을 저자 김광식 박사는 그와 인연 있던 이들의 세세한 증언을 통해 되살려냈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던 춘성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선지식이었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맥주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켜고 영화관에 드나들면서도 절에서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수행자였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이불을 덮지 못하게 하며 오직 수행 정진했고, 오직 옷 한 벌 외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래서일까. 선(禪)-교(敎)를 함께 절차탁마하며 현대의 고승들과 함께 수행 정진했던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은 “목에 총을 들이대고, 선지식 한 명을 고르라면 춘성 스님을 꼽겠다”고 했다.
또 60년대 도봉산 망월사에서 6년간 춘성을 시봉한 뒤 많은 선지식을 봐온 서광사 주지 수명 스님은 “근래에 우리가 말하는 큰스님들은 제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은 대접을 받고, 독방에 보약을 쌓아 놓고서 사셨지만 춘성 스님은 평생을 독방에 가지 않은 채 대중들과 똑같이 큰방에 살며 수행했다”고 전했다.
어디를 가나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도량석을 할 정도로 자신에겐 철저했던 춘성은 대중들에겐 자비보살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지였던 도봉산에 등산 와 위험한 계곡에서 잠을 청하는 등산객들을 찾아다니며 “비가 와 계곡물이 불어나면 꼼짝없이 죽게 된다”며 절로 불러와 잠을 재우곤 했다. 또 아무런 격의없이 육두문자를 쓰면서도 마음이 동하는 법이 없었고, 남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숭총림 유나 우송 스님은 “수좌들이 스님 앞에 가면 거울 속에 내 속이 다 비치는 것 같아 앞에 가선 놀았다든가, 삐쳤다든가, 딴생각하고 있었다면 한없이 부끄럽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노장(춘성)님 앞에선 딴짓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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