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교육원장 암도스님 |
“머리가 아닌 상대의 가슴을 움직여야 포교가 된다.” 청중의 근기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매일 화두가 바뀐다’고 할 정도로 법문준비에 정성을 쏟는 암도스님. 벌써 고희를 지냈다. “칩거한다고 들어온 사람이 돌아다니면 남들이 웃잖아. 수행? 굉장한 것 같아도 거짓말 안하면 되는 거야. ‘정견’이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제일 부정직한 거잖아. 여든살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낼 모래 어떻게 될 줄 알아. 마하무량사 이름에 맞도록 수행하면서 살아야지.”
부모 자식 사이처럼 이웃 대하라
“복도 받으려면 먼저 지어야지. 간단해. 기도도 하고 좋은 인연을 자꾸 쌓아가야지. 육바라밀이지. 자비보시로 지계정청으로 복을 짓는 거야. 남을 상대할 때 부모가 자식 사랑하듯이 조건 없이 주는 것, 자비심 갖고 보시하는 것이지. 계를 지킨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자기 행복을 위해 지키는 것이야. 건강해야 복도 지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기본이 오계에 다 들어있어” 스님은 유교에서의 선으로서의 덕목인 ‘오상(五常)’을 예로 들었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도 바로 오계의 실천덕목이야.” 수십 년 포교하다 보니 이런 대기설법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스님은 생애 첫 법문을 1977년 한 교육대학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때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와 같은 자리였다. “그 어른이 먼저 강의하고 내 차례인데 이론적으로도 기가 죽어서 안 되겠어. 그래서 중노릇하던 얘기 해버렸어. 그런데 박수가 쏟아져 나오더라고.”
암도스님은… <학원>지에 낸 소설이 입선하는 바람에 ‘소설가’ 별명을 달고 다녔고 기자가 되고 싶어 속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신문배달을 하며 다져진 체력이 바탕이 되어 군복무 시절에는 태권도 교관까지 할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가난에 대한 고뇌는 한 집안의 ‘장남’을 결국 산으로 향하게 했다. 서옹스님 이외에 은사를 두 분 더 만나는 인연이 됐다. “4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며 부모를 속이고 재출가 했다. 화순 용암사에서 지금의 은사인 원로의원 천운스님(대흥사 조실)을 만났지만 다시 백양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비구-대처 분규가 심한 시기. 훗날 태고종 종회의장을 역임한 월하(月河)스님을 잠시 은사로 모시기도 했다. 스님 표현대로 “기구한 세대”다. “비구-대처 싸움 통에 희생된 사람들”중이 하나 인 셈이다. <사진> 법문일정만으로도 공간을 찾아보기 어려운 스님의 수첩, 법문 회수가 6000회를 넘은지 오래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강단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제2대 교육원장 소임을 마친 후에는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 운문암 선방에서 세 철을 나고 청량암에서 정진한 후 이달 초 담양에 조성한 새 도량 마하무량사(성모사)에 주석하고 있다.
- 이상은 불교신문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 |
선생님..작가님...에서 선생, 작가란 뜻은 단독으로도 사용가능하다. 그럼 스님의 "스"자는 왜 생긴걸까 ?
간단히 말하면 '스님'의 '스~'는 '스승의 준말'이다. 그래서 스님의 의미는 '스승님'이지만, 그 본뜻은 '만인의 스승이 되실 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스님을 중이라고 많이들 부르는데, 중과 스님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 보면, 하나로 그러한 단체를 이르던 말임. 법신(法身). 불자(佛者). 사문(沙門). 승(僧). 승가(僧伽). 승려. 높임말은 '스님'. 으로서 4인이상의 모임, 후에는 3인이상의 무리로 바뀌었다. 즉 대중(大衆)이라는 뜻이였다. 줄여서 '중'이라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스님의 낮춘 말'쯤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중의 본래적 의미는 '대중(大衆)'이다. 국어 사전의 사전적 의미로서 '스님'이란? 2.<중>의 높임말. 衆生)이라고 했다. 즉, '위(먼저)로는 보리(깨달음)를 구하고, 아래(나중)로는 중생을 구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먼저 수행을 통해 보리을 얻고, 다음으로 교화활동을 통해서 모든 중생을 건짐으 로서 불국정토를 건설하는 큰 스승이 되는 것을 본분으로 함으로 '스님'(스승님)으로 불리어 지게 된 것이다. 이 아닙니다. 왕이 자기 자신을 왕이라 하지 않고 짐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반 신도 나 아래 사람이 부를 때는 '스님'이라고 해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 대중(大衆) 에는,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르셨다’거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祈園精舍)에 계실 때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쓰는데, 사부대중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출가하였거나 출가하지 않은 남녀 신도 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대중은 출가 여부에 관계없이 부처에게 귀의한 신도들을 가리 키는 말이다. 상좌부(上座部)라 하고, 모든 중생이 평등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보적인 생각 을 하는 부류를 대중부(大衆部)라 하였다. 대승불교는 이 중 진보적인 수행자들의 부류인 대중부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변하여 개성이 없는 개인을 가리키거나, 계층적으로는 특권층에 대한 일반서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cafe.daum.net/daewonbuddha10 의 글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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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량사
내려다 보이는 곳은 담양 읍내
맑음에 대하여...
성암도 큰스님
60년대 초반,
어린 초등학생과 팔팔한 청년의 만남이었었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암도스님과 말씀을 나누고 마당에 내려서니 담양 땅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멀리 왼쪽부터 불태산, 삼인산, 병풍산, 용구산이 차레로 도열한 모습이다.
답양읍내에 서 있는 오층석탑에 지는 노을
때는 60년대 초반.
"야 ~ 앗 ~~~ "
적막한 절간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기합 소리.
스님네들이 무예를 수련하느라 주먹을 내 지르고, 하늘을 붕붕 나는 모습을
초등학교 저학년 쯤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우화루 문턱에 턱을 괴고 엎드려
침을 삼켜가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 많은 스님네 중에서도 유독 아이의 눈길을 끄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암도스님'이라 칭 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열혈 청년 스님.
집에 돌아온 어린아이는 나무를 깎아 새끼를 칭칭 동인 다음,
아래쪽을 땅에 묻고서 냅다 주먹을 내 지르기 시작한다.
정권이 부어오르고,
나중엔 아예 감각이 없을 때까지 지르고 또 내 지른다.
군용 더불백을 구해다가 모래를 채우고 고리를 걸어 높이 내 건 다음
발차기를 시작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마당 한 구석,
그 아이는 아직도 내내 발차기를 멈출 줄 모른다.
퍽, 퍽, 퍽 ~~~
그러던 어느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이의 눈에,
당시 힘이 장사로 소문이 자자했던 백양사의 어떤 스님이 암도스님을 업고가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일인가 싶어 달려나가 알아본 즉,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뛰는 이른바 경공술을
수련하다 복숭아뼈를 다치게 되었단다. 피가 철철 흐르고 많이 아플텐데도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눈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 번은 백양사의 스님네 들이 아이의 집에 단체로 몰려와 무슨 항의를 하는 것 같았는데,
빙 둘러서 열을 올리고 있는 스님네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암도스님 왈,
"뭐, 별것도 아닌 것이로구먼...."
.
.
.
그로부터 세기도 바뀌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이천구년 오늘,
위에서 얘기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때의 어린아이가,
그 팔팔하고 붕붕날던 "암도스님"전에 삼배를 올리고 있다.
눈을 들어 그 옛날 청년 시절의 모습과
, 지금 내 앞에 앉아계신 모습을 오버랩 시켜가며 암도 스님의 모습을 살핀다.
"............. !"
칠십객이면 노인이 분명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내 눈엔 노인으로 접수가 되질 않음은 무슨까닭일까...?
사하촌, 유일한 미션계 집안에서 성장하다보니,
오로지 요단강 건너 어드메에 있었다는 '바이블'에 나오는 예기만이 세상의 전부요,
기타 모두는 사탄의 대상일 뿐, 그 중에서도 다른 피조물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스님이라 불리운다는 암도스님께 삼배를 드렸다.
내심, 일배냐? 삼배냐? 를 놓고 잠시 방황했으나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면 되고,
담양의 '마하 무량사'에 왔으면 절집의 부처님 세계에 동화되면 그뿐.
설법의 대가였다는 '부루나 존자'.
이 시대의 진정한 부루나 존자라 일컫는다는 '암도스님'
스님과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다 보니, 너무도 상대를 편안케 해 주시는 배려에
그저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청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
옛 시절의 추억담에서 부터 시작하여, 당신이 공부해 오신 과정과 인생역정.
오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내일에 대한 지혜에 이르기까지,
입춘의 문턱에 너무도 어울리는 말씀과 지혜를 주고 계셨다.
기실, 세심원에서 만난 '이현석'처사를 통하여 암도스님의 소식과 거처를 알게되었고
청담을 대동, 겨울비와 함께 오늘 이 곳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스님의 속가 이름과 내 이름이 똑 같은게 아닌가!
이것도 범상찮은 인연...?
저녁 공양 시간이 넘도록 스님을 붙잡고 있음에 죄송한 마음으로 일어서는데
기어코 저녁을 먹여 보내신다고 공양간으로 이끄셔서 황송하기 이를데 없었다.
공양을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벌건 저녁 노을이 담양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산에 대한 스님의 해박함에 귀를 바짝 세운다. 절 뒷쪽 산을 가리키시면서,
"이게 곡성 '설산'에서 부터 이어져 온 능선이야"
산꾼의 귀가 번쩍 하는 건 당연,
"언제고 날을 한 번 잡아 설산에서부터 출발, 괘일산을 거쳐 이 곳까지 와 봐야지...."
온통 대숲이었던 자리를 걷어내고 진행되어가는 불사에다
왕성한 포교활동까지 늘 빽빽한 일정임에도 불구하시고,
속가의 이 잡인을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보듬어주셔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뿐.
.
.
.
스님 늘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 茶泉 - 합장
● 2009. 2. 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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