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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영화배우 김갑수

보현화 2010. 4. 16. 22:42

‘천의 얼굴’이 남자…“나는 미완성 배우”
[포커스신문사 | 글 김양수기자ㆍ사진 장세영기자 2010-03-22 14:20:39]
 

■ interview  제2의 전성시대 맞은 배우 김갑수

‘추노’‘거상 김만덕’등 종횡무진
극마다 다른 얼굴 분장에 고생도
후배 양성하는 연기감독 되고파

드라마 ‘추노’ ‘제중원’ ‘거상 김만덕’를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한 남자의 선명한 실루엣을 기억할 수 있다. 왕, 역관, 상인 등 드라마에서 각기 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한 사람이다.

얼마 전부터는 새 수목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와 영화 ‘혈투’ 촬영까지 들어갔다. ‘김갑수 전성시대’란 말이 무색하다. ‘멀티맨’이 되어 돌아온 배우 김갑수(53)에게 근황을 묻자 “시청자들에게 너무 죄송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기자는 한 작품에 전념해야 옳지만 의리 때문에…. 매일 다른 작품에서 다른 연기를 하다보니 너무 피곤하네요. 열흘간 집에 못들어가기 일쑤고, 1주일에 6일 이상은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 있죠. 분장팀에서는 그나마 알레르기가 없어 천만다행이라네요.”

현재 출연 중인 작품만 5개, 그는 이번 드라마 출연 러시 ‘사태’의 이유로 ‘의리’를 꼽았다.

“‘추노’ 곽정환 감독이 예전부터 같이 작품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마다 기회가 안 닿았어요. 이번엔 꼭 작은 역할이라도 맡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거상 김만덕’은 강병택 감독이 초반 8회만 도와달라고 해서 합류했어요. 시작 전 감독에게 ‘나쁜 놈이니 얼른 죽여달라’고 했죠.”

그는 드라마마다 서로 다른 느낌을 전하기 위해 힘겨운 분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상 김만덕’에서는 냉혈한 상인 강계만 역을 소화하기 위해 얼굴에 테이프를 붙였다. 덕분에 강렬한 눈초리는 만들었지만 촬영 내내 극심한 두통을 달고 살아야 했다. 더 나은 연기를 위해 외국인배우와 전화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중원’ 초반엔 영어대사가 많았어요. 그래서 션 리차드(알렌 역)와 몇차례 통화했죠. 근데 그 시대의 역관이 영어를 뭐 얼마나 잘했겠어요? ‘당시엔 나처럼 ‘한국식 영어’를 구사했을 것’이라며 많이 위안했죠.”

연기 23년차의 김갑수는 극단 ‘배우세상’의 대표이자 감독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는’ 배우다. 하지만 스스로는 “아직 미완성”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좋은 배우는 어떤 캐릭터든 자신의 몸에 담아낼 수 있고, 인간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죠. 앞으로도 끝없이 살아 있는 연기자로,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연기감독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스타성과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들이 많이 나와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연장해주길 기대해봐요. 이번 작품에도 그런 연기자가… 있네요.(웃음)”

/글 김양수기자ㆍ사진 장세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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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는 내 고향 9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도 몇 년이 흐른 시간. 대학로 옆을 지나던 샛강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는 추억의 골짜기를 따라 맑은 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다. 숫기 없던 소년을 배우 김갑수로 만든 ‘제2의 고향’ 대학로. 비록 외관은 바뀌었지만 무대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배우 김갑수에게는 고향이 두 곳 있다. 첫 번째는 1957년에 태어나 가난하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던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이다. 흑백사진 속 애잔한 골목길 풍광을 담고 있던 금호동은 소박했던 추억의 단면도 갖고 있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란히 강가에 앉아 개구쟁이 아이들의 소변 자국을 연신 비비며 빨래하던 곳이었고, 그 옆으로 곳곳에 널어놓은 하얀 이불이 바람에 살랑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때 금호동 인근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동네 어머님들이 모두 나와 그 앞에서 빨래를 했고, 동네 꼬마 녀석들은 그 옆에서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죠. 혹시 금호동에 가보셨어요? 지금은 전부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돼서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요. 추억을 떠올릴 만한 그 어떤 흔적도 없으니까. 가끔 옥수동을 지나다가 한강을 바라보면서 내가 수영하던 곳이 저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고등학교 때 어머님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상상하기도 힘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밥을 굶는 것이 다반사이던 시절이라 금호동이 고향이긴 하지만 제 기억 속에 회상할 만한 추억이 그리 많지 않네요. 대신 20대부터 청춘을 불살랐던 대학로가 저에겐 제2의 고향이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곳

대학로에서 다시 만난 그는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지나온 세월만큼 대학로도 변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30년 전 그때의 풍광이 자리한 듯 속사포처럼 말을 꺼냈다. 
      
“여기. 바로 여기가 56년부터 지금까지 쭉 자리하고 있는 학림다방입니다. 저기. 바로 저기가 그 유명했던 오감도 자리입니다. 대학로에서 제일가던 고급 레스토랑이었죠. 지금은 아예 흔적도 없고 전혀 다른 가게가 들어섰지만, 가난한 연극인 시절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곳입니다. 워낙 비싸니까 제 사정으로는 엄두도 못낼 곳이었죠. 저기 대학로 로터리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가던 허름한 막걸리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쪽 마로니에공원 옆에는 이화동까지 흐르던 냇물이 있었죠.”

김갑수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금호동이지만 그를 배우로 태어나게 만든 곳은 바로 대학로다. 스스로도 대학로를 제2의 고향이라 말하는 이유는, 연기라는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 대학로에 입성하면서부터 달라진 그의 꿈 때문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의외입니다. 제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말이죠.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정말 숫기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조차 없었던 아이였거든요. 집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책이나 보는 게 다였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질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단 한 번도 연기를 꿈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워낙 어렵던 시절이니 대학에 들어갈 돈도 없고 지금처럼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았던 시절도 아니라,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하던 시절이었죠. 그런 제가 배우가 되다니 참 신기하지 않나요?(웃음)”

그저 장난스레 배우가 되어볼까 생각하던 스무 살. 친구들이 신문에서 오려온 단원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대학로로 찾아가 현대극단 1기에 뽑히면서 연극인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김갑수. 하지만 그에게 연기란 그리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극단에 들어가서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2~3년간 온갖 심부름을 다하며 대사 한 줄 없이 지나가는 행인이나 말 없는 동네아저씨 역을 맡았죠. 그러다 <멀고 긴 터널>이라는 작품에서 대사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84년 큰 무대였던 <님의 침묵>에서 주인공을 맡아 그제야 김갑수의 이름을 연극계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 정말 잊지 못할 장소죠. 처음으로 대사를 할 수 있는 배역을 맡았는데, 그때 밤낮으로 대본을 외우던 자리가 문예회관 앞 마로니에공원입니다. 지금은 문예회관이 아르코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저기 오래된 고목나무와 건물은 여전히 그대로죠. 단 몇 마디뿐인 대사였지만 이곳에 앉아 대본이 닳도록 외웠거든요. 아, 진짜 옛날 생각나네.”

그에겐 대학로의 모든 것이 ‘청춘’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연기를 하겠다는 열정만으로 연극인의 꿈을 키웠던 곳. 으리으리한 문예회관에서 공연해보고 싶다며 연기자로서의 큰 포부를 되새겼던 곳. 그리고 가난했던 연극인 시절 고단한 마음을 다독여주던 마로니에공원의 커다란 고목까지, 여전히 그에겐 대학로의 모든 것이 오랜 친구요, 젊은 날의 표상이다.  


연극인들의 꿈을 보듬어주던 곳

다시 발길을 돌려 그가 자주 찾아가 젊은 날의 고뇌와 연기열정을 품었던 곳으로 향했다. 지금도 여전히 추억의 명칭을 쓰고 있는 ‘학림다방’이 바로 그곳. 김갑수뿐 아니라 수많은 연극인들이 닳도록 오르내렸을 낡은 나무계단에 첫 발을 올려놓는 순간, 그는 잠시 남다른 감회에 빠졌다.

“여긴 모든 게 다 그대로입니다. 간판이 새것으로 바뀌었을 뿐 이 계단도 그대로고. 안에도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놓여있는 것 빼고는 30년 전 학림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네요. 우리 세대가 다 그랬듯 이곳에서 미래를 꿈꾸며 연극을 논했습니다. 어쩌다 돈이라도 생긴 날이면 학림다방에 와서 분위기 있게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했죠. 여기 앉아 있으면 마로니에공원이 한눈에 다 보였어요. 지금이야 야외공연장이 들어서서 시야가 탁 트이지는 않지만 학림다방 2층에서 바라보는 마로니에공원은 졸졸 흐르던 냇물 때문에 더 운치가 있었죠.”  

가난하던 연극배우 시절, 김갑수의 20대를 송두리째 바쳤던 대학로에는 젊은 날의 고뇌를 치유해주던 공간도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대학로 로터리 어디쯤. 미닫이 창문이 길 밖으로 나 있어 지나가던 행인과 눈을 마주치며 한 잔 술을 걸쳤던 추억의 막걸리집이 있었다고. 빈곤한 주머니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께서 가끔은 막걸리 한 사발을 공짜로 내어주시던 정 많은 선술집. 배우 김갑수는 그때 그 막걸리 집을 이렇게 회고했다.

“안에서 머릿고기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있으면 창이 전부 길 밖으로 나 있어 지나가는 사람이 누군지 일일이 다 알 수 있었죠. 그때 연극인들이 그 길로 참 많이 다녔는데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를 때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버선발로 달려 나가 반갑게 인사하며 함께 막걸리를 들이켜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또 얼마나 운치 있었는데요. 함박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뽀드득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배고프고 막막했으며 언제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를 불안했던 젊은 날이었지만, 그곳이 있었기에 수많은 연극인들이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주인아주머니, 정말 뵙고 싶네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다


대학로는 배우 김갑수에게 잊을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김갑수가 만든 극단 ‘배우세상’이 생겼고, 4년 전 작고 아담한 ‘배우세상 소극장’이 문을 열며 그는 다시 대학로로 돌아왔다. 간혹 젊은 세대들에게는 영화 <장화, 홍련>의 문근영 아빠로, 아주머니 팬들에게는 <태조, 왕건> 궁예의 책사 종간 역을 맡아 절대군주 아래 고뇌하는 2인자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연기는 단지 누군가의 아빠 모습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역할을 맡든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의 연기는 올 한 해도 바쁜 행보가 예정되어 있다. 2010년 3월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신데렐라 언니>와 <거상 김만덕> 외에도, 현재 방영 중인 <제중원>과 <추노>에서 배우 김갑수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물론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건 사실이지만, 대학로에서의 시간이 없었다면 제가 지금처럼 이렇게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제 20대의 청춘을 무대 위에서 모두 쏟아 보냈던 만큼 이곳은 절대 잊을 수도,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고향 그 이상으로 말이죠.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연극 <칼맨>의 주인공을 맡아 관객들을 만났는데, 꼭 무대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연극의 끈을 놓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극단을 만들었고 극단 소극장도 문을 열게 된 것이죠. 물론 아직도 연극계의 실정은 힘듭니다. 극단과 소극장을 꾸려가려면 정말 제가 밖에서 열심히 활동해야만 하죠. 경제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드라마와 영화 덕분에 수많은 분들이 저를 응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만큼, 이제는 힘들게 배우의 꿈을 꾸고 있는 후배들과 형편이 여의치 않은 청소년들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현재 그는 오는 3월 장애인들을 위한 <칼맨> 공연을 앞두고 있고, 음악을 하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워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청소년들이 드럼과 토카 등 전문악기를 배우고 연주할 수 있도록 4인조 음악꿈나무들을 모집 중에 있다. 또 소극장협회 이사장을 맡아 대학로의 연극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도 변함없이 배우로서의 다양한 행보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어느덧 대학로 곳곳을 거닐던 그에게 젊은 여성 팬들이 달려와 사인을 요청한다. 이름값 하는 배우가 된 그에게 지금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그래도 곳곳에 자신의 젊은 날이 숨 쉬고 있는 대학로에서 젊은 팬들을 만나니 그 역시 싫지 않은 기색이다.   

“무명시절 마로니에공원에서 꿈을 키웠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니 감개가 무량하네요. 아마도 대학로가 꿈을 이뤄주는 명당이었나 봅니다. 자, 이참에 명당자리 몇 바퀴 더 돌아볼까요? 기왕 걷는 김에 아주 그냥 구석구석 말이죠.(웃음)” 


/ 여성조선
  취재 피옥희 | 사진 이상윤