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화(普賢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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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억속의 암도 스님

보현화 2010. 2. 22. 19:51

 

전 교육원장 암도스님

 

“머리가 아닌 상대의 가슴을 움직여야 포교가 된다.” 청중의 근기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매일 화두가 바뀐다’고

할 정도로 법문준비에 정성을 쏟는 암도스님. 벌써 고희를 지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지어야지”

가는 곳마다 쉽고 재미있는 법회를 이끌어 ‘설법의 달인’ ‘이 시대의 부루나 존자’로 불리는 조계종 전 교육원장 암도스님이 최근 거처를 옮겼다. 1999년 1월말 교육원장을 끝으로 종단이 소임을 모두 놓고 백양사 청량원에 주석하며 전국을 누비며 ‘행복법문’을 계속하던 스님이 전남 담양에 새 도량을 마련한 것. 새 도량은 지난 6일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종스님을 모신 가운데 삼존불 봉안하고 개원식을 봉행한 담양읍 남산리 82번지 남촌마을 성모사(聖母寺). ‘대성자모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개원했지만 앞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신 도량으로 ‘마하무량사’로 가꾸어 갈 계획이다.

“칩거한다고 들어온 사람이 돌아다니면 남들이 웃잖아. 수행? 굉장한 것 같아도 거짓말 안하면 되는 거야. ‘정견’이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제일 부정직한 거잖아. 여든살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낼 모래 어떻게 될 줄 알아. 마하무량사 이름에 맞도록 수행하면서 살아야지.”

지난해 고희를 넘긴 스님이 혹시 대중법문을 그만두려는 생각인가 했지만 걱정할 일은 아닌듯했다. 첫 출가인연도 있고 최근에 머무른 던 백양사도 있지만 스님이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다.

“아침에 나갔다 늦게 돌아오는 일이 많으니 대중생활을 제대로 못해. 너무 돌아다녀 대중들에게 미안하잖아.” 스님은 요즘도 한 곳에 삼일을 머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다. 정기법문 외에 2, 3일에 한 번꼴로 법문을 나간다. 수첩은 더 이상 메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법문일정으로 빼곡하다.

“이미 해탈할 나이인데 힘이 없으면 해탈이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보아 새 도량을 마련한 것은 정진에 더욱 힘을 쏟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건강과 수행이 부족하면 하고 이타행도 마음껏 할 수 없다는 생각일까. 스님은 여전히 ‘잘 살기 운동’.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웰빙’에 대한 법문을 자주한다. 우리 삶에 밀접한 소재를 중심으로 지혜의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가는 ‘생활법문’은 이런 식이다.

“계율은 세속에서 말하는 약속과 같은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는 약속이 결심입니다. 자기와 남과의 약속은 그대로 약속이지요. 좋든 싫든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이 법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마음에는 안정이 깃듭니다. 해탈(解脫)은 약속을 지키는 가운데 저절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견성성불도 곧 불국토 구현을 위한 길이니 일하면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 또한 불국토구현과 다를 것이 없다. 법문은 이런 식으로 쉽고 즐겁게 이끌어 가지만 실천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스님은 잘 안다. 그래서 스님은 “화두가 매일 바뀐다”고 한다. “법문 주제에 따라 화두도 달라져야 하잖아. 나는 수백 개를 들어야 돼” 듣는 사람은 즐겁지만 준비하는 법사의 노고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부모 자식 사이처럼 이웃 대하라

  조건없이 주고, 자비심으로 ‘보시’

  계를 지키는 것은 행복지키는 일

 

“복도 받으려면 먼저 지어야지. 간단해. 기도도 하고 좋은 인연을 자꾸 쌓아가야지. 육바라밀이지. 자비보시로 지계정청으로 복을 짓는 거야. 남을 상대할 때 부모가 자식 사랑하듯이 조건 없이 주는 것, 자비심 갖고 보시하는 것이지. 계를 지킨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자기 행복을 위해 지키는 것이야. 건강해야 복도 지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기본이 오계에 다 들어있어”

스님은 유교에서의 선으로서의 덕목인 ‘오상(五常)’을 예로 들었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도 바로 오계의 실천덕목이야.” 수십 년 포교하다 보니 이런 대기설법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스님은 생애 첫 법문을 1977년 한 교육대학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때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와 같은 자리였다. “그 어른이 먼저 강의하고 내 차례인데 이론적으로도 기가 죽어서 안 되겠어. 그래서 중노릇하던 얘기 해버렸어. 그런데 박수가 쏟아져 나오더라고.”

생활법문을 시작하게 된 동기일수도 있다. 법문도 강연도 감동을 주지 못하면 일회성에 그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경험을 포함해 자기의 모든 것을 활용하지만 항상 불교교리의 ‘핵’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내놓고 호소하면 감동을 줄 수 있어. 가슴을 열면 시원하잖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돼. 감화가 돼야 해. 나와 청중이 하나가 돼야 하잖아” 그래서 속에 있는 나쁜 가스가 다 나오도록 실컷 웃게 해주기도 한다. “머리를 설득하기 위한 설교는 일회성에 그쳐. 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감동과 감화의 법문은 한번 들으면 안 잊혀지지. 자기 인생을 털어놓더라도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켜야 해.”

스님의 이런 신념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75만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에서 육군훈련소 장병 1만5000명을 상대로 하는 법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비결은 ‘줄잡아 6000번이 넘는 법문’ 경험이다.

수첩이 그것을 말해준다. 처음엔 법문할 내용을 일일이 메모하며 준비했다. 종립학교 교사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교안을 작성하듯이 준비했다. 차츰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중엔 간단한 메모 정도로 법문을 할 수 있게 돼 지금 사용하는 작은 수첩은 법문 일정만으로 빼곡하게 차 있다. 스님은 그런 자신을 “한없이 돌아다니는 돌팔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도 길에서 열반에 이를 정도로 전법을 쉬지 않았으니 스님도 ‘부처님 팔자’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신은 “도(道)팔이에 불과하다”고 말을 줄인다.

스님은 세 시간이 넘는 대화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시류에 맞는 ‘웰빙법문’은 한마디도 못 꺼냈다고 아쉬워했다.

“한 생각 잘하면 한 평생 웰빙은 저절로 돼.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도 있잖아.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른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잖아. 사회가 정직하게 돌아가게 하려면 팔정도 중에 정견부터 잘 돼야 해.”

스님은 웰빙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은 다음 기회에 들려주겠다며 자리를 정리하고 도량으로 나서 비탈길 ‘축대’ 쌓는 일을 거들었다.



                   

암도스님은…
전국 다니며 포교하는 ‘부루나 존자’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 5학년인 13살 때부터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종단에서 운영하던 정광중학교에 진학, 원효스님 원광스님 등 고승들에 대한 책에 재미를 붙이는 한편 백양사 출신 교사들과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자연히 불교와 출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갔다. 17살 되던 1955년 백양사를 찾았다. 첫 은사는 서옹스님.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녀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밀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학원>지에 낸 소설이 입선하는 바람에 ‘소설가’ 별명을 달고 다녔고 기자가 되고 싶어 속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신문배달을 하며 다져진 체력이 바탕이 되어 군복무 시절에는 태권도 교관까지 할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가난에 대한 고뇌는 한 집안의 ‘장남’을 결국 산으로 향하게 했다. 서옹스님 이외에 은사를 두 분 더 만나는 인연이 됐다.

“4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며 부모를 속이고 재출가 했다. 화순 용암사에서 지금의 은사인 원로의원 천운스님(대흥사 조실)을 만났지만 다시 백양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비구-대처 분규가 심한 시기. 훗날 태고종 종회의장을 역임한 월하(月河)스님을 잠시 은사로 모시기도 했다. 스님 표현대로 “기구한 세대”다. “비구-대처 싸움 통에 희생된 사람들”중이 하나 인 셈이다.

<사진> 법문일정만으로도 공간을 찾아보기 어려운 스님의 수첩, 법문 회수가 6000회를 넘은지 오래다.

인연 닿는 대로 종단에서 심부름을 계속했다. 하지만 인재가 아쉬운 시절. ‘절 집에도 현대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절실하니 대학에 진학하라’는 권고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동국대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마치고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서 전국을 다니며 분주한 가운데도 총무원 감찰국장으로 시작, 총무부장을 비롯한 포교부장, 포교원장, 백양사 주지 등 25년간 종단 내외의 크고 작은 소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지킴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강단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제2대 교육원장 소임을 마친 후에는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 운문암 선방에서 세 철을 나고 청량암에서 정진한 후 이달 초 담양에 조성한 새 도량 마하무량사(성모사)에 주석하고 있다.

담양=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이상은 불교신문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

 

 

 

선생님..작가님...에서 선생, 작가란 뜻은 단독으로도 사용가능하다.

그럼 스님의 "스"자는 왜 생긴걸까 ?

 

간단히 말하면 '스님'의 '스~'는 '스승의 준말'이다.

그래서 스님의 의미는 '스승님'이지만, 그 본뜻은 '만인의 스승이 되실 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스님을 중이라고 많이들 부르는데,  중과 스님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 보면,

국어 사전의 사전적 의미로서 '중'이란?

중ː 절에서 살면서 불법을 닦고 실천하며 포교에 힘쓰는 사람. 본디는 삼보(三寶)의

하나로 그러한 단체를 이르던 말임. 법신(法身). 불자(佛者). 사문(沙門). 승(僧). 승가(僧伽).

승려. 높임말은 '스님'.

하지만, 원래 '중'의 의미는?

중(衆) : 한자로 무리 중. 산스크리트어의 상가(僧伽 승가:samgha)를 한자로 의역한 것

으로서 4인이상의 모임, 후에는 3인이상의 무리로 바뀌었다. 즉 대중(大衆)이라는

뜻이였다. 줄여서 '중'이라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스님의 낮춘 말'쯤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중의 본래적 의미는 '대중(大衆)'이다.

국어 사전의 사전적 의미로서 '스님'이란?
스님ː 1. 중이 자기의 스승을 이르는 말. 사승(師僧).

           2.<중>의 높임말.

하지만, 원래 '스님'의 의미는?

'스승님'의 준말로서, 이는 옛날부터 승려의 사명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

衆生)이라고 했다. 즉, '위(먼저)로는 보리(깨달음)를 구하고, 아래(나중)로는 중생을

구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먼저 수행을 통해 보리을 얻고, 다음으로  교화활동을 통해서 모든 중생을 건짐으

로서 불국정토를 건설하는 큰 스승이 되는 것을 본분으로 함으로 '스님'(스승님)으로

불리어 지게 된 것이다.


* 참고로, 성암도스님께서 "중이란 말은 승려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지 남이 불러주는 호칭

이 아닙니다. 왕이 자기 자신을 왕이라 하지 않고 짐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반 신도

나 아래 사람이 부를 때는 '스님'이라고 해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 대중(大衆)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

불교에서 비롯된 말로, 산스크리트 마하삼가(Mahasamgha)를 번역한 것이다. 불교 경전

에는,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르셨다’거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祈園精舍)에 계실 때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또 불교에서는 신도들을 일컬을 때 사부대중(四部大衆)이니 7부중(七部衆)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사부대중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출가하였거나 출가하지 않은 남녀 신도

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대중은 출가 여부에 관계없이 부처에게 귀의한 신도들을 가리

키는 말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의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는, 전통과 형식적 계율을 중시하는 부류를

상좌부(上座部)라 하고, 모든 중생이 평등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보적인 생각

을 하는 부류를 대중부(大衆部)라 하였다. 대승불교는 이 중 진보적인 수행자들의 부류인

대중부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변하여 개성이 없는 개인을

가리키거나, 계층적으로는 특권층에 대한 일반서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cafe.daum.net/daewonbuddha10  의 글에서 옮김 -

 

 

 

마하무량사

 

 

 

 

 

 

 

 

 

 

내려다 보이는 곳은 담양 읍내

 

 

맑음에 대하여...

 

성암도 큰스님

 

60년대 초반,

어린 초등학생과 팔팔한 청년의 만남이었었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암도스님과 말씀을 나누고 마당에 내려서니 담양 땅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멀리 왼쪽부터 불태산, 삼인산, 병풍산, 용구산이 차레로 도열한 모습이다.

 

답양읍내에 서 있는 오층석탑에 지는 노을

  

 

 


 

 

 

때는 60년대 초반.

 

"야 ~ 앗 ~~~ "

적막한 절간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기합 소리.

 

스님네들이 무예를 수련하느라 주먹을 내 지르고, 하늘을 붕붕 나는 모습을

 초등학교 저학년 쯤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우화루 문턱에 턱을 괴고 엎드려

침을 삼켜가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 많은 스님네 중에서도 유독 아이의 눈길을 끄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암도스님'이라 칭 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열혈 청년 스님.

 

집에 돌아온 어린아이는 나무를 깎아 새끼를 칭칭 동인 다음, 

아래쪽을 땅에 묻고서 냅다 주먹을 내 지르기 시작한다.

 

정권이 부어오르고,

나중엔 아예 감각이 없을 때까지 지르고 또 내 지른다.

 

군용 더불백을 구해다가 모래를 채우고 고리를 걸어 높이 내 건 다음

발차기를 시작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마당 한 구석,

 

그 아이는 아직도 내내 발차기를 멈출 줄 모른다.

퍽, 퍽, 퍽 ~~~

 

그러던 어느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이의 눈에, 

 당시 힘이 장사로 소문이 자자했던 백양사의 어떤 스님이 암도스님을 업고가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일인가 싶어 달려나가 알아본 즉,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뛰는 이른바 경공술을

수련하다 복숭아뼈를 다치게 되었단다. 피가 철철 흐르고 많이 아플텐데도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눈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 번은 백양사의 스님네 들이 아이의 집에 단체로 몰려와 무슨 항의를 하는 것 같았는데,

빙 둘러서 열을 올리고 있는 스님네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암도스님 왈,

 

"뭐, 별것도 아닌 것이로구먼...."

 

.

.

.

 

그로부터 세기도 바뀌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이천구년 오늘,

 

위에서 얘기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때의 어린아이가,

그 팔팔하고 붕붕날던 "암도스님"전에 삼배를 올리고 있다.

 

눈을 들어 그 옛날 청년 시절의  모습과 

, 지금 내 앞에 앉아계신 모습을 오버랩 시켜가며 암도 스님의 모습을 살핀다.

 

"............. !"

 

칠십객이면 노인이 분명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내 눈엔 노인으로 접수가 되질 않음은 무슨까닭일까...?

 

사하촌, 유일한 미션계 집안에서 성장하다보니,

오로지  요단강 건너 어드메에 있었다는 '바이블'에 나오는 예기만이 세상의 전부요,

기타 모두는 사탄의 대상일 뿐, 그 중에서도 다른 피조물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스님이라 불리운다는 암도스님께  삼배를 드렸다.

내심, 일배냐?  삼배냐? 를 놓고 잠시 방황했으나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면 되고,

담양의 '마하 무량사'에 왔으면 절집의 부처님 세계에 동화되면 그뿐.

 

설법의 대가였다는 '부루나 존자'.

이 시대의 진정한 부루나 존자라 일컫는다는 '암도스님'

 

스님과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다 보니, 너무도 상대를 편안케 해 주시는 배려에

그저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청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

 

옛 시절의 추억담에서 부터 시작하여, 당신이 공부해 오신 과정과 인생역정.

오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내일에 대한 지혜에 이르기까지,

입춘의 문턱에 너무도 어울리는 말씀과 지혜를 주고 계셨다.

 

기실, 세심원에서 만난 '이현석'처사를 통하여 암도스님의 소식과 거처를 알게되었고

청담을 대동, 겨울비와 함께 오늘 이 곳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스님의 속가 이름과 내 이름이 똑 같은게 아닌가!

이것도 범상찮은 인연...?

  

저녁 공양 시간이 넘도록 스님을 붙잡고 있음에 죄송한 마음으로 일어서는데

기어코 저녁을 먹여 보내신다고 공양간으로 이끄셔서 황송하기 이를데 없었다.

 

공양을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벌건 저녁 노을이 담양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산에 대한 스님의 해박함에 귀를 바짝 세운다. 절 뒷쪽 산을 가리키시면서,

 

"이게 곡성 '설산'에서 부터 이어져 온 능선이야" 

 

산꾼의 귀가 번쩍 하는 건 당연,

"언제고 날을 한 번 잡아 설산에서부터 출발, 괘일산을 거쳐 이 곳까지 와 봐야지...."

 

온통 대숲이었던 자리를 걷어내고 진행되어가는 불사에다

왕성한 포교활동까지 늘 빽빽한 일정임에도 불구하시고,

속가의 이 잡인을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보듬어주셔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뿐.

 

.

.

.

 

스님 늘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 茶泉 - 합장

 

 

 

 

● 2009. 2. 3 (화)

 

 

 

 

 

 

 

 

출처 : 취월당 유람록(醉月堂 遊覽錄)
글쓴이 : 茶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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